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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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忠臣
1576 ~ 1636

1 개요

조선왕조의 무신(武臣)이자 관료. 본관은 금성, 자는 가행, 호는 만운이다.

조선왕조 500년에서 충무공 칭호를 받은 9인 중의 하나. 이름이 폭풍간지를 자랑하는데, 실제로 이름대로 충신이었고, 친분이 있었던 장수 이괄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신기한 인물. 말년에는 정묘호란을 겪고, 서인들에게 탄핵받아서 귀양을 가면서도 끝까지 친금정책을 주장하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탄핵받은 이후에도, 관례답게 금방 복권되어서 몇몇 한직을 떠돌았다. 하지만 친금정책은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병자호란 이전에 병사했다. 저서로는 시집, 스승 이항복과 함께 유배기록을 다룬 백사북천일록, 당대의 충신 최명길 등과의 군사대담을 싣은 만운집, 금남집이 있다.[1]

전형적인 야전참모 스타일. 국경지대에서 첩보와 외교 방면으로 뛰어났다. 광해군 시절 적극적으로 명-청을 오가며 각 세력의 동향을 꿰뚫어서 보고했다. 후금(청)와는 화친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본심으로는 방비해야함을 환기시키고 장수들을 살피며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광해군 시절부터 그가 없으니 업무가 중단될 정도로 유능했으며, 인조 시절에는 그를 조금만 더 중용했더라면 아쉬움을 표하는 사관들의 평가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일개 병사로 군생활을 시작했음에도, 권율이나 이항복 같은 大 위인들에게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으며, 보편적으로 존경을 받는 대표적인 지장이자 덕장이었다. 특히 장년기에 떨친 명성을 보면, 일반병에서 출세한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몇 가지 저서를 남겼음은 물론이고, 무술에도 능했으며 천문, 지리, 점술, 의술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다고 한다. 이 무슨 엄친아...

2 생애

2.1 임진왜란

나중에 떨치는 명성을 보면 믿을 수 없지만, 본래 신분상 미천한 계급이었다.친부 계통의 조상이 어땠든지 간에, 모계혈통 때문에 미천한 태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1. 아버지가 아전이라는 기록은 정충신 사후 작성된 행장(행장은 본래 다 있어 보이게 써준다)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아전이 고작이었다.
2. 기록 전체를 보자면 경우에 따라서는 정충신은 조부 대부터 대대로 병졸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3. 또 정충신이 국왕에게 권율의 보고서를 선조에게 바치고 면천되었으며, 이후 관직에 오른 과정도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일각에서는 광주부에 예속된 심부름꾼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전이라는 벼슬로 면천을 시켜주고, 다음 해 무과급제자 명단에 포함시켜 벼슬을 주었을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과거급제자는 조부의 이름까지는 당연히 기재하여야 하는데, 당장 조부의 이름조차 무엇인지 기록이 전혀 없는 상황이고, 뜬금없이 7대조 할아버지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록에서 정충신이 선조에게 장계를 전달하고, 그대로 이항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 아전 벼슬(?)을 주었을 가능성은 낮다. 이항복의 밑에 있었다는 것은 어쨌거나 중앙으로 진출했다는 얘기인데, 과연 지방 관리인 아전으로 만들었을까? 일단 인조실록 14년 정충신의 졸기에서는 출신이 아전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광주 아전'이었다.
4. 정충신이 권율 휘하였을 당시 그 신분에 대한 기록은 일반 병사에서 지인(知印)까지 다양하다. 후대 기록이라 좀 신빙성은 떨어진다.

1576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까지는 천민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17세 때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권율의 노복(奴僕) 역할을 맡아왔다. 일반병이었지만, 민첩하고 영리해서 권율에게 총애받았다.

