자유 폴란드군

1 개요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망명 정부가 조직한 군대. 폴란드 서부군(Polskie Siły Zbrojne na Zachodzie)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1][2] 총병력은 25만 가량으로 소련군, 미군, 영국군에 이어 네번째로 큰 규모[3]를 자랑했고, 영국 본토 항공전몬테카시노 전투 등의 격전에서 분투하면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2 역사

2.1 창설

1939년 나치독일의 침공 이후 불과 한 달만에 폴란드 제2공화국은 붕괴한다. 이후 파리로 망명에 성공한 정치인들은 같은 해 9월 30일에 폴란드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망명 정부 산하에는 함께 프랑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8만 5천여 명의 병력이 있었고, 이들이 자유 폴란드군의 첫 일원이 된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가운데 4개 사단이 조직되었고, 이들은 재편성과 거의 동시에 프랑스군 산하에 편재되어 다시 나치 독일과의 항쟁에 돌입한다.

2.2 활동

1940년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당시 1개 여단이 파견되어 나르비크 항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곧바로 이어진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폴란드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곳곳에서 독일군과 격전을 치른다. 하지만 프랑스 침공 당시 자유 폴란드 군은 독립된 군으로 무엇을 해볼만한 인력을 갖추지 못한 채 프랑스군의 일부로 소속됐다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모리스 가믈랭을 비롯한 프랑스군 수뇌부의 연이은 삽질로 인해 결국 패주해야만 했다. 프랑스에서의 참패는 자유 폴란드군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와서 폴란드군은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을[4] 상실하고 영국으로 재차 이동해야만 했다. 잔존 병력들은 영국에서 폴란드 제1 군단으로 재편성을 마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오를 잡으려고 군단이라는 명칭을 붙인거지, 실제 병력수로는 사단 하나 꾸리기도 버거웠다(...)

이런 와중에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과 독일의 관계가 동맹국에서 적성국으로 돌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유 폴란드군의 숨통을 틔워준다.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협정을 맺어 소련에 포로로 잡혀있던 약 8만여 명의 병력들을 되돌려받았고 이들은 폴란드 제2군단으로 편성되어 중동으로 배치된다. 문제는 장교를 구성할 인적자원이 카틴 학살로 인해 싹 날아가 버렸다는 거지 어쨌든 1943년 무렵이 되면 제2군단을 비롯해 각종 병력들을 긁어모은 결과 자유 폴란드군은 20만을 넘기는 병력을 자랑하게 되고 이들은 북아프리카 전선, 이탈리아 전선, 서부전선 곳곳에서 활약한다. 특히나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측의 공수부대와 치열하게 맞서싸운 몬테카시노 전투는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 중간중간에 마켓가든작전과 같은 시련이 있기는 했지만 종전 시점까지도 자유 폴란드군은 꾸준히 활약을 펼치면서 독일을 격파하는 데 있어서 한 축을 맡는다.

2.3 그외

한편 자유 폴란드군 내에는 140여명의 전투기 조종사들도 있었고, 폴란드 육군이 재건에 애를 먹고 있던 시기에 이 조종사들이 조국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폴란드 침공 당시부터 독일 공군과 맞서본 경험이 풍부했던 이들은 영국 공군 소속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도 참여한다. 영어가 서툴어서 이런저런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지만[5], 수는 영국 공군 파일럿 중의 5% 정도에 불과했지만[6] 전체 격추수의 12%에 기여하면서 눈부신 전과를 기록한다. 또한 자유 폴란드군 내부에는 해군도 있었는데, 2차대전 이전부터 이미 폴란드 해군은 시망에 가까운 상태[7]였던만큼 별로 큰 기여는 할 수가 없었다.[8]

3 토사구팽

하지만 서방은 종전과 동시에 이들을 배신한다.[9]

자유 폴란드군이 충성을 바친 폴란드 망명 정부는 국경 문제를 놓고 소련과 갈등이 고조되다가 1943년 4월 카틴 학살로 인하여 끝끝내 단교한다. 이 단교는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연합국 주요 수뇌부들을 격노케한다. 단교 이후 스탈린은 거리낌없이 폴란드 공산당을 밀어주면서 폴란드를 위성국가로 삼으려 했고, 이를 방지하고자 1944년 8월 폴란드 국내에서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는 처절하게 진압당한다. 이듬해 2월의 얄타 회담을 통하여 서방과 소련은 폴란드 내 자유선거를 치르는 방안을 합의했지만 이는 기만에 불과했고 폴란드에서는 부정선거 끝에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서방은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폴란드 망명정부의 승인을 취소하면서 문자 그대로 토사구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승인이 취소됐지만 폴란드 망명정부는 해체를 거부하고 런던에 잔존한다.[10]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을 더욱 격분하게 만든 것은, 영국의 배신이었다. 1946년 여름, 런던에서 열린 승전 기념 행진에 자유 폴란드군은 초청을 받지 못하면서 이런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영국은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의 노동당 정권이 집권하며 소련의 위성국가인 폴란드 공산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상태였고, 따라서 자국에 남아 있는 자유 폴란드군은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일부 예외도 있어서 본토 항공전에 영국공군 소속으로 참전한 폴란드 공군 조종사들은 초청을 받았지만, 그들은 전우들과의 의리를 고려하여 영국 정부의 초청을 거절했다[11][12]. 전후 야당지도자로 활동한 처칠은 승전 기념 행진이 있기 사흘 전에 하원 연단에 올라 이 같은 현실을 비판하며 유감을 표명했다[13].

