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1801년 발생한 대규모 천주교 박해. 조선왕조의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대대적 박해이다. 순조 즉위와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을 계기로, 그녀를 중심으로 한 노론 강경세력이 박해를 주도하였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으니, 정조 재위시기 유력하게 성장한 남인계 인사들을 찍어 내려는 것. 박해의 결과 중국인 주문모[1] 야고보 신부를 포함한 300여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남인 세력은 치명상을 입었다.
2 배경
2.1 조선인, 스스로 가톨릭을 받아들이다
자세한 것은 가톨릭/대한민국 항목을 참조.
조선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은, 중국에 정착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의도치 않은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자연과학에 매우 박식했다. 자연과학 자체의 중요성을 인식한 황제는 강희제나 대포에 맞은 직후의 누르하치 정도였겠지만, 어쨌거나 달력은 제왕의 초월적 위엄을 나타내는 중요한 징표였다. 선교사들은 천체운동에 대한 정확한 예측으로 황제의 호의를 샀으며, 덕분에 북경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본업인 중국 선교활동에도 힘써, 한문으로 성경과 교리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이것들이 외교 사절로 북경과 서울을 오가는 조선인들의 눈에 뜨이게 된다. 이들은 중국인은 아니었지만 한문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천주교를 어떤 학문의 하나로 인식하였으며, 선교사들이 중국에 소개한 다른 '과학적인 것'들과 함께 별 거부감 없이 천주교 서적을 조선으로 들여오게 된다.
여담으로 동시대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 선교사들에 대한 박지원의 은근한 관심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과학기술과는 달리 천주교에는 상세한 의견을 밝히지 않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할 문제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겠다. 그에게는 딱 문제가 될 만한 선에서 대충 뭉개며 넘어가는 탁월한 감각이 있었다. 뭔가 불온하기는 한데 꼭 집어 말하기는 불가능하니, 오직 기발함만에 술렁일 수밖에. 정조도 트집을 잡을 것은 결국 문체밖에 없었던 것이다(문체반정 참조).[2] 티베트 불교를 개소리로 매도하고 달라이 라마를 사기꾼 취급하며 미친 듯이 까던 걸 보면, 어쩌면 박지원은 내심 천주교에 호의를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지만 불교 깐다고 천주교에 호의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도 면천군 군수 시절 잡아들인 천주교도에 대해 크게 해꼬지를 하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다만 말과 이론으로써 천주교도들의 논박을 뭉개버리는 등 글을 통해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3]
북경으로부터 들여 온 천주학 서적(대표적으로 천주실의)을 접하고, 조선인들은 이를 연구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대체로 천주교를 불교의 아종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교산 허균. 천주학 서적을 들여온 장본인이자 비록 이단아라 불렸음에도, 그는 천주교를 '천당과 지옥으로 어리석은 대중에게 겁을 준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남인계의 거목이었던 이익은 <천주실의발>이란 논문에서 천주교에 대해 조목조목 비평하는데, 그가 보기에 천주교는 합리성을 결여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익의 이 상세한 비판은, 도리어 천주교의 중심 교리가 조선 사상계에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임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익의 소망과는 다르게 흘러갔으니 얄궂은 일. 1779년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철신, 이총억 등이 경기도 광주시의 천진암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토의하는 모임을 갖는다.[4] 이들은 남인계 학자들로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천주교는 이 청년들에게 진리로서 다가오게 된다.
남인들은 정계에서 상대적으로 불우한 상태였고, 그들의 원리주의적 성향에 비추어 천주교의 교리는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서방에서 플라톤주의가 어떻게 요한 복음서로 변하였는지를 곱씹어본다면 흥미로운 대목. 천진암의 멤버들 중 하나인 이승훈이 1784년 베이징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세례명은 베드로) 공식 신자가 된다.
2.2 교황청, 제사를 금하다
본래 예수회는 제사를 종교행사가 아닌, 조상에게 차리는 단순한 예에 불과한 것으로 결론내렸다. 동아시아에서 원리원칙대로 제사를 못 지내게 하면 애초에 선교가 안 되니, 어물쩡 넘어간 셈이다. 하지만 이는 곧 반론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는 교리논쟁인 동시에 수도회들 사이의 권력다툼이기도 했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예수회를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교황청의 명령으로 제사는 금지된다.
