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고등학교(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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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송파구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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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법인 동성학원
고등학교보성고등학교
중학교보성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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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에서 본 교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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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서 본 교정의 모습(2006년)[2]
보성고등학교
普成高等學校
Posung High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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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건학이념흥학교 이부국가(興學校 以扶國家)[4]
교훈스스로 배우고
몸소 행하며
힘차게 앞서자
개교1906년 9월 5일
운영형태사립
학교법인동성학원(東成學園)
유형일반계 고등학교
성별남자고등학교
교목소나무
교화목련[5][6]
소재지
<#228b22><:> 서울특별시 송파구 양재대로 1728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89-22)
홈페이지
100년 역사의 보성이 한국교육의 미래를 엽니다

이제 110년 역사다 ㅎㄷㄷ

1 개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륜동에 위치한 일반계 사립 고등학교. 재단법인 동성학원 산하이며 같은 재단 보성중학교와 교정을 공유한다.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설립한 충숙공 이용익에 의해 설립되어 1906년 개교하였다. 보성전문학교와 같이 보성(普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7], 한자 그대로 '(민족의 인재들을)널리 이룬다(=키워낸다)'는 뜻이다. 전라남도 보성(寶城)군과는 관련이 없다. 더불어서 용산구의 보성(保聖)여자고등학교와도 관련이 없다. 이는 건학 이념인 '興學校 以扶國家(흥학교 이부국가, 학교를 흥하게 함으로써 나라를 돕는다)'와도 일맥상통. 학교의 재단은 바뀌었지만 이름과 건학이념만은 100년 이상 내려오고 있다.

2 역사

1906년이용익 선생 창립. 교명을 '사립 보성중학교'라 칭하고, 동년 9월 5일 학부에서 설립인가를 받아 신해영 선생을 교장에 임명하고, 신입생 246명을 모집하여 동월 21일 한성부 중서 박동 10통 1호에서 개교
1910년천도교 총본부가 본교 설립자가 됨
1913년교명을 사립 보성학교라 개칭
1917년교명을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
1924년1월 5일 재단법인 조선 불교 중앙교무원[8]이 본교 설립자가 됨
1927년5월10일 경성부 혜화동 1번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서울과학고등학교 자리)로 교사(교지 3,851평 건평 연와 2층 505평 목조 부속건물 114평)를 신축 이전
1932년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와 재단분리[9]
1935년재단법인 고계학원이 본교 설립자가 됨
1938년조선교육령 개정에 의하여 교명을 보성중학교로 개칭
1940년재단법인 동성학원이 본교 설립자가 됨
1945년동성학원 설립자 간송 전형필 선생 제12대 교장에 취임
1946년6년제 고급중학교로 학제변경 인가.[10]
1950년5월 1일 신 교육령에 의하여 중, 고 분리
1950년6월 25일 석조건물 62평 도서관 신축 낙성 개관 준비중 한국전쟁 발발
1951년4월1일 부산 영주동에 임시연락사무소를 정하여 피란학생 등록 개시
1954년6월 18일 혜화동 교사로 복귀
1971년3월 전성우 선생 제20대 교장에 취임
1973년보성고등학교로부터 보성중학교 분리
1976년9월 5일 창립 70주년 기념식 거행(과학관을 완공하고 설립자 이용익 선생 동상과 간송 전형필 선생 동상을 제막)
1989년교정을 종로구 혜화동에서 송파구 방이동(현 교정)으로 이전
1989년5월 20일 방이동 신축교사 준공식
1996년3월 2일 김장화 선생 제21대 교장에 취임
1999년9월 2일 류보일 선생 제22대 교장에 취임
2002년9월 2일 김갑철 선생 제23대 교장에 취임
2006년100주년 기념식 및 보성 100년사 발간
2007년박재현 선생 제24대 교장에 취임
2008년5월 15일 100주년 기념관 준공
2010년2월 28일 식당동 준공식
2010년9월 1일 봉호근 선생 제25대 교장에 취임
2014년9월 1일 구선일 선생 제26대 교장에 취임

1905년, 탁지부 대신이었던 이용익고종으로부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과 황실 문장인 이화문을 교표로 하사 받아 사립보성소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먼저 개교하였고, 1906년 9월 사립보성중학교를 개교하였다.[11] 참고로 보성 시리즈(...)의 시작은 소학교/중학교/전문학교의 3개 학교였으나, 소학교는 사라졌고 중학교[12]는 고등학교[13]가 된 뒤 중학교[14]가 분리되었으며 전문학교는 소학교, 중학교와 재단이 분리된 뒤 아예 이름까지 갈렸다.[15]

1908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당시 황실군악대를 앞세워 수송동 교사 (현 조계사)에서 경희궁까지 졸업생, 교사들이 행진을 했다고 한다.
을사조약 이후 이용익 선생이 러시아로 망명하였고 그에 따라 보성학교는 손자인 이종호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으나 그는 곧 항일인사로 지목되어 1909년 구금 당했다. 그 후 경영난에 빠진 보성학교를 천도교주인 손병희가 인수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학교 내부의 인쇄실인 보성사(普成社)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였고 많은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여 3.1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에 속해있던 교주 손병희와 교장 최린이 잡혀가 학교가 다시 경영난에 빠졌다. 그 이후에도 거듭된 경영난에 빠지다가 1940년 간송 전형필이 학교를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0년 4.19 혁명 때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는데 보성고를 포함한 다른 학교들과의 친목서클이 주도하여 서울시내 고등학교들 간 연합을 구축하고 시위에 참여했다고 한다.