발이 빨라서 평소에도 두려움없이 왜군들의 진영을 정찰을 했다고 한다. 흠좀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장계를 평안도 의주에 피신중인 선조에게 찾아가서 전했다. 참고로 정충신 말고는 아무도 자원하는 인물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연하지만 당시 광주에서 의주까지 가려면 충청도에서 평양까지 이르는 일본군 점령지를 혼자서 돌파해야 했다. 이때 어명에 따라 면천(免賤)이 내려져서 평민으로 승격되었고, 이후 권율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이수하고, 후에 무과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무관으로 임명되어 양반까지 신분이 승격되었다.

미천한 계급에서 역사적인 명장에게 사랑받는 심복이 되었다가, 전쟁 도중에 피신한 왕의 명령으로 신분이 상승되어서, 유명한 대학자의 제자로 들어가는 등, 뭔가 양판소 주인공의 설정으로 보이지만 이게 실제인물에 대한 기록이다. 당시 시점으로 봐도 워낙 소설 주인공 같았는지, 스승님들처럼 야담이나 설화도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았다.

2.2 광해군 시절

1602년 조선 사신 자격으로 명나라를 방문하였으며, 압록강 건너 여진족의 동태와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하였다가, 1608년 조산보만호직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다. 1618년 스승인 백사 이항복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입장을 밝히는데, 제자로서 같은 입장을 따르면서 스승을 따라서 유배를 떠나기도 하였다. 이때 이항복과의 유배기록 백사북천일록을 남긴다.

특히 이 무렵의 오성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중풍에 걸리면 웬만한 사람은 문병도 오지 않는다고[2] 할 만큼 치명적인 증상인데도, 유배지까지 따라와 스승을 간병했던 것. 오오 으리남 오오

1621년에는 만포첨사가되어 국경 수비를 맡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외교전문가로 활동했다.

까놓고 말해서, 광해군의 외교는 정부가 아니라, 정충신을 위시한 북방의 지식인 장교들이 진행했다. 현대 미디어에서의 과장과는 달리, 광해군 시대조차도 국운을 걸 정도로 외교에 열성이 있지는 않았다. 광해군 시대의 북인세력은 오랑캐와 싸우자며 헛소리를 하다가, 정작 사르후 전투에서 쳐발리자 우리탓이 아니라는 변명을 외교랍시고 진행하던 수준이었다.

위의 상황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외교활동으로 정력적인 모습을 보인 인물 중의 하나가 정충신이었다. 그는 최전방의 무관이면서도 상당한 지식인이었으며, 외교와 첩보에도 밝았기 때문에, 광해군 시절에는 명-청 세력의 동향을 조정에 알리는데 공헌했다. 정충신이 병환으로 드러눕자 외교일정 자체가 정지할 정도로 외교와 첩보를 아우르는 눈치싸움에서 유능한 인물이었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홍타이지를 '견제'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도 정충신이었다.[3] 조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인 홍타이지를 조선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바꿈과 동시에 은근히 후금의 권력다툼에서 홍타이지를 견제하도록 유도해볼 것과 후금 내의 정보를 긁어오라는 명을 받았고 정충신은 그것을 수행한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후 금방 인조반정으로 양아치들에게 수도를 털려서 손꼽히는 내치의 무능함으로 몰락해버린다.

결국, 인조가 집권하자 배금정책의 일환으로 국경을 오가는 빈도가 줄어들고 한직으로 밀려난다.[4] 광해군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정충신은 정부관료들을 대신하여 중요한 외교역할을 했고, 전쟁 외에도 외교(와 간첩질과 공작질에도)에 유능한 인재였다는 정도.

2.3 이괄의 난

인조반정 때도 묵묵히 최전방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이괄이랑 친하다는 이유로 조정으로부터 의심을 받는다. 당시 정충신의 입지는 참으로 위태로웠다. 조정에서는 반란자로 의심하는 상황이었고, 임지에 남아있으면 반란군 세력에게 포위당해서 죽임을 당하거나 포섭될 것이 자명했다. 결국, 정충신은 성을 버리고 탈출하여 도원수 장만에게로 가서 고발당했다.(...)

