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간송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1 개요
대한민국의 박물관이다.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전형필(全鎣弼, 1906년~1962년)이 1939년에 세웠다. 간송(澗松)은 설립자인 전형필의 아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해 있다. 서울 3대 사립박물관(간송미술관, 리움미술관, 호림박물관) 중 하나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손꼽힌다.
2 소개
전형필은 조상 대대로 서울의 종로 상권을 모조리 장악한 서울 최고의 부호였다. 전형필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살펴보면 논이 4만 마지기, 여기서 나오는 순수익이 연간 15만 원이었다. 서울 시내의 큰 기와집 1채가 1000원 하던 시절에 말이다.[1] 그는 이 막대한 재산을 이용해서 한국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지켜내려 노력하였고,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과 함께 문화재들을 수집해서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葆華閣)을 1938년에 설립했다. 보화각이라는 이름은 오세창이 지은 것으로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라는 뜻이다.
3 소장품
소장 문화재는 주로 고서화 위주인데, 규모 자체는 다른 대형 박물관에 비해 다소 초라하지만 유물의 질적 수준은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의 상당수가 여기 있다. 국보급 문화재만도 10여 점이 넘고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훈민정음 해례본, 동국정운 원본, 신윤복의 미인도와 김득신의 파적도 등 한국의 그 어떤 박물관도 따라갈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이는 전형필의 아낌없는 수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귀중한 문화재를 수집,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바가지를 쓰는 것도 전혀 마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치가 있겠다 싶으면 상대방이 제시한 가격에서 더 지불하여 사가기도 했다. 그 예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할 때는 그 책의 제대로 된 값을 치뤄야 한다며 상대가 처음 제시했던 가격의 10배의 돈을 얹었는데 그 액수가 무려 11000원이었다(책값 1000원 + 추가로 10000원).[2][3]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와집 1채의 값이 1000원 하던 시절이었다. 쉽게 말해서 책 한 권에 타워팰리스 한 채 값을 주고 추가로 타워팰리스 열 채 값을 얹어 주었다고 생각해보라!!! 하지만, 이 책은 타워팰리스 백 채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치 측정이 불가능하다. 타워팰리스 같은 고층건물은 설계도를 바탕으로 새로 지을 수 있지만, 훈민정음은 언제 다른 진본이 재발견될지 알 수 없는 유일품이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한글의 과학성과 독창성은 단순한 추측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의 노력 덕분에 한글의 창제원리가 학술적으로 규명되어 전 세계 언어학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국어학자들에게는 실로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전형필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이 소중한 유산들이 우리 세대에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전형필에 대한 지지는 거의 절대적이다. 본격 '돈은 이렇게 쓰는거다'를 보여주는 모범사례.
4 사실 미술관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간송미술관은 법적으로 "미술관"이 아니다. 개방일이 규정[4]에 한참이나 미달한데다 애초에 미술관으로 등록을 하지도 않았다.[5] 사실상 그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미술관이라는 간판을 단 것에 대해서 특별히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 것 뿐이다. 아니면 간송집으로 해야하나 실질적으로 간송미술관은 연구 및 보존 시설에 가깝게 운영되고 있다.
