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국왕 | ||||||
24대 헌종 이환 | ← | 25대 철종 이변 | → | 26대 고종 이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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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철종(哲宗) | |
시호 | 조 선 |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 (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1] |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 (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2] | ||
청 | ||
본관 | 전주(全州) | |
능묘 | 예릉(睿陵) | |
휘 | 이원범(李元範) / 이변(李𣅹) | |
자 | 도승(道升) | |
호 | 대용재(大勇齋) | |
출생지 |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사저(私第) | |
사망장소 |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 | |
배우자 |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 |
양아버지 | 조선 순조 | |
양어머니 | 순원왕후 김씨 | |
아버지 | 전계대원군 이광(李㼅) | |
어머니 | 용성부대부인 염씨(龍城府大夫人 廉氏) | |
생몰 기간 | 음력 | 1831년 6월 17일 ~ 1863년 12월 8일 |
양력 | 1831년 7월 25일 ~ 1864년 1월 16일. (32년 5개월 22일, 1만 1863일.) | |
재위 기간 | 음력 | 1849년 6월 9일 ~ 1863년 12월 8일 |
양력 | 1849년 7월 28일 ~ 1864년 1월 16일. (14년 5개월 19일, 5285일.) |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 |||||||||
태조 고황제 | 진종 소황제 | 장조 의황제 | 정조 선황제 | 순조 숙황제 | 문조 익황제 | 헌종 성황제 | 철종 장황제 |
목차
1 개요
哲宗
조선 25대 국왕으로, 국왕이 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별명은 강화도령.
2 강화 도령의 안습한 가족사
철종 이원범은 이광의 3남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 1831년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에서 태어났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후손인데 사도세자는 정조 말고도 서자가 몇명 있었고 그 중 한명이 은언군으로 이원범의 할아버지가 된다. 은언군은 여러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5남이 이원범의 아버지 이광.
정조 10년(1786년), 은언군은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아버지 이광을 비롯한 은언군 일가는 교동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거기서 40년을 넘게 살다가 1830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에서 지내는 중 1831년 셋째 아들 이원범이 태어난다.
결국 철종은 조선 숙종부터 시작해서 첩의 아들인 영조, 역시 첩의 아들인 사도세자, 첩의 아들인 은언군, 그 서자인 전계대원군의 둘째 정실의 아들이 된다. 그야말로 방계 중 방계의 혈통이다. 자신은 물론 아버지와 형의 군호도 없었고. 자신의 군호인 덕완군(德完君)은 궁궐에 들어와서 즉위 전날에 얻었다. (아버지나 큰형의 군호는 자기가 왕이 된후 올렸다.)
그래도 이원범은 어린시절에는 그의 형들과 함께 조선 왕가의 몇 안되는 남자 왕족으로 그럭저럭 살았다. 두 형들과 달리(1830년 아버지 이광이 귀향에서 풀려났을때 두형 이원경 (4살) 이경응 (3살)이었으니 뭐...별차이는 없다) 아버지 이광이 귀양에서 풀린뒤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돌아가신일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때인 1844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 형 이명(李明, 혹은 이원경(元慶), 후에 회평군으로 추숭)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다시 기구한 운명이 된다. 큰 형 이명은 처형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 형 이경응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 되었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형과 함께 19살때까지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원범은 강화도에서 왕족이 아닌 평범한 백성으로 생을 마칠 뻔했다.
하지만 일약 인생역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3 일자무식의 왕?
강화도에서 엉겁결에 왕이 되었다는 사실과 빈농으로서 산 전력 때문인지, 강화도에서 자란 까막눈 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엄연히 출생지는 수도 한성이며, 유배당한 것은 14세가 되었을 때의 일(1844년). 1849년에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로 강화도에서 산 기간은 5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4세에 천자문을 이미 배웠으며(다만 행장에 기록된 말이라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천자문을 다 깨친것 자체는 사실이다.), 즉위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근년에 통감 두권과 소학1,2권을 읽었다고 철종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바 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아예 일자무식은 아니었고 일반 사대부 자녀들의 초급교육정도는 받았다. 다만, 소학이나 통감 모두 어렸을 때 읽었다가 관둬서인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뗐다고 한다.