이로 인해 예수회의 중국 선교는 치명타를 입는다. 그리고 이 소식은 1790년 조선에도 전해지는데, 막 정착하던 천주교 공동체에 파란을 흩뿌리게 된다. 제사는 유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아니 기원 전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하고 유교에 의해 정립된 제례의식으로 하나의 문화이며 윤리적 상식이었다. 조상을 기리는 일은 사실 서양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다, 조상을 기리는 일=제사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심어진 조선인들이 쉽게 내던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선에서 제사를 내버린다는 말은 불효, 즉 천륜을 내버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몇몇 인사들은 이 문제로 자신은 일찌감치 천주교에서 돌아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다수 천주교인들의 선택은 타협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과감한 선택을 하는 자도 나오기 마련이다.
2.3 신해박해(진산 사건)
윤지충 바오로는 전라도의 가난한 양반으로, 1791년 어머니의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렀다. 그리고 신주를 불태웠는데, 이는 "나는 이제부터 제사 안 지냄 뿌우" 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도 안 지내기도 했고. 윤지충은 이 모든 일들을 슬그머니 벌인 것이 아니라 고종 사촌인 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대놓고 자행했으며, 충격과 공포에 빠진 친척들과 키배를 벌였다. 결국 이 소동은 나라 전체에 소문이 퍼졌고, 조정은 발칵 뒤집히게 된다.
조사 결과 윤지충의 소문은 모두 사실이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신주를 불태운 것이 윤지충 하나만은 아니었으니… 끌려온 윤지충은 어떻게 변명하지도 않고 "하느님께 죄를 짓느니 사대부에게 죄를 짓는 것이 낫다. 위패 따위야 뭔 나무토막 하나 갖고 오바 쩌네요"라고 일갈. 위패가 나무토막이란 건 딴엔 맞는 말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 위패가 조상님을 의미한다는거지. 사대부에게 죄를 짓는게 아니라 조상에게 죄를 짓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조정을 충공깽으로 만든 다음에 결국 권상연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여담으로 이들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순교한 자리에는 현재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들어서 있다.
당연히 사대부로 이루어져 있는 조정이 당파를 막론하고 천주교가 반체제라며 극딜을 퍼부은 건 당연지사. 벽파는 말할 것도 없고 시파, 남인들조차도 맹비난을 퍼부었다. 아니, 국가체제의 존재의의가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나왔던 조선에서 "제사가 별건가"라고 말하는 윤지충은 대역죄 확정. 참수형도 어떻게 생각하면 제법 관대한 처사이다.[5]
여기서 정조는 일을 대충 덮는다.
1. 윤지충은 죽일 놈이니까 죽였다.
2. 신주를 불태웠다는 딴 놈들은, 가난해서 제사를 못 지낼 형편이라 그랬단다. 불쌍하지? 얘네들은 봐 줌.
3. 그러니까 이것으로 끝내자.
남인 몇을 불러 "얘들아, 천주교는 불경스러우니까 앞으로 멀리해라, 알았지?"라고 타이르고 덮어버렸다. 벽파 세력이 불만을 가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상식적으로 가난해서 제사를 못 지냈다고 하더라도 신주를 불태울 것까진 없으니까. 아니나다를까, 얼마 지나 제사를 폐한 천주교 신자가 또 나타난다. 지방관의 보고로 중앙정계에 알려진 이 건에 대해 정조는, '내가 끝내자고 했지? 너 지금 나한테 불만 있냐? 개기냐?'라는 격한 반응을 보인다. 정조는 자신의 더러운 성깔을 유감없이 발휘해 보고자를 열렬히 디스했으며, 이 관리는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귀양길을 가던 중 병사… 사실 관리 입장에선 보고를 안 하기도 뭐한 게, 나중에 천주교인들을 일부러 봐 줬다는 혐의를 벗기가 어렵기 때문.
이 해프닝죽은 관리만 억울하다은 천주교 관련 문제를 대충 묻겠다는 정조의 의지의 표현이었고박지원이랑 똑같네 뭐, 강경파 쪽에서는 이런 처사에 이만 갈게 된다. "정학(正學)을 바로 펴면 사학(邪學)은 절로 없어진다"는 것이 정조의 논리였고, 정조는 문체와 서체를 가만두지 않고 문체반정과 서체반정을 일으킨다.
