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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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년 이괄의 난 진압의 공으로 인조에게 하사받은 공신상. 눈병으로 인해 안대를 찬 모습이다.

張晩
1566년 ~ 1629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2 행적

장만은 인동(仁同) 장씨로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1566년(명종 21) 부 기정(麒禎)과 모 배천 조씨(趙氏) 사이의 셋째 아들로 통진(通津- 경기도 김포의 옛 지명)에서 태어났다

선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승문원·예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종전 후 1599년에는 봉산군수(鳳山郡使)가 되었다.

1622년 병조판서로 있을 당시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대책을 건의하였고 이로 인해 광해군의 분노를 사게 된 그는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낙향해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팔도 도원수(八道 都元帥)로 등용되어 당시 후금 때문에 흉흉했던 북방을 수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지방군과 패잔병들을 긁어 모아 열세인 상황에서도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이괄의 난은 이괄 vs 정충신 구도이고 장만은 삽질을 좀 많이 했다.

1627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났으나 적을 막지 못한 죄로 부여로 유배되었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무와 재략을 갖춘 무장이었으며 많은 부하를 통솔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저서로 《낙서집》(洛西集)낙서(落書) 아니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