- 실제로 조선시대 왕족 종친의 경우 왕족 종친을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지만, 관직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3] 학업에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심한 경우, 자기 이름자도 제대로 못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특히 왕위에 가까운 왕족일수록 영특하다거나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해서 쓸데없이 찍히는 일은 삼가야 했을 테니 더욱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현재의 임금님은 사냥꾼으로 불리웠고 자기 친척 집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장날이 되면 가장 값싼 일꾼 노릇을 하였고 인정머리가 털끝만큼도 없는 주인의 채찍을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전 임금님이 승하함에 따라 군인들 한 패거리가 강화도에 몰려가서 그를 현재 임금님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즉 조선 왕조의 창업 이래 5백 년 역사상 왕가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족의 공개된 수치와 치욕을 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의 권위로 그러한 불명예를 척결하고 조선 왕에게 영예를 회복시켜주기를 청하는 사신을 중국 황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프랑스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中 #
다만 교양수준과는 별개로, 귀앙 시기 인생막장을 맛본 것은 사실로 보인다. 위에서 인용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민간에 알려진 바로는 친척 집에서 종 노릇도 해봤고 주인에게 채찍으로 맞았다고 한다. 다만 최양업 신부가 조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고,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카더라를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전적으로 신뢰하긴 곤란하다.[4] 물론 당시 조선에 이런 카더라가 돌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철종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귀양제도에 대해서 알면 말이 안되는 것으로, 지방관청에서 관리하고 식량을 대주고 동향을 보고하는 사람이 항상 있었다. 게다가 철종은 친척이 극히 귀해 후에 외가친척을 사칭한 일도 생겼을 정도인데 무슨 친척집에서 일을 한단 말인가. 다만, 식량을 대주는 대신 일을 시키거나 혹은 제대로 식량을 대주지 않아서 일을 해야하는 경우는 많았다.
4 지존이 된 시골 청년
조선 순조의 손자이자 24대 왕인 조선 헌종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급사했을 때, 영조의 후손으로서 정통성을 가진 왕족은 이광의 아들들밖에 없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순원왕후는 이광의 아들인 이원범을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5]
- 이 시기에 직계왕통이 자주 단절된 이유는 효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였고,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이었다. 숙종은 아들이 몇 명 있었지만 영조 빼고는 대가 끊기고, 영조에게 그나마 오래 살아남은 아들은 사도세자뿐이었다. 이렇게 효종 이후로 아들 들이 귀해지면서 결국 효종에서부터 내려온 직계 왕통은 철종을 끝으로 단절된다. 철종이 즉위할 때 이미 직계 왕통에 가까운 왕족이 적었는데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했고, 전계대원군의 서자이자 철종의 이복형인 영평군에게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정왕후는 어쩔 수 없이 먼 방계 왕족 중에서 차기 국왕이 될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림 - 강화도행렬도(江華島行列圖). 북한의 평양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 철종은 자신의 할아버지나 큰형(이원경)이 역모에 몰려 죽은 전례가 있어서 이번엔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철종의 형(이경응, 서자라서 왕위 계승 후보에서 밀렸다.)은 도망가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후 영의정 정원용의 설득과 주민들의 협조(?)로 결국 가마에 오른다. 그리고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서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본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즉위한 후 강화 유수가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집을 지어 확장했다고 한다. 이 궁은 지금도 강화도에 남아 있는데 용흥궁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한다.
이원범이 즉위할 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원범이 헌종의 항렬상 아버지, 즉 삼촌뻘이라는 거였다. 당시 원범이 즉위할 경우 종묘 제례 때 자신보다 항렬이 하나 낮은 헌종에게 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것은 장유유서의 원칙에 어긋난다. 그러나 헌종과 같은 항렬의 왕손이 없는 상황이고 항렬 문제는 정통성에 비하면 솔직히 문제도 아니기 때문에 순원왕후는 원범에게 우선 덕완군이라는 군호를 내리고 바로 자신의 양자로 삼아서 덕완군 이원범을 법적으로는 효명세자(=익종)의 형제이자 헌종의 숙부로 만들었으며, 헌종의 가장 가까운 혈통인 원범이 차기 국왕이 되는 게 확실해졌으므로 더 이상 이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당장 철종의 승계에 항렬 어긋난다고 트집 잡는 사람은 없고 종사의 무궁한 복이라는 언급들만 있다. 대비의 분부에 어찌 태클을 걸겠느냐마는... 순조 이후 세도정치가 굳건해졌으니 똑부러지기보단 어리바리해서 구워삶기 좋은 왕이 대신들에겐 홍복이었을 것.