사실 정조의 방침은 에도 막부의 후미에(십자가 밟기)처럼 천주교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이긴 했다. 바로 배교라는 절차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짓 증언이라도 배교한다고 뱉는 순간 10년 공부(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신앙)가 녹아버린 얼음처럼 되는 것", "말만 해라. 그럼 살려 드릴께.”라는 논지. 물론 신자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이었고, 이런 관대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향후 수십년간 순교자는 늘어만 갔다. 당대 유교사회에서 이런 (가문의 운명까지 포함 된) 집단자살(!)로 볼만한 “서학쟁이”, “천좍쟁이”들의 순교가 얼마나 컬쳐쇼크였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2.4 폭풍전야
정조 치세에 박해가 아주 없었다는 건 아니다. 윤지충 바오로 사건 외에도 1785년 명례방[6]에서 모인 이벽 세례자 요한, 이승훈 베드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전, 정약용, 이총억 등 양반 자제들이 모여 신앙집회를 열었는데 우연히 형조의 관리들에게 들킨 적이 있다. 장소를 제공해 준 역관 김범우[7] 토마스가 모든 책임을 지고 혹한 고초 끝에 단양으로 유배 중 사망했고, 이벽 등은 양반가의 자제라는 점이 적용되어 가볍게 훈방 조치만 당했다.
정조 입장에서야 천주교는 뭐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의지가 미치지 않는 종교문제로 정국이 요동치는 것을 싫어했을 뿐. 중앙정치와 상관없는 동네에서 천주교를 털든지 말든지 정조가 알 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정조의 천주교에 대한 입장은 "정학인 성리학이 바로 세워진다면 저절로 사라질 사(邪)"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천주교 공동체는 정조의 죽음까지 그럭저럭 평화로웠다. 하지만 이런 평화는 말 그대로 문제를 대충 묻은 것에 불과했다. 남인은 정계에서 소수당파인 데다 유교적 명분도 부족했다. 여전히 비천주교인이 대부분이었을 남인 세력의 딜레마가 여기서 드러난다.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좋게 말해도 들을 리가 없고, 드러내놓고 천주교를 공격하면 상대 당파의 먹잇감이 되는 셈이었으니까. 어쩌면 성호 이익의 천주교 극딜은 이런 사태들을 조금은 예견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1795년 북경에서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으로 파견한다. 당시까지 조선은 자체적으로 가성직을 두어 성무와 강론을 처리했다.[8]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교리서를 집필해 쓰기도 했는데, 나중에 주문모 신부는 이 <주교요지>를 보고 호평했다고. 신부의 입국은 조선 신자들에게 한 줄기 빛… 이 되는 듯했으나, 정부에서 이것까지 고이 두고 볼 일은 없어 주문모 신부는 도피생활을 계속했다.
3 전개
3.1 수렴청정
1800년, 몸이 좋지 않아 골골대던 정조가 승하, 순조가 즉위한다. 나이가 어렸던 왕을 대리해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선다. 원래 벽파였던 정순왕후 김씨는 파벌 내 강경세력과 연합하여 시파-남인 세력을 선제공격하기로 결심한다. 마침 좋은 먹잇감이 있었으니 천주교 신자 남인들이었다.
3.2 노 파더, 노 로드
탄압은 이듬해 개시되었다. 애초에 정치공작으로 시작한 터라 타겟은 분명했다. 천주교 신자로 유명했던 남인 인사들을 잡들이하는 게 의도였고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원래 혐의가 있던 최필공 토마스를 잡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그 종제가 또 축일에 사람들과 의식을 치르다 적발되어서[9]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앞서 말했듯 천주교는 윤지충 바오로 사건을 거치며 반체제세력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영 불리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인의 핵심 인사였던 채제공[10]도 2년 전 사망한 상태라, 정순왕후 김씨를 제어할 뚜렷한 정치적 구심점도 없었던 모양. 단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남인들마저 서로 물어뜯기 바빴다.
이 시점에서 신나게 털리던 천주교 신자들에게 참으로 재수없는 사건이 터졌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압박이 심해지자 땔감으로 위장해 천주교 서적들과 성물(聖物)들을 숨기려 했는데, 이것이 또 하필이면 불법 도살을 단속하는 인원들에게 적발되었다. 경찰국가 조선의 위엄 이 책에 정약종이 쓴 낙서가 있었으니, 바로 무부무군(無父無君, 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없다).