하지만 반란초기, 정충신은 황해도로 후퇴한 도원수의 명을 수행하여 평안도를 오가면서 군무를 돕거나, 청나라의 위협이 도사리는 평안도의 거점을 포섭하는 핵심임무를 맡았다. 결국 이괄이 움직이자 남이흥[5]과 함께 황주에서 맞섰으나 패배한다. 이괄은 평안도의 3만 군세 중에서도 1만 2천을 넘는 대병력을 거느렸지만, 정충신은 다른 임무를 맡았다가 싸운 것이었기에, 다른 파견임무를 맡았던 장수들에게 합류하여 싸웠다.[6]

이후에는, 병사들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이괄의 진격을 따라잡지 못했다. 하지만 반란군에서 낙오하거나 사로잡은 이들을 포섭하며, 이괄의 진격로를 수습을 하면서 추격을 계속한다. 이괄이 한양에 다다르자 "이괄이 인조를 좇으면 상책이오 한양에 남으면 하책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결국 이괄은 한양에 남았고, 정충신의 말대로 이괄은 몰락하기 시작한다.

마탄 전투가 끝나고 4일 후, 정충신은 남이흥과 함께 2천명의 병력으로 야밤에 숨어들어서 이괄군을 도발한다. 이에 낚인 반란군은 전 병력을 동원해서 안현에 세운 정충신의 진지를 공격하지만, 고춧가루와 함께 돌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한명련이 죽고, 이괄은 패했다!"라고 소리쳤던 남이흥의 기지 덕분에, 병사들이 탈주하면서 지휘권이 와해되고 한양을 점령한지 2일 만에 대패했다. 남이흥의 진지가 박살나는 와중에도, 정충신군의 진지는 굳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러모로 이 승리는 행주대첩과 비슷하게 분석되기도 한다.[7]

이후, 이괄이 도망치자 남이흥과 함께 궁지에 몰린 쥐는 잡으면 안 된다고 급구 말려서 이괄이 자멸하도록 내버려둔다. 애초에 2천명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1만을 몰아냈으니 좇을 방법도 없었다. 어쨌든 반역자인 이괄의 친우였음에도, 그를 제압한 공로로 조정에서도 인정받게 된다.

이괄의 난 1달 후 안주목사 정충신과 연안부사 남이흥을 인조는 불러들여 후금에 대해서 묻고, 정충신은 후금의 군사가 압도적으로 강력하다고 하며 야전에서는 후금의 기병에 상대가 안되니 성을 이용한 수비전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괄의 난에 의해 6,7000명이던 안주성의 수비병력도 2000명 밖에 남지 않았고, 3,4000명은 되어야 안주성을 지킬 군사력이 된다고 한다. 또 남이흥 역시 올해에는 남쪽에서 군사를 징발하지 않아[8] 군사가 터무니 없이 적다고 한다.

하지만 인조는 군사는 적은 것은 상관없고, 장수가 중요하다고 하며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뭔 소용이냐고 따지다가 후금의 군사력의 규모를 묻는데 정충신은 대략 9 만에 말도 명마로 1만 필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도 인조는 "누르하치는 하찮은 자에 불과한데 너희들은 수성전만 떠들고 나가서 싸울 생각은 안하냐? 한심한 놈들."이라고 대놓고 장수들을 면전에서 까고, 이에 정충신과 남이흥은 이렇게 답한다.

정충신 : 군사가 없는데 장수가 훌륭해도 누구와 싸우라고? 10 만의 군사를 뽑아서 1,2 년 훈련시키면 요동도 함락시키겠다.
남이흥 : 내가 무능한 놈이지만 군사 수만이 있으면 공을 세우겠다.