5 임금 철종
자신이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조차도 또 다시 안동 김씨를 왕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지만, 다른 안동 김씨의 압력에 유야무야되었고, 결국 순조, 헌종과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삼고 김문근은 국구가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
즉위 시점에 이미 19세의 청년이었던 데다가 여러모로 공부한 바도 있었고, 즉위 후 제법 군왕다운 위엄을 보였기에 수렴첨정 3년차인 1852년부터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어릴 적부터 서민들의 민생고를 직접 눈으로 본 철종은, 초기에는 여러 개혁정책들을 능동적으로 추진하려고 했으나 세도 가문들의 비협조 속에서 대부분 불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순조 대에 일어난 일이지만, 딱히 제왕학을 교육받지 않아 현실정치에 어둡고 정통성 면에서도 좀 꿀렸던 철종의 국정 장악은 쉽지 않아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專橫)을 막지 못했다. 따라서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 경상도 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全州) 등지에서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를 '임술민란'이라 한다. 조정에서는 속출하는 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임술민란이 터졌을 때는 "우리 백성들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를 외치면서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제법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했으나, 안동 김씨와 그들의 나팔수 정원용 등이 "환곡제도가 수백 년을 이어 내려왔는데 이제 와서 없애자니 애석한뎁쇼? 급하게 없앴다가 부작용이 나면 어쩔까요?"라고 슬슬 딴죽을 걸었고, 그 사이에 민란이 대부분 정리되자 "어떻게든 되겠지" 식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이러한 혼란 와중에 '말세론'이 면면히 퍼졌고, 교주 최제우가 창시하고 만민평등을 제창한 '동학(東學)'의 등장으로 민심이 왕조로부터 떠날 것을 두려워한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급히 처형시켜버렸다(하지만 그 전에 먼저 철종이 승하한다. 최제우는 고종이 즉위하고 난 뒤에 대구에서 처형당함).
그 외에 철종 때 일어난 사건 중 하나로 종계변무 사건이 있다. 종계변무란 명나라 사서에서 태조 이성계를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써놓자 조선에서 이를 고치려 노력한다. 이후 큰 줄기의 일은 선조 때 해결되었으나 뒷일이 철종 대에 다시 불거진 것이다. 즉, 청나라의 어느 이름 없는 학자가 쓴 듣보잡 서적[7]에 이런 잘못된 내용이 나온다는 것. 때문에 당시 사행사로 중국에 가있던 윤치수가 청나라 관리에게 고쳐달라고 한다. 하지만 청나라의 반응은 그런 미미한 서적에 대해선 우리도 몰라요. 그런데 윤치수는 청나라 관리들도 모르는 이 책을 30권이나 찾아내 기어이 고치게 만든다. 이 사건으로 철종은 위에서 보듯 길고도 아름다운 시호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청나라 관리들도 모르는 책을 윤치수는 어떻게 구했을까?" 하는 부분에서 또 다른 의문을 사기도 한다.)
여담으로 중국에 보내는 사행 사에 왕족인 '경평군 이호'를 임명하였다. 이에 대해 숭실대 하정식 교수는 세도정치가들에 의해 사행정보가 통제되고 왜곡되자 왕족을 직접 보내 정보를 얻어 보려고 노력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물론 현실은 20대 애송이 왕족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세도정치가들에게 쉬운 일이었다. 오히려 경평군을 통해 중국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잘못된 인식만 가지게 되었다. 이후 경평군은 세도 정치가들에 의해 유배된다.
6 임금님의 첫사랑[8]
로맨티스트라는 얘기가 있는데, 강화도 시절 ‘양순’이란 이름의 하층계급 여인과 결혼을 생각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천한 신분의 양순은 궁에 들어간들 무수리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라 바로 철종의 후궁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이런 내용의 야사까지도 있다. 양순에 대한 상사병으로 괴로워하는 철종을 보다 못한 조선 왕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양순을 독살했다(!)는 것. 나중에 이를 안 철종은 비탄에 잠겨 국사도 멀리한 채 황음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이 야사 일화는 조선 왕실의 시스템에 대해 무지한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왕은 초월적인 존재라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정식으로 후궁으로 삼을 권한이 분명히 있었다. 설령 신분이 천해 바로 후궁으로 삼을 수 없다 치더라도, 궁녀로 삼은 뒤 승은을 내리면 된다. 당장 영조의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실제로 조선 초기의 일이기는 하나 태종의 후궁인 효빈 김씨나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는 노비 출신으로 정1품 빈까지 되었다. 경종-영조 시대 이후로 법적으로는 궁녀는 노비만이 될 수 있었으므로 천한 신분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9]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천한 신분이라서가 아니라 병마에 걸렸다던가, 역적의 후손 등 그녀가 입궁하지 못 했던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왕의 후계자가 귀해지던 조선 후기는 찬물 더운물 가릴 시점이 아니었다.[10]
또한 농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때 먹던 모주(막걸리)를 너무 그리워 해 중전이 친정에 부탁해 구해 올렸다는 야사가 있다.