대체 이 낙서를 정약종이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는 불분명하나,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가 곧 무부무군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즉 천주교도들은 부모도 나랏님도 없는 패륜종교를 믿는 셈. 윤지충 바오로의 사례에 덧씌워 확신하기에 더없이 좋은 껀수가 나타난 것이다. 사실 천주교도 부모를 공경하는 종교이고, 천주교인들은 "그거 오해입니다!! 자!! 우리의 말을 좀 들어 보세요!!"를 외치며 반박했지만, 본디 남인 공격이 목적인데다가, 때마침 나온 저 충격적인 낙서는 오해고 뭐고 천주교인들을 제거하기엔 충분한 명분이었다.
이 낙서가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라 오히려 소문이 늦게 퍼졌다고 한다. '무부무군'이라는 4글자를 사람들이 감히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흉흉한 글귀' 따위로 돌려말하기를 시전했기 때문이라고.
3.3 순교
초기 천주교의 주요 인사들이 이 박해로 인해 순교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목이 잘린 상태에서 일어나 성호를 그은 후 다시 쓰러졌다고. 흠좀무. 그의 두 형제, 정약전과 정약용은 아직 젊은 덕택에 고문을 버텨냈으며, 배교를 약속한 다음 귀양길에 오른다. 이가환과 권철신 암브로시오 등은 자신들이 천주교를 버렸다고 이미 주장했지만 매를 피할 수가 없었으며 결국 사망. 이는 이승훈 베드로도 비슷하여서, 자신이 천주교의 수괴로 여겨지는 걸 잘 알았기에(즉 어떻든 죽을 팔자였기에)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강완숙 골롬바는 여성 평신도들의 지도자로, 주문모 신부의 도피를 도왔기에 처형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도피하려 황해도에 피신해 있었다고 하나, 3월 중순 서울에서 자수한다. 주 신부가 말하기를,
"나 역시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받드는 사람으로, 지금 소문을 들으니 조정에서 천주교를 엄중히 금하여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다고 하여,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기에 스스로 와서 죽기를 구하는 것이오."
게다가 주 신부는 중국인이었으므로 그 점을 열심히 주장했다면, 설령 잡히더라도 추방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신도들을 더 가엾게 여겨 순교를 자처했으니, 이는 분명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초기 사제의 이런 빛나는 아름다움은 오페르트 도굴사건과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11] 그리고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따위의 흑역사들을 거쳐서야만 온전히 드러난다.
위 사람들을 포함하여 약 50명 가량이 순교했다.
- 2월 26일(음) 정약종, 홍낙민,[12] 최창현, 홍교만(洪敎萬), 최필공, 이승훈 6명이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이 옥사
- 2월 28일(음) 이존창(李存昌)참수, 3월 13일(음) 원경도(元景道), 임희영(李喜永), 최창주(崔昌周), 이중배(李中培), 정종호(鄭宗浩) 5명 순교, 같은 무렵에 양근에서 10여명이 순교, 4월 2일(음)정약종의 아들 철상(哲祥)과 최필공의 사촌인 필제(必悌)와 중인 정인혁(鄭仁赫), 여교우인 윤운혜(尹雲惠)와 정복혜(鄭福惠), 이합규 6명 참수
주문모 신부의 자수는 좋은 뜻과는 달리 순교자의 숫자를 +20명 하는 효과를 낳았다. 주문모 신부를 참수하는 와중에 주문모 신부의 도피를 도운 사람을 안 죽일 수 없는 상황이 되다보니. 배교자를 막겠다는 것이 본래의 뜻이었다면 그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겠지만.
주문모 신부의 자수의 여파로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의 처 송씨와 그 아들 상계군의 처 신씨도 함께 사사된다. 그리고 이에 연계되어 은언군과 홍낙임이 사사된다. 주문모 신부가 왕족과 궁녀(문영인 비비안나 등)에게도 선교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은언군의 부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문모 신부한테 직접 세례받은 사실까지 들통이 났다. 이 외에 김상헌의 봉사손인 김건순도 신자인 것으로 밝혀져 유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순왕후와 벽파 유학자들의 "사학"에 대한 단호한 대처와 당시 교황청의 보수성, 천주교도들을 둘러싼 몇몇 불운들이 낳은 일대 참사였다. 그래도 정순왕후가 편벽하고 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서,[13] 여기까지는 적당히 죽이고 쫓아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나 싶었다. 그런데, 곧이어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초대형 병크가 터지게 된다.
