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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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鎣弼 (1906년 ~ 1962년)

간송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한국 미술사를 거론 할 수 없다.[1]
한국의 아름다움을 지켜낸 사나이

1 개요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간송(澗松). 한국의 교육자이자 문화재 수집가. 조선 정3품 전계훈의 손자로 참서관을 지낸 전명기의 둘째아들이다.

2 문화재를 되찾아온 인물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들을 수집해서 이 땅에 남긴 위대한 인물. 성북동 산하리에 위치한 간송미술관전형필1938년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인 박물관이다.[2] 24살 때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같은 활동이 순조로웠던 듯 하다. 이후 광복이 되어서도 고적 보존위원으로 피촉되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정리,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느라 박물관 개관은 뒤로 미룬다.

6.25 전쟁 때는 북한에 국보급 문화재를 죄다 도난당할 위기에 맞았으나 다행히 천우신조로 극복했다고. 참고로, 이분이 6.25 전쟁이 일어났던 무렵에 지켜낸 문화재가 바로 훈민정음 원본이다. 휴전 후, 남은 소장품들을 정리하며 미술학자들과 함께 보다 규모 있는 박물관을 구상하던 중 갑작스레 들이닥친 병마로 인해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하다 이 세상을 떠난다. 향년 56세. 그 후 후손들은 선친의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 1966년 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그를 중심으로 간송 수집품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와 학문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지고, 1971년 가을부터 매년 5월, 10월에 소장품 전시회를 연다. 소설가 이충렬은 이같은 전형필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0년 소설 간송 전형필을 출간하였다.

1938년 서울 한복판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빛나는 보물을 모아두는 집이라 하여 보화각.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중 하나인 간송미술관이 세워진 것은 간송 전형필에 의해서다.

3 생애와 주요 활동

1906년 종로에서 전영기의 아들로 태어나지만, 작은 아버지의 양자가 된다. 그러나 99칸 한 집에서 양부모 양조부모까지 사는 관계로 양육은 그대로 친부모가 맡았다. 이 배경으로 훗날 양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하늘이 내린 재산가 백만장자가 된다.[3] 어의동 공립보통학교와 휘문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라 잃은 백성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을 전공하지만 평생의 스승 위창 오세창[4]을 만나며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일세"

이 말씀을 새기고 오세창이 건넨 근역화휘근역서화징으로 문화재를 감식하는 눈을 기른다.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를 시작으로 본격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하는데 헌신한다. 1900년대 초부터 일본인들의 손에 흘러 들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우리의 문화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 붓는 간송. 고서화 수집의 전진기지로 한남서림을 인수. 이후로 고려청자, 조선백자, 돌로 만든 탑과 부도, 금동여래입상 등 그냥 보기 좋은 예술품을 지켜낸 것이 아닌 예술적 가치를 넘어선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혼을 지켜낸 것이다. 특히 고려청자의 대표작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청자모자원형연적(국보 제270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66호)는 모두 전형필이 일본으로 팔려갈 뻔 한것을 거액을 주고 사들여 지켜낸 작품들이다.

1940년대 일제는 조선어 사용금지와 1942년 조선어학회 탄압사건 등 우리민족 말살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6월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판매자가 천원이라고 했지만 귀한 물건은 제 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집 열 채 값인 만원을 주고 천 원은 수고비로 주며 사들였고 한국전쟁 때는 몸에서 떼지 않은 채 지켜[5]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귀한 것을 귀하게 보는 눈. 먼 미래까지 보며 내 나라를 지켜낼 방법을 알았던 그이기에 기와집 400채 값으로 영국인 개스비에게 고려청자 20점을 사고[6]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 문화재 특히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찾아온다.

또한 아버지의 유언으로 현재 서울의 보성중학교,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육사업도 하였지만[7] 1959년 엄청난 재정사고가 발생, 그 빚을 갚기 위해 가족들까지도 극심한 쪼들림에 시달려야했다. 재단에서 빚을 갚지 못해 학생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아 돈을 댔다. 사실. 서화와 도자기 몇 점만 팔았어도 해결하고도 남았겠지만 전형필은 끝까지 자신의 문화재 수장품들을 지켜낸다.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재단의 빚을 모두 갚은 후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져서 1962년 만 56세로 세상을 떠난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많이 봐왔던 문화재들이 사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속에서 대단한 노력 끝에 지켜낸 것이다. 전재산을 포기하고, 값비싼 제의에도 절대로 팔지 않으며 오히려 바가지를 써서라도 구입하면서 그가 지켜낸 소중한 문화재들은 그야말로 "민족의 혼과 얼이고 한국의 문화이며 자존심"이었다. 우리 땅에서 우리 보물들을 지켜내고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음을 감사하게 느끼자.

4 기타

  • 휘문고등학교 재학당시 야구부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축구부장 박정휘[8], 미술부장 이마동[9]과 함께 친하게 지내서 삼총사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특이하게도 친구들은 자기 적성과 맞게 직업을 가졌는데 전형필은 야구와 관련 없는 쪽으로 직업을 가졌다.
  • 부산에서 비슷한 활동을 한 석당 정재환 박사는 '부산의 간송'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의 소장품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1. 이충렬, 「간송 전형필」(2010)
  2. 설립 당시 위창 오세창 선생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3.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재적 관점으로 보면 참으로 전형필이 집안의 유산을 물려 받은건 다행이지만, 전형필 개인 사정으로 보면 참으로 딱한 일이었다. 이 유산을 물려받는데 조부모, 삼촌, 부모님이 거의 같은때에 돌아가셔서 물려 받을 사람이 없어서 전형필이 가족, 친척의 모든 재산을 다 물려받은 것이다.
  4. 1864-1953. 개화사상가 오경석의 아들이며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예가로 유명하다.
  5. 남쪽으로 피난갈 당시 전형필이 직접 품에 안고 걸어갔으며 밤에는 베개 밑에 두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
  6. 현재 돈으로 약 1200억 원이다.
  7. 현재 보성중고의 중시조급의 인물로 지금도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동상이 있다.
  8. 1909년~1985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
  9. 훗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