7 이른 죽음과 그 뒷이야기
철종은 어디까지나 꼭두각시 왕으로, 실권이 없어 왕이라도 왕 같지 않다는 자조감과 복잡한 궁중 예법에 질려버렸고,[11] 여색과 술로 시간을 때운다. 그러다 보니 농사로 인해 튼튼해진 체력이 급속히 무너져버렸고 철종은 재위 말기에 잔병치레로 골골하다가 결국 33세라는 한창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죽음에 안동 김씨는 혼란에 빠졌으며, 모두 후계 문제에 정신이 팔려 왕의 죽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5남 6녀를 두었으나 어릴 적에 모두 죽고 영혜옹주만이 살아남아 개화파의 거두이자 또한 친일파의 일원이 되는 박영효와 혼인했다. 하지만 영혜옹주 역시 박영효와 결혼하고 3개월 만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 결국 철종도 요절하면서 왕통은 다시 단절되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차남을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고, 이 왕족이 고종이다.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철종과 핏줄상 남과 다를 바 없다. 이 둘은 인조에서 갈라져 나오는데 촌수로 18촌이다. 최초로 방계 승통한 선조가 정통성 컴플렉스 때문에 그렇게 히스테릭 했었지만 그도 선왕이었던 명종과 3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조선이 망하기 2보 직전이었던 때라 그런 것쯤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듯.[12]
그리고 전통적 방식으로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은 이 왕의 실록이 마지막이다. 이후의 고종 실록, 순종 실록은 경술국치이후 일제가 편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종실록 역시 상당히 문제가 많다.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정치가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죄다 빼버렸고 유리한 건 부풀렸기 때문. 실례로 철종 12년 3월 27일 ~ 4월 23일의 기사는 2쪽 분량이다. 이어지는 5월 한달치 기사는 1쪽도 안 된다. 사실 철종실록뿐만 아니라 세도정치기의 실록인 순조실록, 헌종실록도 이전까지(태조~정조)의 실록에 비해 기록이 상당히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시절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승정원일기가 완역될 필요가 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의 예릉(睿陵)으로 철인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실록과 마찬가지로 철종의 예릉 역시 전통적인 조선왕릉 형태로 조성된 마지막 왕릉.
8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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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된 어진 | 선원보략 철종 초상화 |
철종 어진은 구군복 차림으로 그려진 유일한 어진이라 예술성이나 역사성에서 상당히 중요한 그림이다. 철종의 나이 31세 때인 1861년에 어진화사가 시행되었는데,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어진들을 옮겨 놓았다가 불이 나면서 반이 타 버렸고#, 남은 부분을 기반으로 1987년에 복원한 것이다. 얼굴 부분까지 타면서 복원이 불가능하게 된 다른 왕들보다는 그나마 다행인 편. 모닥불러와 매우 닮았다. 반대로 효명세자와 순조의 초상은 얼굴을 포함한 채 타버려서 복구가 불가능했다.
선원보감에 남아있는 간략한 초상화. 위의 어진과 비교해 보자. 코와 입, 턱수염은 어진을 보고 그린 듯 하여 비교적 비슷하나, 얼굴 주름살이랑 어진에 비해 과도하게 치켜 올라간 눈썹과 눈 때문인지 분위기가 영 달라보인다.
9 창작물에서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선 최수종이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도 양순이 보고 싶다고 궁궐을 나가려고 하다가 병사들이 가로막자 담을 막으려던 모습을 보였고 결국 양순이의 죽음으로 그야말로 알게뭐냐 내 인생~ 방탕에 빠졌던 모습으로 나왔다가 병으로 쓰러질 무렵 안동 김씨에게 비웃듯이 "과인이 죽으면 참 당황하겠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듯이 묘사됐다. 그리고 그 이전인 1975년에서 1976년 사이에 철종의 첫사랑을 소재로 한 <임금님의 첫사랑>이라는 TBC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했었는데 조선왕조 5백년의 신봉승 작가와 김재형 PD가 연출했던 작품이다.
같은 MBC 드라마인 닥터 진에서는 김병세가 연기를 하는데, 과도한 스트레스로 대인기피증에 걸려서 약까지 거부할 정도로 쇠약한 모습을 보인다. 과호흡증에서 자신을 구해준 진혁에게는 마음을 열지만 얼마 안 가서 급성충수염에 걸려서 괴로워한다. 역사에 맞게 흘러가려면 여기서 죽어야 할 목숨이지만, 진혁의 노력으로 종친들의 피를 수혈 받아가며 수술에 성공한다. 이후 명복이를 조대비의 양자로 들이라고 직접 윤허하기까지 한다. 주인공인 진혁과 우호적인 관계로 자세한 것은 철종(닥터 진) 참고.