라는 뜻을 돌려서 말하기는 하지만 두 명장은 거의 인조의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고, 인조는 말 없이 주찬과 표피 등 물건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둘은 이후 찍혔다[9]

2.4 정묘호란과 최후

관직 재직 중에 와병(臥病) 신세를 지기도 하였으나, 1627년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이괄이 받은 바로 그 직책 정묘호란 때는 무난하게 수비를 했으나, 이괄이 입힌 피해를 복구하지 못해서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이괄이 입힌 피해는 복구되지 않았으며, 반역자로 몰린 인재들도 청군에 투항한 상황이었다. 결국 과거의 동료들을 상대로 또 한번 뒤처리를 담당했다고도 볼 수 있다. 여러모로 안습...

위안이 있다면, 이후의 병자호란에 비하면 조선군은 후방으로 물러났을 뿐, 이괄의 상처가 남은 상태에서도 상당수의 주력군을 보존했다는 거다. 또한, 물자도 넉넉하게 비축한 상황이었다. 죽기 전의 마지막 전쟁에서도 부원수로서 노력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충신과 같은 연배로서 함께 활약한 남이흥은 유명한 안주성에서 자폭을 보여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1633년 조선청나라와의 단교에 반대하였다가 충청도 당진으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물론 관례대로 금방 석방되어서 포도대장, 경상도병마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병세악화로 관직에서 은퇴하여 와병으로 드러누웠다가 그 해 5월 사망하였다. 인조나 서인들에게 정치적으로는 탐탁스런 인물이 아니었지만, 인조는 그럭저럭 대했으며 병을 돌봐주고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다.

3 기타

광주광역시 구도심의 주요도로인 금남로는 정충신의 군호 금남군에서 따온 것이다. 그 밖에도 청렴한 성격이나 지장으로서 명망이 높았다. 심지어야담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스승이었던 이항복, 권율 같은 걸물들처럼 탄생설화까지도 존재한다. 야담과 전설에서는 만주의 호족들의 추장들에게 식견을 설파하는 장면도 나온다. 생전에 안습한 일을 많이 겪었음을 생각해보면 그나마 위안거리일지도...

평생 힘들게 살면서도 지략과 충성심을 견지했던 존경할만한 인물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이괄의 인지도가 더 높다. 본 항목에도 아예 정권에 대한 충심만으로 존경받았다면서 정충신을 저평가하는 문단이 적혀있었을 정도. 그럼 말년에 서인들의 미움을 받거나 민중에게서도 존경받았을 리가 없잖아 애석하게도 전형적인 지장이자 참모 스타일이었기에, 현대사회에서는 대리만족성이 강한 마초 장수들을 우대하는 분위기에서 소외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안타깝게도 휘하에 있었던 임경업보다도 미묘한 인지도를 지닌 장수이다. 지나치게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이라서 밋밋해 보이지만, 그네들처럼 논란을 일으키면서 살았던 사람들보다는 충실한 위인이었다. 수정 전의 본 항목에서도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인물을 이괄, 임경업 같은 인물이랑 비교하면서 저평가한다는 것이 과연 역사의 교훈을 담는 관점인지는 의문이 많다.

정충신이 중용받았다면 인조시절 북방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북방에서 장수들의 이반을 포착하고 충언을 삼가지 않았다는 기록, 야전에서는 패배했으나 전략적으로는 옳은 말을 반복했던 것, 친금을 내세우면서도 방비해야한다는 그의 어록에는 북방군의 정훈을 바로 세우기에는 건강한 관점이 많았다.[10]

인조반정 이후 북방군이 쉽게 갈라섰던 이유로는, 정치적인 판단력이나 정훈 방면에서 뛰어난 장수들이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점을 꼽기도 한다. 하지만 청과 명, 서인들의 집권이라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정충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정충신의 활약은 조선이 입는 피해를 줄이는 것에서 그쳤다. 물론, 당시 조선이 갈기갈기 찢어졌을지도 모르는 두 차례의 위기 상황에서 피해를 줄였다는 점도 충분한 업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정충신에게 주어진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내린 평가이다.[11] 결과만능주의가 판치는 현대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평생 동안 전쟁터를 구르며 다방면으로 조국에 이바지했던 역경을 보면, 그는 이순신, 김시민처럼 유명한 장수들과는 다른 개성을 지닌 충무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러모로 말년에는 동료였던 인물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다가 죽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호걸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죽을 때까지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았다고 평할 수 있는 인물.