참고로 미술관으로서 관람객들이 출입하는 그 건물을 포함한 미술관 부지 전부가 전형필의 후손의 사유지이다. 까놓고 말해 그냥 일반인이 집 안 마당에 미술관 건물 차려놓고 일반인에게 대문을 개방하는 셈.오오 미술관 정문에서 보화각 건물로 가기 전 오른쪽에 있는 언덕길을 통제하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전형필 후손들이 거주하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
5 관람 관련
5.1 기본 정보
간송미술관은 문화재의 전시보다는, 문화재의 보호와 연구에 더욱 중점을 두는 편이라서 관람이 여간 까다로운 편이 아니다. 개방 기간은 1년에 단 두번, 봄과 가을에 각각 2주일 뿐이고 5월, 10월 하순에만 대중에게 개방한다. 전시회를 가고 싶다면 이 시기에 신문 기사를 유심히 보면 모든 언론에서 한 번씩은 간송 미술관 전시회 소개 기사를 실어주니 그 때 확인해서 가면 된다. 그 외의 기간에는 일절 개방하지 않는다. 물론 사진촬영은 엄금. 게다가 전시 기간에도 모든 문화재를 상설 전시하는 게 아니라, 해당 전시회의 주제에 맞춰서 일부 문화재만 전시하는 형태라서 관람객 개인마다 원하는 문화재를 보기 힘들다. 이것이 아쉬운 점. 게다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박물관에 연락을 하는데 그 전화번호도 구하기 엄청 어렵다고 한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 내려서 6번 출구로 나와 성북초등학교 방면으로 올라가면 된다.[6] 걸어서 20분 이상 소요되니 마을 버스나 서울 버스 2112, 서울 버스 1111을 타고 가는 것도 좋다. 하지만 전시기간에 가보면 버스를 탈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평일 오전이 아닌이상 지하철역인 한성대입구에서만 내려고 엄청난 줄이 기다리고 있어 20분거리를 2시간만에 가는 진경험을 할수있다. 일년에 4주만 개방하는만큼 엄청날수 밖에 없다. 평일 오전 일찍가도 기다리지 않고 입장은 거의 불가. 반나절 스케쥴을 텅텅비우고 가야 겨우 볼 수 있다.
통상 관람 시간은 저녁 5시까지다. 성북초등학교를 바로 옆으로 주차 안내 표지판이 있는 곳이 미술관 입구다. 가면 우리 안에 개와 공작새, 온갖 화분이 즐비하고 앞에 2층 건물 하나가 미술관이다. 1시간이면 관람하는데 충분하니 부담 없이 두세시간을 기다리고[7] 다녀올 수 있다. 엄청난 가치를 가진 유물이 즐비한 간송미술관에 처음으로 간다는 설렘을 안고 가는 사람이면 작고 초라한 시설에 실망할 수도 있다. 전시실 면적도 좁아서 1층은 매우 좁고 2층에 올라가야 그나마 좀 공간이 있다. 게다가 국립 중앙 박물관 같이 제대로 조명 갖춰진 전시 시설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진열장도 유물만큼이나 유물급(...)이며, 유물에 대한 설명은 없고 유물과 작가의 이름이 들어간 안내판 정도만 있으니 시설에 대해서는 너무 기대하지 말자.
간송미술관에서 봐야할 것은 시설이 아니라 유물이다.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간송미술관은 국보가 12점, 보물이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가 4점이나 있는 곳이다.[8] 게다가 관람료는 무료다.[9]
5.2 이 지옥같은 헬게이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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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2일, '신윤복 열풍' … 1시간 관람하러 3시간 줄서.
개방 기간이 1년에 4주를 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못 오던 사람들은 이곳에 거짓말 안하고 인간이 줄이 되어 10분거리를 세시간만에 갈 수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부터 시작해서 수녀, 승려, 일본인 관광객, 관련 전공 학생들관람료가 무료이기에 돈없는 젊은 커플들까지까지 말 그대로 입구부터 출구까지 다닥다닥 붙어가면서 봐야한다. 거기다가 전시관도 협소하며 동선 계획도 완전 꽝이라서[10] 정말 사람끼리 어깨를 맞대고 봐야 한다. 신도림역 공중부양을 미술관에서 체험할 수 있다 좀 편하게 보고 싶다면 평일에 가자. 주말에 가면 깔려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밀려온다.
사실 2008년 신윤복전 이전만해도 간송미술관은 "아는 사람만 아는 숨겨진 명소" 정도였는데 2008년 당시 '바람의 화원'이라는 신윤복을 다룬 문근영 주연의 드라마가 히트치면서 혜원 신윤복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고 하필 그때 간송에서 혜원 신윤복전을 기획하면서 대중에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붐비게 되었다.[11] 특히 저 신윤복전 이전에는 젊은 사람보다 관람객들이 나이가 있으신 분들 위주였으나 공짜라는 것과 성북동 명소 쯤으로 소문이 나면서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몰리게 되었다. 간송미술관의 명성이 높아지고 미술관의 유물들이 빛을 보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나 이전에 한적하고 조용하게 관람하던 사람들은 예전과 분위기가 달라 아쉬워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게 당연하다. 국보가 바글바글한 곳인데 거기에 무료인데 인기가 없는게 어이가 없지.