MBC 드라마 세븐이 주연을 맡은 궁s 가 이 사람의 스토리를 모티브로 만든 드라마이다. 주연을 맡은 허이재의 이름이 양순.
툰드라쇼 조선왕조실톡 유병재가 철종역을 맡았다
출신 배경 때문에 창작물을 포함한 여러 매체에서 철종은 왕이 된 어리버리한 듣보잡 방계 왕족 이미지로 자주 묘사된다.
- ↑ 사후 시호.
- ↑ 1908년 순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시호
- ↑ 성종 때 '구성군 사건'으로 직계 왕족의 5대손까지는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 ↑ 명목상 왕족인데 종노릇을 했다는것 자체가 이해되기 힘든데 왕족의 경우 역모에 연루되어도 그냥 이름이 거론된 경우에는 왠만하면 당사자만 죽는 정도지 형제가 피해를 봐도 철종처럼 귀양 정도인데다가 현실적으로도 친척 집에서 종을 했다가 사면되면(조선시대에서는 사면이 종종 일어났는데 사면은 왕이 시키고 왕의 입장에서는 왕족은 자기 식구들인 만큼 슬쩍 편들어줄 확률이 높다.) 자기를 종으로 부린 사람을 그냥 놔뒀을까? 게다가 당시 왕(헌종)은 아들도 없어 어차피 찾아봐야 제일 가까운건 철종 아니면 경응 둘중 하나였다. 제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이 당시에 왕족을 종부리고 채찍질하는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왕족이 사면되면 미운털 박히고 왕의 대가 끊겨서 왕이 되면 사약을 먹어야 하니까
- ↑ 이원범 위로는 작은형 이경응이 있었지만 이경응은 어머니가 측실인 서자였고, 이원범은 계실 즉, 정실이 사망하였고 후에 들인 본부인이다.
- ↑ 여담으로, 영평군(이경응)은 1828년에 태어나 1901년에 죽어서 꽤 장수했지만, 자식 복은 없어서 생전에 양자, 양손자, 양증손자(!!!)까지 들여야했다. 양증손자로 들어온 사람은 이해승(1890~?)으로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파이다. 이해승은 한국전쟁시 납북되었는데, 장남이 그 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손자인 이우영(현 그랜드서울 호텔 사장)에게로 재산이 상속되었다. 제1공화국은 6.25 이후 구황실 재산을 국유화했지만, 직계 황족이 아니었던 철종계의 재산은 유지될 수 있었고(물론 반민특위 해체도 한몫) 지금까지 나름대로 잘 사는 편이다. 친일파 재산 환수 특별법 제정 이후에는 치열하게 법정 다툼 중.
- ↑ 정원경(鄭元慶)이 저술한 《이십일사약편(二十一史約編)》이다.
- ↑ 1975년에 방영된 TBC 드라마 제목으로 실제로 철종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동명의 영화가 1960년대에 있었는데 이 영화는 철종과 관련이 없는 영화다.
- ↑ 혜경궁 홍씨가 궁녀를 양인으로 뽑았다가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야단을 맞은 일도 있다. 물론 순조 대 관노비 혁파 등으로 노비 출신 수급은 차츰 어려워졌고, 철종~고종 시대, 특히 지밀, 침방, 수방의 궁녀들은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으며 집안에서 대를 이어 궁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 ↑ 당장에 전왕인 헌종의 7촌이라는 어마어마하게 먼 촌수인 철종이 왕이 된걸 상기하자
- ↑ 그럼에도 그는 사면 문제에 한해서는 자기만의 권한 수준으로 했는지 김노경의 경우 대간+대신이 반대했음에도 사면시켰고 홍인한(대리청정 반대했다가 정조가 죽여버렸다.)을 사면시키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자 물러났다가 철종 9년 원자가 탄생하자 이 분위기에 편승해 사면시켰는데 때가 때인지라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철종 초반기에 안동 김씨의 압력으로 죽인 조병현을 철종 4년에 사면시켰는데 안동 김씨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왕도 무언가는 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추측했다.
- ↑ 실제로 흥인군,흥선군계가 싫다고 해도 어차피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으로 해야하거나 원범의 서형인 경응의 아들로 해야했는데 문제는 경응의 아들들은 서자인데 그럼 서자의 서자로 하는건데 이 경우는 정통성이 달리고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들은 너무 멀다. 그나마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이면서 그래도 양자로 은신군의 아들로 들어온 남연군의 아들들이 제일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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