3.4 대박사건, 황사영 백서
천주교인인 황사영 알렉시오는 어린 시절 수재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후 어째서인지 과거를 보지 않았다. 야사에 따르면 당시 정조가 손을 잡고 격려까지 할 정도였으며, 황사영은 정조가 잡은 손을 붉은 천으로 둘러 싸매고 다녔다고. 위인전 특유의 부풀린 이야기일 듯. 근데 황사영은 위인이 아니잖아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제천의 한 동굴에 피신해 있었다. 친족과 친구들이 모두 당하고, 도피생활에도 지친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비단에 전갈을 적어 북경에 보내려 하였다. 이 편지에서 그는 조선에서 벌어진 이례적인 박해를 설명하고,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가능한 모든 도움을 청하려 하였다. 문제는 도움의 내용이다.
1. 조선 교인들에 대한 물질적 구제.
2. 청나라의 황제에게 청원하여 조선의 천주교를 합법화.
3. 2가 통하지 않을 경우 청나라에 의한 조선의 속국화.[14]
4. 3이 통하지 않을 경우 서양 군대에 의한 조선점령.
자세한 내용은 황사영 백서 사건을 참조. 안습하게도 황사영의 요청 중 실현가능성이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청나라에서도 천주교를 금지하고 있었고, 이딴 걸 보호하겠다고 조선을 공격한다는 건 어림 반푼어치 없는 소리였다. 서양의 가톨릭 국가들은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파란으로 말미암아, 지구 반대편에 신경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황사영은 서양 군대의 강력함을 들어 알고 있었으며, 특히 전투함이 거대하고 아름다우며 조선의 전력으로는 상대하지 못할 것임을 지적한다. 황사영이 서양에 최종적으로 요청한 이게 큰 대(大)에 배 박(舶)자를 써서 대박인데… 이는 전혀 다른 의미로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편지가 국경을 넘지도 못하고 걸려버린 것.
원래 노론에도 친정조 온건세력인 시파가 존재하였고, 왕의 장인인 김조순도 이에 속했다. 이들은 정순왕후 김씨의 박해를 방관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핑계삼아 남인 및 시파 계열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한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남인을 모조리 처벌하라는 몇몇 신하들의 요구를 7달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벽파들조차도 기존의 정조식 처리(일종의 후미에)를 고수하여 일반 신자들은 굳이 죽겠다는 사람만 두들겨 패고 나머지는 거의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앞서의 "무부무군"과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가를 전복하려는 극렬 반체제세력임이 증명되어 버린 셈이다.
이를 계기로, 남인에 대한 대대적 숙청사약 크리가 터지게 된다. 사실 황사영 백서의 주장은 궁지에 몰린 개인이 마지못해 적어 낸 공상적인 내용들로, 그것이 천주교인들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다. 허나 그런 거 알 거 없이 조선의 천주교 대책은 탄압으로만 흐르게 되었다.
이는 정순왕후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므로, 나름대로 일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정약전(정약용의 둘째 형) → 정약종(정약용의 셋째 형) → 황사영(정약용의 맏형의 딸과 혼인) 순으로 포교가 진행되었기에 당시 이미 귀양간 상태였던 정약용, 정약전 형제를 비롯한 남인의 핵심인물들을 다시 국문해 처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미 분 놈들은 빨리 사형시키고, 복음의 근원만악의 근원인 정약전을 포항에서 절해고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남도 땅끝으로 귀양지를 재배치해 사건의 확대를 막았다.[15]
신유박해에서 '배교한 것 같은데 죽은 사람'과 '배교 안 한 것 같은데 산 사람'이 생기게 된 것은 신자를 많이 불 것 같은 사람을 일찌감치 죽인 정순왕후의 대처 탓이 크고, 사회지도층이 아닌 일반 백성들까지 많이 죽은 것은 눈치 없이 가톨릭 신자가 맞다고 순순하게 말하지 않으면 살려준 정순왕후의 깊은(?) 뜻에 기인한 바가 크다.