몇 가지 설화가 있는데 그 중에 일단 두 개만 소개한다.

하루는 정충신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항복의 사위가 장기를 하자고 졸라댄다. 이 사위는 양반이 아닌 정충신을 장인이 아끼는 걸 보고 질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기를 하면서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3번 둬서 지는 사람이 목 날아가는 걸로 하자"는 내기를 걸었다. 정충신이 거절하면 졸장부라고 놀릴 의도였는데, 정충신은 내기를 받아들였고, 장기에서 이겼다. 사위가 튀려고 하자 정충신이 잡아다 칼을 잡으며 말하길 "사나이가 말을 물려서는 안 되지만, 나는 이집에 신세를 지고 있으니 목을 치진 않겠소"라며 목 대신 상투를 잘랐다. 사위가 이를 이항복에게 고자질 하자 이항복은 정충신을 불러다가... "목을 자르기로 했으면 잘라야지 왜 안 잘랐냐!"며 호되게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저 녀석을 도원수 감이라고 생각해서 데려왔더니 부원수 감밖에 안 되는 군"라며 실망했다고. 실제 정충신은 부원수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다.[12]
사르후 전투에서 명과 조선군이 패하자 뒷수습을 위해 정충신이 사신행렬에 끼여 후금으로 갔다. 후금쪽 장수가 "조선은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정충신은 "대도(大盜)로 봅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후금 장수가 우릴 도적때로 보냐며 벌컥 화를 내자, 정충신은 "천하를 훔치려는 자들을 더러 대도라고 하지 뭐라고 하나?"고 하자 그제서야 기분이 좋았던지 후금 장수도 껄껄 웃었다. 정충신은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후금의 힘이 커지고 있으니 큰일이라며 한탄했는데, 이는 훗날 현실이 되었다.

