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회담

Potsdam Conference(영어)
Потсдам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러시아어)
Die Potsdamer Konferenz, Konferenz von Potsdam(독일어)
ポツダム会談(일본어)


왼쪽부터 클레멘트 애틀리, 해리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

1 개요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세실리엔 궁전[1]에서 연합국 지도자[2][3]들이 2차 세계대전 전후 질서 수립 및 태평양 전선 종결을 논의한 회담이다.

2 결과

2.1 합의 사항

  • 일본

유럽에서의 전쟁은 5월 9일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됐지만, 일본은 패전이 분명한 상황임에도 1억 총옥쇄를 부르지으며 전쟁을 지속했고 이런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물론 눈치없는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한 큐에 거절했고 그 결과는 인류 역사 최초의 핵무기 실전 투입이었다.[4]

  • 독일 / 오스트리아

독일 / 오스트리아는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이 각각 한 구역씩을 통치하기로 결정된다.[5] 또한 오데르-나이세 선의 정확한 영역이 정해져서 결과적으로 독일은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등 동부 영토의 대다수를 상실하고 이 영토는 폴란드와 소련에게 귀속된다.[6] 오데르-나이세 선 바깥에 살고 있던 1,400만명의 독일인들이 강제로 이주당한 것은 덤. 물론 전시에 히틀러가 다른 나라에게서 강탈한 영토는 당연히 원상복귀가 이루어졌다.

전쟁 배상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독일은 대략 230억 달러 정도의 전쟁 배상금을 연합군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상금은 주로 산업시설과 기계류들을 뜯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며[7] 상대적으로 소련의 점령 지역이 산업화가 덜 이루어진 동부지역이었던만큼 영/미 측은 자신의 몫으로 가져갈 산업시설 중 10%를 소련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한다.

또한 연합국은 독일의 전쟁 도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독일에서 탈나치화, 비무장화, 민주화, 비중앙집권화 등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리는 것이 결정됐으며 탱크, 항공기 등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중공업 산업 시설들이 해체가 된다. 연합국은 아예 '독일의 경제력은 유럽 평균치를 넘지 못하게 한다.'라고 결정짓고 독일을 경공업 국가로 만드려고 한다.[8] 물론 냉전 덕분에 2년도 안되어서 싹 다 백지화가 이루어진다.

  • 그 외

서방측은 스탈린에게 폴란드에 멋대로 공산당 정부를 세운 것에 거세게 항의를 했고 결과적으로 '폴란드에 임시정부를 세운 뒤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스탈린의 기만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폴란드는 그대로 소련의 위성국가에 머무르게 된다. 한편 이 임시정부 수립으로 런던에 존재했던 폴란드 망명 정부는 말 그대로 새가 됐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붕괴되고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되는 1990년까지 폴란드 망명 정부는 런던에서 계속 머무르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한다.[9] 그래도 폴란드 망명 정부를 팽한 것이 미안했던지 영국 측에서 노력을 한 끝에 폴란드 망명 정부 산하 폴란드 자유군은 어떠한 불이익도 없이 고국으로 귀국하는 것이 허락됐다...는 것은 표면상이고, 실제로 이들은 서방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사자 풀 뜯어먹는 소리를 듣으며 학대받았다. 소수는 처형되었고, 거의 대부분은 변변찮은 일자리를 전전해야 했다.

덧붙여서 인도차이나 일대에서도 전후 질서가 계획되는데, 베트남의 분리가 최초로 결정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북위 16도를 기준으로 이북지방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군이 진주하기로 결정됐으며, 이남지방은 영국군이 진주하기로 결정됐던 것.[10][11]

2.2 냉전의 시작

이미 5달전이었던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부터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냉전은 포츠담 회담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부 유럽 곳곳에 소련은 자신의 위성국가들을 세웠고, 특히나 자유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던 얄타 회담에서의 약속을 뒤집어버리고 스탈린이 폴란드에 공산당 통치 체제를 세운 사실은 서방측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스탈린 본인은 동유럽 일대를 소련의 영향권 안에 둔 것을 방어정책의 하나라고 보았다는 것[12][13]

게다가 전반적으로 스탈린에게 우호적[14]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1945년 4월 뇌출혈로 사망한 이후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15] 역시 서방과 소련 사이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는 영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처칠 이 양반이야 원래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소련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았고, 처칠의 후계자였던 클레멘트 애틀리는 노동당 출신임에도 스탈린을 '악의 화신'으로 여기며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1. 호엔촐레른 왕가의 여름 궁전이었다.
  2. 이오시프 스탈린, 해리 트루먼, 윈스턴 처칠이 처음에 참여하였다가 영국의 경우 회담 도중에 정권 교체가 일어나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가 참여했다.
  3. 중국 대표 장제스는 중일전쟁을 아직 수행하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이후에 서명한다는 양해를 얻어 불참했다.
  4. 여담으로 트루먼은 회담 도중 스탈린에게 강력한 신무기를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는데, 이미 각종 스파이를 통하여 미국이 원폭을 개발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스탈린은 '그 무기를 일본에 적절하게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당히 받아쳤다.
  5. 베를린, 은 수도라는 위상을 고려해서 따로 사등분된다.
  6.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독일이 잃은 영토는 1937년(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기 이전) 독일 영토의 25% 가량이었다.
  7. 물론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은 그런 거 없이 돈되는 거라면 싹 다 털어가려고 했지만 베르사유 조약으로 지나치게 가혹하게 패전국을 대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윈스턴 처칠이 뜯어말렸다. 이 때 처칠이 스탈린에게 했던 말이 '말에게 채찍질을 하려면 적어도 말이 먹을 건초는 남겨둬야잖소'(...)
  8. 독일뿐 아니라 일본 역시 이와 비슷한 케이스를 겪게 된다. 당시 연합국은 전범국가였던 이들에 대한 공업대국화를 철저하게 막으려 했다. 그리고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위협으로 인해 다시 일어선다.
  9. 여담이지만 현재 폴란드의 헌정체제인 폴란드 제3공화국은 자신들이 폴란드 망명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보고 있다. 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괴뢰국이라는건가 애초에 폴란드 망명 정부가 1990년 자발적으로 해체한 이유도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되어서이고.
  10. 물론 전쟁 직후 제 코가 석자인지라 베트남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영국은 그냥 프랑스에게 이 지역을 맡겨버렸고 프랑스가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찍어내리려고 함에 따라 베트남은 30년 가까이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11. 참고로 남베트남, 북베트남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참패한 이후 미국이 이 일대에 개입하면서 부터이다. 포츠담 회담과는 별개의 일.
  12. 적백내전 이후로 1980년대까지도 소련의 지도층들은 서방이 다시 소련을 침공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런 공포에 결정타를 날린게 바로 히틀러가 독소불가침조약을 멋대로 파기하고 일으킨 독소전쟁.
  13. 물론 그렇다고 스탈린이 이런 팽창적인 대외정책을 철저히 방어정책이라고만 생각했다고 여기면 심히 곤란하다. 방어정책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2,000만명의 목숨과 맞바꾸어 얻은 승리에 대한 전리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14. 덕분에 냉전 기간 내내 루즈벨트는 정계, 학계를 가리지 않고 스탈린의 야망을 과소평가해서 냉전을 불러일으켰다고 가열차게 씹혔다.
  15. 해리 트루먼은 전반적으로 반공적인 성향이 루즈벨트보다 강했으며, 소련의 공격적인 팽창주의 대외 정책에 철저히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포츠담 회담 이후의 일이지만 트루먼 독트린이 가장 좋은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