어린이와 같이 오는 것은 절대 비추. 유명한 소장품이 나온다고 기사 타는 날에는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린다. 실제 2006년 간송 전형필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때 사람들이 성북초등학교 초입의 언덕길까지 우산 들고 서 있는 광경이 있었다. 게다가 잘못 갔다가는 콩나물 시루마냥 빽빽히 들어찬 사람들 덕에 제대로 보물 구경도 못하고 나오기도. 진열장에 개기름이 묻어 유물이 잘 안보이기도 한다. 이런 헬게이트가 열리는 상황 속에서 사실 천천히 제대로 관람을 할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다.[12]
근처의 성북초등학교에 주차가 가능하지만 수업이 있는 시간에는 주차할 수 없다. 수업이 있는 토요일 주말에는 2시 이후에나 가능. 주말에는 전시장 밖에서 입장까지 3~4시간은 기본으로 걸리기 때문에 근처의 초등학교에 주차하려고 2시 이후에 왔다가는 줄만 서고는 그림은 보지도 못하고 가는 수가 있으니 주의바람. 그나마도 이젠 간송미술관이 널리 알려지다보니 초등학교측에서 주차를 막는 분위기다.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던가 알아서 재주껏 주차하자. 참고로 근처 대부분의 도로변은 견인 지역이라서 잘못하면 여러분들의 차가 견인차에 실려서 끌려가는걸 볼수 있다. 진귀한 유물 있다고 해서 갔는데 나와보니 차가 없어졌더라고요. 이 차는 이제 제 차입니다. 제 마음대로 팔 수 있는 겁니다.
만일 미술관 내 유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원본 유물만큼은 못하겠지만 전시도록을 사서 보는 것이 편하다. 한동안 현금으로만 구매가 가능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가격은 약 2~3만원 사이. 전시도록 외에도 일부 그림들의 영인본, 즉 사진인쇄본 또한 판매하고 있으니 소장용으로 구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유물도 편하게 보고 기부도 하고
여하튼간 간송미술관은 한국 문화예술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가봐야할 성지와도 같은 곳이니 성지순례를 해볼 것을 추천한다.
6 트리비아
이 박물관이 하마터면 송두리째 사라질 위기가 있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이 함락될 때, 북한군 측에서 유물들을 평양으로 이송하려 했던 것. 다행히 미술사학자인 최순우 등이 이송 준비를 진행하는 척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서[13] UN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 까지 이송을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중요 문화재들을 부산으로 피난시켰지만,[14] 전시 상황이란 한계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던 서적류나 그림들은 미처 피난시키지 못해서 많은 수가 사라졌다고 한다. 심지어는 서울에 두고 온 문화재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간송 일행보다 부산에 먼저 내려와서 골동품상에 팔리고 있기도 했다고… 어째 옆 섬나라의 박물관이 생각난다.
2012년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는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의 훼손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소장품을 목격한 관련 인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보존 상태가 상당히 열악한 것으로 알려져 우려를 사고 있다. 또한 건물인 보화각 역시 세운지 70년이 넘은 낡고 작은 건물이라 소장품을 보관하기에는 적합하다고 보기 힘들고, 건물 자체의 상태마저 썩 좋은 상태가 아닌 상황. 하루라도 빨리 대책이 필요하나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여담으로 간송미술관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며, 경매에 붙인다면 다 파는데만 1년이 넘게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절차를 빼고라도 그 정도 걸린다는 것이다. 그 가치는 간송 전형필 선생이 구입한 가격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으로 평가되며, 그 가치를 비유하자면 삼성미술관 리움에 가서 간송미술관을 판다고 말하면 돈은 따지지 말고 우리한테 넘기란 말을 듣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6.1 변화?