4 작품 속의 모습

역사의 전환점에서 가장 아까운 능력자였건만 인지도는 안습이다. 당대 지식인들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핵심 권력층에게 견제를 받지 않았다면, 조선의 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으리라 평가받는다. 하지만 활약이 수수하다며 저평가하는 여론이 있을 정도로 안습하다. 외교적으로 화끈했으면 뭐할껀데? 인조의 재림? 이러니 역사가 반복되지.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을 보아온 세대 중에는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웹툰 오성X한음에서도 막바지에 젊은 시절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항복의 제자로 무척 똘망똘망하게 묘사되며 박진의 시신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서 빼내는 데 있어 재치있는 역할을 담당한다.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 이괄과 대척점인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괄이 작가의 애정버프를 받은 터라 상대적으로 조촐해보인다. 초창기 이괄이 반신처럼 묘사될 때는, 감히 이괄에게 대항한다며 욕하는 열성팬들이 상당이 많아서 빈축을 샀다. 이런 인물이 까이니 역사는 반복되는 법. 이괄 사망 이후에는, 동시대의 또라이들이 벌인 악행들의 뒷처리를 담당하는 불행한 삶이 그려질 것으로 보인다.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관군 측 인물로 등장하며, 실제 역사처럼 의롭고 근실한 인물이지만 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이순신에 맞서 근왕군을 이끌다가 정원군의 삽질로 선조가 여진족에게 살해된 후에 이순신에게 투항한다. 작품이 끝나는 시점까지 생존.
  1. 사학도 외에는 관심이 적겠지만, 정충신이 남긴 저서들은 가치가 높다. 백사북천일록은 그 유명한 이항복이 유배를 당해서 죽을 때까지 제자로서 함께 지내며 남긴 기록이다. 만운록은 같은 이항복의 제자이며, 문충공(文忠公) 시호를 받은 최명길과의 군사대담을 싣은 책이다. 당시 주화파들의 관점에서 조선군을 둘러싼 정세를 논의한 중요한 사료이다.
  2. 즉 , "당신은 이제 끝났다"는 의미이다. 중풍으로 떨어진 사람에게 같은 사람이 2번 찾아왔다면 덕을 많이 쌓았다는 방증이란 얘기도 있을 정도다.
  3. 광해군 13년 8월 28일.
  4. 이것이 인조가 광해군 대의 외교정책을 완전히 계승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부분 중 하나다. 사신 교환도 사라져서 후금에 접근할 수도 없고, 정보를 얻어낼 수도 없게 되었다.
  5. 충장공 남이흥. 정충신이 지장으로서 이름을 날렸다면, 남이흥은 노련하면서도 격정적인 베테랑이었다. 불꽃같은 남자 정묘호란 때 장렬한 자폭으로 유명한 바로 영웅이다. 정충신이 전략과 안목에서 뛰어났다면, 남이흥은 기개와 전술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참고로, 이괄까지 포함한 세 사람은 본래 친했다고 한다.
  6. 정충신-남이흥의 본래 임무는 도원수가 비우고 떠났던 평양성 재점령 및 수비였다. 이때 받은 병력은 1800명이었다. 반란초기에는 도원수 장만이 정충신에게 8000병력을 주겠다는 장계가 있는데, 당시에는 장만조차도 5천군사가 없었으니 미래의 계획을 논한 문장에 가깝다. 이때 말한 대병력은 나중에 마탄전투에서 휩쓸린다 관군이 너무 적지 않냐는 생각이 들수도 있는데, 이괄군이 징집한 반란부대를 빼면, 대다수의 북방병력은 일부러 제자리에 유지시켰다. 청나라가 쳐들어오면 끝장이므로
  7. 하지만 실제로는 이길 가망이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승자인 정충신 본인이 천운이었다고 언급한다. 그걸 알면서도 싸웠다는 점에서 배짱이 두둑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야밤에 기습적으로 한성부에 침입하여 언덕을 점령하자는 계책을 낸 것은 정충신이었고, 고춧가루를 준비했다가 역풍이 불 때 휘날리면서 기지를 부린 사람은 남이흥이었다.
  8. 광해군 10년대로부터 추정되는 시간, 당시에서 약 5, 6년간 남쪽에서 군사를 징발하던 것을 인조가 민심을 얻고자 멈춘 탓이다.
  9.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찍혔고, 남이흥은 군사훈련도 못해본 군사들로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폭사했다. 유언도 "군사훈련 한 번 못해본 것이 원통하다!"였으니...
  10. 정충신의 시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당대의 충신 최명길과의 군사적인 대담이 남아있다. 두 사람은 모두 현실주의적인 친금 중립노선의 전략을 주장했으며, 한창 청나라에게 칼을 갈던 인조정권에서는 청과 내통한다며 구박을 면치 못했다. 물론, 나중에는 척화파가 아닌 그들이 충신으로 재평가를 받아서 인조는 부끄러워했다.
  11. 단, 정충신은 최명길과 함께 죽는 날까지 인조정권에서 깊은 신뢰를 받지 못했다. 서인들은 정충신에게 이괄 토벌로 1등공신을 줘놓고도, 심심하면 이괄과의 친분을 물고 늘어지며 그를 한직에 잡아놓았다. 제2의 이괄을 막는다는 명분은 있지만...
  12. 이는 사실과 다른 야사인데, 정충신은 애초부터 출신계급이 낮고 군인생활을 해서 최명길과 장만 정도를 제외하면 서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이처럼 붕당적인 색채가 적은 점은 그 출신태생과 함께 높은 지위에 올라가지 못한 족쇄로서 작용하고 말았다. 태어날 때의 혈연이 부족하지만 않았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