신자라고 증언해 줄 사람이 이미 죽어 이후에 잡힌 사람은 본인이 가톨릭 신자라고 본인이 자백하기 전에는 증거불충분으로 잡혀가 죽는 일은 드물게 되었다. 실제 전북 충남 일대 교인 200명이 밝혀지는 초대형 벙크가 터트리자 소외(?) 신앙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유항검, 유관검 일가를 모조리 참형하고, 교인 200여명에게 앞으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대부분 풀어주는 일도 있었다. 정약용도 신앙을 버렸다고 말하니 반박할 증거가 없어 목숨을 건지게 되고, 심지어 신앙을 유지한 것이 어느 정도 확실시 되는 정약전도 본인이 대놓고 신자라는 증거를 내놓지 않으니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16] 그래도 다달이 10명씩 처벌한 것이 쌓여 결국 사약, 능지처참, 참형 100명, 유배 및 삭탈관직 300명의 대형참사가 벌어지게 되자, 결국 정순왕후는 12월 22일 토사교문(討邪敎文)을 반포하였다.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는 속히 집행하고, 미결 사학죄인에 대한 신문도 세전(歲前. 한 해가 끝나기 전)에 끝내며 더 이상의 수사는 하지 말라는 지시까지 내리게 된다. 이 교문 반포가 참 절묘한게, 신속한 사형 집행을 명함으로서 더 이상의 사건 확대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고, 애매한 반포 시점으로 인해 추가적인 조사도 곤란하여 더 이상의 수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즉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도록 하는 정순왕후의 의도가 담긴 것.
4 결과
100명 이상이 순교. 주로 남인계의 양반계급이 대상이었고 이로서 남인은 대몰락. 이후의 천주교는 중인 계층과 일반 민중들이 앞서 주도하게 된다. 물론 신유박해에서도 일반인 순교자는 꽤 있었지만 말이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종교탄압으로, 황사영은 자신이 최악의 상황에서 백서를 쓰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몇 단계 뛰어넘는 엄청난 학살이 일어났으니, 병인박해 항목 참조.
기존 유학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불신은 이로써 확고해졌다. 서양에 대한 반발감이 생긴 건 덤. "서양 = 천주교 = 노 파더 = 노 로드 = 국가부정 = 반역"이라는 레퍼토리는 이후 척화세력에게까지 이어졌다.
정순왕후 김씨는 순조가 16세에 이를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며 정국을 지배했고 수렴을 거두고도 조정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는지 스스로 수렴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녀가 수렴을 거두기가 무섭게 시파에서는 "벽파들이 국혼을 방해하고 안동김씨들을 모함했다!!"고 맹렬히 공격했고, 정순왕후는 벽파에 대한 공격에 자신에 대한 은근한 공격으로까지 확대되자 다시 수렴을 치려다가 소론 이시수의 논리적인 반발에 주저앉고 만다. 그리고 순원왕후를 들이는 것을 자신이 지지했다고 해명하는 글을 남긴 다음에 불과 몇달 후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2년만에 벽파는 이안묵,권유, 김달순 등의 자폭으로 사실상 싹쓸이를 당해 최후의 정치적 당파인 벽파가 사라지게 된다. 시파는 특정 정치적 의리를 띄고 있지 않으니 무색무취했고 결과적으로 조정의 권력은 김조순에게 넘어갔다. 김조순은 막후 정치로 만족했으되 그가 죽은 이후 안동 김씨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조선은 세도정치의 어두운 길로 접어들게 된다.
신유박해 이래 조선은 탄압으로, 천주교도들은 순교로 대응하는 전통(?)이 생겨났으며,[17] 이는 이후 기해박해, 병오박해(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병인박해 등 60년에 이어지는 대규모 박해로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이 되었던 교황청의 제사 금지는 1939년 없어진다.
그리고 드디어 2014년 윤지충 등 신유박해 순교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참고.[18]
5 트리비아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황사영에 대해 "자업자득"이라고 비평
너나 잘하세요하였다.
- 정약용은 적극적으로 수사에 협력한 끝에 덜 맞고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으로 유배되는 행운(?)을 누렸다. (정순왕후는 그를 끝까지 살리려고 했다.) 그가 정말 배교했는지는 말했듯 논란이 있는데, 정약용 문서 참고. 한편 정약종과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귀양지인 흑산도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어패류에 대해 쓴 책이 자산어보.