전시보다는 연구 및 보존에 초점을 맞춘 간송미술관이었지만 2014년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을 바꾸려 하고 있다. 매년 봄가을 2주씩 열리는 헬게이트를 감당하기가 쉽지않으니... 2014년 3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개관전으로 간송 소장품 상설전을 열었다.[16] 간송미술관 측에 따르면 외부 전시를 추진하는 이유는 1930년에 지은 간송미술관(보화각)이 다수의 관람객에게 소장품을 공개할 대규모 전시를 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사실 전시장에서는 공기 질이나 작품 안전을 위해 인원수를 제한해야 옳다.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관람객 과밀 현상에 우려를 표했을 정도. 결국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전시를 여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또 8월부터 '간송미술문화재단'이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형태를 바꿀 예정이고, 해외 전시도 추진한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3월에 간송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가 열려 소장품 정보를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정보를 찾기 어려운 과거에 비해 대중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변화의 움직임 중 하나라고 봐도 될 듯. 또한 2014년 3월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일반 공개를 시작하기로 했다. 3개월에 한번씩 전시작품을 교체하며 약 3년간 진행할 예정이라고.
- ↑ 현재 강남의 50평대 아파트 가격이 20억원대임을 감안하면 오늘날 화폐 기준 3000억원(!!!)쯤 되겠다.
- ↑ 원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 김씨 문중의 가보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세종대왕이 광산 김씨 문중에 여진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라는 것인데, 이용준이 왜곡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나중에 연구로 확인 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국문학자 김태준을 통해 전형필 선생에게 훈민정음 해례본만 팔았다. 뜨악한 부분은 김태준과 이용준은 이걸 팔아 사회주의 운동에 돈을 썼으며, 후에 경성 콤그룹의 거물 김태준은 지리산 빨치산으로 붙잡혀 죽었고 이용준은 월북했다고 한다.
- ↑ 후에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선생이 죽은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고,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 ↑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 21조 (개관) 제 16조 제 1항에 따라 등록한 박물관 또는 미술관은 연간 문화체육관광부령으로 정한 일수 이상 일반 공중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여야한다.
- ↑ 정식 미술관이 되면 문화재급 유물을 대여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 소장품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 ↑ 한성대 입구 역 6번 출구로 나와서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한국에서 최고로 유명하다는 나폴레옹 제과점이다. 안내판에 보면 만해 한용운이 있던 심우장, 최순우 옛집이 인근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간송 미술관 가던 방향으로 계속 올라가면 수연산방이 있다. 예전에는 조용한 동네였으나 망가진 삼청동을 필두로 성북동 일대도 망가질 조짐이 보인다. 간송 미술관 주변마저 카페 골목처럼 변해서 시끄럽다. 오랫동안 이곳을 다니던 사람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이다.
- ↑ 관람객 폭증으로 부담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게 되었다.
- ↑ 개인이 설립한 사립 미술관에서 이러한 유물들을 소장한다는 것은 극히 드물다.
- ↑ 참고로 리움미술관의 입장료는 10000원이다. 국보와 보물의 가치를 가진 유물들을 소장하면서 관람료가 무료라면 거의 대인배나 다를 바 없다.
- ↑ 앞에서 말했듯 여긴 100% 사유지이니 그럴 수 밖에.
- ↑ 상기 링크된 기사에 당시 10만명이 왔다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 이전 글에는 '시청이나 구청은 뭐하나 이런데 지원도 안해주고' 라고 써있었는데, 개인 소장품이라서 사실 지원을 해줄 규정을 찾기도 쉽지 않다.
- ↑ 유물 목록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거나 유물의 포장 작업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기도 하고, 북한측 담당자들에게 고급 술을 대접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고 한다.
- ↑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 본인이 피난 생활 때 베개 밑에 두고 잠을 잘 정도로 철저하게 지켰다고 한다.
- ↑ 물론 진짜 리움미술관에 가서 저 말을 한 사람은 없지만 예술품에 환장하는 그 집안 내력으로 봤을 때 삼성 계열사 서너 개는 팔아서라도 구입할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리움미술관의 관장이 홍라희 여사이다. 그룹의 톱이 사실상 변경된 지금 시점에선 삼성그룹이 미술품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있다는 기사들도 나오고 있어 지금 시점에서 유의미한 문구인지는 불명이다.
- ↑ 자그마치 훈민정음 해례본이 전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