한편 자유 폴란드군 역시 공식적으로는 1947년에 해체되었지만 대다수의 병사들은 고난길이 뻔히 보이는 조국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망명정부와의 동행을 택한다. 그래도 안데르스 장군의 지휘하의 폴란드 제2군 소속의 15000명의 장병들이 종전 이후 폴란드로 귀국했다. 고국으로 돌아간 이들 장병들은 붉은 완장을 찬 소련 앞잡이들에게 '반동'으로 몰리며 감시와 처벌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14] 이 소련 앞잡이들의 일부는 나치였다가 완장을 갈아찬 부류도 있었기 때문에 귀국 장병들의 분통은 더 할 수 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서구의 배신은 단순히 정부 차원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종전 직후인 1946년 무렵이 되면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도 반폴란드 여론이 팽배했다. 이유는 영국 내 체류하는 폴란드 망명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분노 때문. 그리고 그 피해의식은 EU 결성 후에도 반복된다. 아예 타임지에서 이들 폴란드인들을 잉여 영웅(Surplus Heroes)라고까지 언급했을 정도. 아예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을 정도.

볼락이라는 자유 폴란드군 장교는 영국에서 다음과 같은 수모를 겪었다고 밝혔다..

전쟁이 끝나고 볼락은 군복을 입은 채, 그의 영국인 여자친구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 한 대가 내 앞에 정차하더니, 거기에 타고 있던 신사가 내리며 볼락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보시오, 소위. 내가 질문 하나 해도 되겠소? 당신네 폴란드 인들은 도대체 얼마동안, 우리 영국 빵을 축낼 작정이요? 당신은 전쟁이 끝난 것도 모르는 거요?"
이런 수모를 겪은 볼락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로 귀국했다. 그는 군복을 입은채 귀국 했고, 폴란드 비밀경찰은 24시간 동안 그를 감금했다. 심문관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도 당신이 폴란드에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아. 우리는 당신같은 사람이 필요없어."
볼락은 곧 석방되었지만, 이후 오랫동안 변변치 않은 일자리들만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는 폴란드 공산정권 치하에서 단 한번도 안전하고, 자유롭다고 느껴본 적인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들의 한은 90년대 폴란드 공산정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로 뒤늦게 풀렸다.

4 관련항목

  1. 폴란드 동부군도 있었다. 이 쪽은 공산당 계열 하의 군대로 소련의 지휘하에 싸웠다. 다만 규모는 동부군이 44만 정도로 압도적
  2. 근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폴란드 동부군은 폴란드 전역을 흝으면서 폴란드 젊은이들을 징병한 것도 있기 때문에 당연히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3. 자유 프랑스군은 대략 8만 명 정도였다.
  4. 공식적인 전사자만 6천여 명에(참고로 프람스 침공 당시 연합군의 총 병력 수는 335만 명이었고 이 중 전사자는 10만 내외였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들과 이를 피해 (중립국) 스위스로 도망간 병사들의 수를 합쳐 3만여 명 가까이에 달했다. 사령관 시코르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영국에서 재편성을 끝냈을 당시 수하에 집계된 병력이 3만 5천여 명 가량.
  5. 급박한 전투 와중에 서툰 영어 대신 모국어가 튀어나와서 영국인 동료 조종사들이나 관제탑이 어리둥절하는 일이라던가 격추되어서 기지로 복귀하려는데 이들을 독일군으로 착각한 영국 시민들에게 몰매를 맞는다던가 등등...
  6. 그래도 당시 영국 공군 내에서 전체 2위의 비율이었다. 1위야 당연히 85% 가까이를 차지한 영국인.
  7. 구축함 3대가 사실상 해군 주력의 전부(...)였다. 뭐 전쟁 발발 이후에는 랜드리스(+ 큰 상선들 징집)덕분에 그래도 전력이 나름 증강됐다. 폴란드 수뇌부들도 자신들의 해군이 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발발과 동시에 이 구축함 세 대를 페킹 작전으로 영국에 피신시켰다. 이후에도 추가로 폴란드 잠수함들이 독일의 눈을 피해 영국으로 튀었다.
  8. 그래도 '큰' 기여를 못한것 뿐이지 비스마르크 추격전에도 참여했었고 상선들을 유보트로부터 보호하는 임무에도 투입되면서 자기 몫은 꾸준히 해낸다.
  9. 2차대전 종전 후 자유 폴란드군은 광복군과 비교도 안 될 수준의 수모를 당한다. 대한민국 광복군은 애초에 숫자가 적어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자유 폴란드군은 위에 언급된 대로 연합군에서 네번째 규모였다. 그런데 전후 아무런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10. 동유럽의 민주화레흐 바웬사를 수반으로 하는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50년 가까이 런던에 머무른다.
  11. 몬테카시노 전투에 참전한 한 폴란드 병사는 당시를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영국의 이런 면모가 싫다. 나는 이것을 기억하겠다. 그리고 당신들도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영국의 비인간적 처사였다."
  12. 그리고 정작 애틀리가 초대한 폴란드 공산 정부는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참석을 거부했다.
  13. "나는 이런 배신적인 행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싸웠고, 공동의 대의를 위해 피를 흘렸던 폴란드 군인들이 이번 행사에 초대를 받지 못한 것은 큰 유감이다."
  14. 포츠담 회담을 거쳐 이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을 약속했지만 현실은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