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망명 정부

폴란드의 역사
Historia Pol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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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왕국폴란드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독일령




포젠독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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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망명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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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령크라쿠프오스트리아령나치 독일령폴란드
인민
공화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러시아령입헌왕국러시아령소비에트령
폴스카 공화국
Rzeczpospolita Polska
망명 정부
국기국장
1939년 ~ 1990년
정부청사 위치파리(1939 ~ 1940)
런던(1940 ~ 1990)
수도바르샤바
정치체제공화제
국가원수대통령
언어폴란드어
민족폴란드인
주요사건1939년 설립
1989년 해체
성립 이전폴란드 제2 공화국
붕괴 이후폴란드 제3 공화국[1]

1 개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폴란드 제2공화국이 무너지자 이로 인해 세워진 망명 정부. 2차대전 후 본토에 정부를 세울려 했지만 그 이전에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먼저 세워져서 결국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이 세워질때 까지 계속해서 존속한다. 90년, 현재의 폴란드 제3공화국이 세워지자 폴란드 망명 정부의 국새, 대통령기, 국장을 전부 레흐 바웬사에게 넘겨주고 해체하였다.

2 설립

1939년 9월 30일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의 패망이 분명해지자 상원 의장 브와디스와프 라츠키에비츠가 망명해있던 파리에서 새로운 폴란드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설립되었다. 수상 겸 자유 폴란드군의 사령관으로는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가 임명됐다. 서방 연합국과 폴란드 국민들 대다수에게서 빠르게 정통성을 승인받은 라츠키에비츠는 사회당, 노동당 등의 좌파계열 야당들도 망명 정부에 참여시켰고, 의회의 해당되는 국민 위원회도 설치했다. 라츠키에비츠와 시코르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망명 정부의 목표는 단 하나, 나치 독일을 패퇴시킨 뒤 폴란드에 민주주의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3 항전

1939년 말에 접어들면서 소련군과 독일군의 추적을 피해 남부의 헝가리루마니아로 탈출한 폴란드군들이 속속 폴란드 망명 정부 수하로 집결되기 시작했다. 육군만도 10만 가량을 헤아렸으며[2] 해군 역시 영국으로 집결했다.[3] 이렇게 조직된 자유 폴란드군은 이듬해 봄에 일어난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군 지휘 하에 분투를 벌이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망했어요. 프랑스의 몰락 이후 폴란드 망명 정부는 다시 런던으로 위치를 옮겨야만 했다. 영국으로 옮긴 뒤에도 폴란드 망명 정부는 독일에 대항하여 영웅적인 항쟁을 계속했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도 영국 공군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4] 이들은 폴란드 본토와 프랑스에서 계속된 항공전을 겪은 고참 베테랑 조종사들로서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한 연합국 조종사의 5% 정도를 차지했지만 전체 격추 비율의 12%를 차지하며 숫자에 비해 가장 큰 활약을 펼쳤다.

이어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폴란드 망명 정부는 소련과 외교 관계를 재수립했고 폴란드 침공 당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감금됐던 폴란드 군인들은 석방되어 소련군 혹은 자유 폴란드군의 일원으로 독일과 다시 투쟁을 벌여나갔다. 하지만 폴란드 망명 정부와 소련의 사이는 외교 관계 수립 후에도 여전히 개차반이었다. 우선 스탈린모스크바에 자리잡은 폴란드 공산당을 노골적으로 밀어주면서 폴란드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려는 속내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게다가 종전 후 1939년 전쟁 발발 이전의 영토로 복귀할 것을 요구한 폴란드와 달리 스탈린은 커즌 라인을 지키고 싶었던 것도 분쟁의 한 몫을 차지했다.[5] 한편 폴란드 망명 정부는 1939년의 전쟁에서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와 병사들을 석방하여 폴란드군을 결성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소련 측에서 벌인 어떤 사건 때문에 폴란드 장교층이 죄다 날아가서 제대로 된 군대를 꾸릴 수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좀 더 기후조건이 나은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중동으로 이동, 후에 북아프리카 전선과 몬테카시노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43년 4월 카틴 학살이라는 초초초대형 전쟁 범죄가 소련의 소행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마침내 폴란드 망명 정부와 소련은 단교를 해버린다.[6]