- 조선 시대에 참형을 집행할때는 수형자의 윗옷을 벗기는게 관례였다. 이는 옷깃 때문에 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회자수가 수형자의 목을 제대로 내려치지 못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함으로, 수형자가 남자든 여자든 구분을 하지 않고 집행했다. 다만 신유박해 때 순교한 강완숙 골룸바는 이를 거부하며 윗옷을 입은 상태에서 형을 받았고, 반대로 비슷한 시기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19]의 경우에는 스스로 윗옷을 벗고 형을 받았다. 간혹 강완숙 골룸바를 다룬 책자에서 여성에 대한 참형이 없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조선 시대의 형법에서 여자라고 사형집행에 예외가 전혀 없고 거열형 같은 극형을 당하는 사례도 굉장히 많이 존재한다.
- ↑ 한국 가톨릭에서 활동한 최초의 성직자.
- ↑ 정조는 불도나 노도는 중국에서 굳이 박해한 적이 없다며
삼무일종법난은?“불교의 별파”인 서학도 정학이 바로서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 ↑ 기실 박지원 입장에서는 딱히 천주교에 호의적일 이유가 없는 게, 이 사람은 어쨌든 노론 계열인 데다, 당대 기준으로는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절대자의 개념을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면 부정적이었지 호의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 그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기이하면서도 이치에 닿는 서구의 문명 자체였지, 천주교 교리가 아니었다.
- ↑ 천진암 모임 당시 이총억은 약관 14세였다.
- ↑ 사형 참조. 조선에서는 능지처참-참수형-교수형의 순으로 관대한 것으로 보았다. 사약은 왕이 특별히 내리는 자비에 가까움.
- ↑ 현재 명동. 이 자리에 훗날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인 명동성당이 세워진다.
- ↑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순교자.
- ↑ 이게 사실 독성죄가 되긴 했다만... 하도 예외적인 사례이니.
- ↑ 어이없게도 도박판을 단속하는 관원들에게 걸렸다고.
- ↑ 차마 정조를 깔 수 없었던 벽파는 그를 '공작정치의 달인'이라며 천하의 개쌍놈 취급하기도 했다.
-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 ↑ 홍봉한의 아들이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이고 정조의 외할아버지인데, 임오화변을 주도하였던 사람이다. 홍봉한 등은 정조의 은전을 받았으나, 되려 이 은전 때문에 김귀주 등 친정이 풍비박산 난 정순왕후로서는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 ↑ 노론 음모론자들의 망상과는 달리 다른 정책에서도 정순왕후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어느 정도 유연하게 대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신유박해 직전에 벽파가 정적들을 탄핵했는데 이에 대한 처벌수위는 높아봐야 절도유배였고 그 이후에도 이인과 홍낙임 사사 외에 신유박해 관련으로 죽인 이들은 없는편이다.
- ↑ 원나라처럼 조선 왕을 사위로 삼아주던가, 아예 조선 왕을 폐하고 청나라 친왕을 한 사람 보내 조선 왕 자리에 앉혀달라고 했다!
- ↑ 더불어 이승훈 → 정약종 → 황사영으로 위 순서를 바꾸어 이승훈이 다 뒤집어 쓰게 된다.
- ↑ 심지어 이승훈은 정약용(정약전)의 친누이와 혼인한 매형, 황사영은 정약용과 정약전의 조카사위였음에도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살아 남았다. 이승훈과 정약종은 증거가 워낙에 확실해서 둘만 죽었을 뿐, 막상 사위를 잘못 둔 정약현(황사영의 장인)은 유배조차도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제가 될 거라 생각했는지 정순왕후는 뜬금없이 정약용을 세자의 약처방에 참여
세자가 나으면 대역죄는 아니라는 증거가 되니하게 하여 이들이 대역죄로 처벌받는 것을 막았다. - ↑ 다만 이는 한국 천주교의 특별한 문화는 아니고, 제국주의 시대 천주교 선교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유행(?)이었다. 주경철 저, <대항해시대>에서 제국주의 시대를 설명하면서 이를 다루고 있다.
- ↑ 이는 다른 박해들보다 늦게 이뤄진 것이며, 이들도 절차를 거쳐 시성될 것으로 여겨진다.
- ↑ 유중철 요한의 아내.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는 동정(童貞) 부부였다. 천주교 박해가 엄혹했으며 엄격한 유교 사회였던 당시 조선에서는 독신 성직자ㆍ수도자로 살아갈 길이 없어서, 유중철과 이순이는 겉으로는 결혼은 하였으되 동정을 지키면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