4 냉전 시기

종전 이후 서방측은 커즌 라인을 소련과 폴란드의 국경으로 승인하는 대신[7][8] 폴란드를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일환으로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자 했지만 강철의 대원수께서 그러실 리가 있나... 당연히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폴란드에는 공산주의 국가가 선포되었다. 이에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인민 공화국의 승인을 거부한 채 폴란드에서 민주주의에 따라 진정한 국가가 수립될 때까지 런던에 머무를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힘없는 자의 설움은 여전해서 인민 공화국의 수립 이후 프랑스, 영국, 미국마저 폴란드 망명 정부를 외면하였다. 즉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승인하고 폴란드 망명 정부의 승인을 취소해버렸던 것.[9][10] 여기에 1950년대 중반부터는 망명 정부 안에서마저 내분이 일어나 두 개의 망명 정부가 존재하는 병크까지 터졌다. 하지만 이런 악재의 연속에도 폴란드 망명 정부는 그들을 지지하는 자유 폴란드군 출신의 5만여 폴란드인들과 함께 꿋꿋이 버텨나갔고 마침내 1990년 2월 레흐 바웬사폴란드 제3공화국을 수립하자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부터 지니고 있던 국새, 국장, 헌법 초안을 바웬사에게 넘겨주고 자진으로 해체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5 기타

  • 시인 김광균의 시 '추일 서정'에서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포화(砲火)에 이지러진/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 대중에게 폴란드 망명 정부가 이름이나마 알려지게 된 가장 큰 이유.
  1. 현재의 폴란드이다.
  2. 나중에는 소련에서 석방된 폴란드 포로와 해외 폴란드 교포의 입대까지 합쳐서 20만 명으로 불어난다.
  3. 이렇게 집결한 해군 전력 중에는 폴란드 해안에서 당시 중립국이었던 에스토니아까지 도망쳤다가 거기서 탈출하여 다시 영국으로 도망친 전투종족들도 있었다.
  4. 복수심에 불타는 폴란드 조종사들이 독일 공군만 보면 어찌나 닥돌을 했던지 어떻게든 자국 공군의 피해 규모를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던 영국 공군이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였다. 거기다 야사이기는 하지만 흥분만 하면 서툰 영어 대신에 폴란드어가 튀어나왔던지라 아 너무 흥분해서 폴란드어가 나왔네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도 좀 심각했다고...
  5. 물론 처음부터 단호박으로 거절하진 않았다. 알았다는 답만 한 채로 '일단 나치부터 조지고 돌려줄게'라면서 밍기적 밍기적 시간을 끌다가 종전 후에 자기의 따까리인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고는 '1939년의 국경? 그게 뭐임?'이라면서 아몰랑을 시전했다. 영국과 미국은 당연히 폴란드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일을 격퇴시키는데 엄청난 공헌을 한 소련의 눈치를 안볼래야 안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얄타 회담포츠담 회담을 통해 커즌 라인을 승인하고 만다. 립서비스만 해줬던 셈 그나마 폴란드에게 다행이라면 뺏긴 몫만큼 독일에게서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를 가져왔다는 것 정도.
  6. 정확히는 폴란드 망명 정부가 진상 조사를 하려고 하자 소련에서 단교를 선언했다. 게다가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된 시코르스키 수상은 의문의 비행기 사고를 당하며 사망하고 말았다. 70년 뒤 폴란드의 대통령이던 레흐 카친스키가 이 곳을 방문하려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흠좀무한 대목.
  7. 단 소련 점령지역 중에서도 동부의 비아위스토크와 그 주변지역만은 다시 폴란드에 반환되었다.
  8. 물론 폴란드는 끝까지 반대했다. 힘없는 자의 설움
  9. 심지어 대사관까지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게 내주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동아시아의 어떤 섬나라가 떠오르면 기분 탓이다
  10. 여담이지만 마지막까지 폴란드 망명 정부을 국가로 인정한 나라는 아일랜드,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가톨릭 쉴드 바티칸 시국 정도이다. 한가지 웃긴건 마지막으로 폴란드 망명 정부를 국가로 인정하던 바티칸 시국이 이를 철회한 게 1979년인데 이 시점이 폴란드인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에 즉위한 해였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