보성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학교법인이 자주 바뀐데서 알 수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계속된 경영난에 시달리던 보성은 보성학원-천도교 총본부-조선불교 중앙교무원-고계학원을 거쳐 현재 재단인 동성학원이 5번째 재단이다.

3 교가 및 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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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은 당시 오산학교 등의 여러 민족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던 이상준[16] 작사는 춘원 이광수가 맡았다. 춘원의 이후 행적을 생각하면 좀 흑역사. 특이하게 박자가 4분의 5박자이다. 휘문고 교가도[17] 다들 립싱크하다가 마지막 보성만 힘차게 불르는 기적의 교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위의 교가는 개교 이후 2번째 교가다. 원래 작사가는 춘원이 아닌 김인식 선생. 다만 멜로디는 바뀌지 않고 가사만 바뀐걸로 추정된다. 원래 가사는 전하지 않고 있으나 '자유', '자치국민', '대한' 등의 가사가 들어가 있어 1917년 보성고보 인가 때 총독부가 강제로 바꾸었다 한다.

그런데 1917년에 가사가 현재의 것으로 바뀌었다면, 1920년대 이전에도 교가가 존재했다는 말인데, 보성고 교내의 전통관에서는 '1920년대에 작곡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되어 있었다. 학교 측에서 확인바람

보성 축가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저 하늘 높이 솟은 보성 한세기[18]

우리들 사만명[19]의 보금자릴세
비바람 몰아치던 한세기[20] 전에
이 학교 세우신 그 뜻을 따라
가시밭 헤치며 지나온 산하
아아, 찬란하다 보성의 깃발
나라와 겨레 위에 영원하리라

오색 구름 어린 북악산 밑에
장하다 보성 우뚝이 서서
우리들 갈길을 비춰 주도다
가르치심 백리 뻗어 삼천리 덮어
산넘어 강을 건너 꽃을 피우리
아아, 찬란하다 보성의 깃발
나라와 겨레 위에 영원하리라

개교 70주년에 작곡되었다. 개교 70주년 당시에는 교정이 종로구 혜화동에 있을 때라서 나오는 산이 북악산이다. 개교 100주년이 넘어가면서 위의 가사들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런데 사실상 거의 안 불린다. 불려봐야 1년에 한 번 정도다. 바로 그 날이 언제냐 하면 바로 개교기념일.

4 위치

오륜동 올림픽선수촌아파트 부지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다. 대로변 사거리에 위치[21]하고 있는데다 정면에 올림픽공원[22]을, 후방에 서울 외곽 그린벨트 지역을 마주하고 있어 주변 경관은 상당히 쾌적하다. 사거리의 대각선 건너편에 성내동이 있는데, 고등학생들은 느끼기 어렵지만 여기도 나름 한국체육대학교의 배후 상권지역이다.

5 교통

교통편정문후문
지하철5호선9호선(개통 예정)
올림픽공원역오륜역
버스상행올림픽공원역[23]보성중고등학교서문교회
322033193412341330-5177-183316
하행
보성중고등학교동북중고등학교

교통도 지하철 5호선 올림픽공원역과 도보로 7~8분 거리에 있어서 그렇게 나쁘진 않은 편. 그간 잠실이나 석촌, 송파동[24]에 사는 학생들은 버스로 20~30분 걸려 통학해야 했으나 2016년에 정문에는 9호선 올림픽공원역이, 후문에는 오륜역이 개통되어 시간을 줄여줄 것이다.
가끔 야외 견학 행사나 소풍 같은거 잡히면 다들 올림픽공원에 잡히길 소망한다. 교육청에서 대충 때우지 말라고 태클 들어와도 꿋꿋이 해주는 고마운 선생님들이 계신다

6 시설

89년 방이동(현 오륜동) 교정으로 이전할 당시만 해도 면적이나 시설 면에서 꽤 좋은 학교에 속했다.[25][26] 학교 부지가 고등학교 치곤 상당히 넓고, 학교 건물과 교정의 여러 군데가 대학 캠퍼스를 연상시킨다. 세월이 많이 지난 2010년대 현재로선 많은 시설이 낡고 보수의 필요성이 크지만, 여전히 같은 지역 내 고등학교들에 비하면 외관이나 내부시설 면에서 상위권이다. 상위권일뿐이다. '절대' 좋지않다.

위에서 볼 경우 구조가 상당히 특이하다. 대략 'Λ__⌒' 비슷한 모양이긴 한데...그래도 괴악한 수준은 아니다. 교사들은 다른 학교들에 비해 일자로 긴 구간이 없어 학생들이 폭주(...)할 수 없어서 좋다고 한다. 그래도 폭주할 놈들은 커브길을 달려서라도 폭주한다.

6.1 지하 1층

예전에 식당으로 쓰였지만 식당동 완공 이후부터 매점으로 쓰이는 곳이 강당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점심시간 코스가 식당-매점-지하 1층 복도-체육관 또는 운동장

생물실, 화학실, 영어교실과 많은 동아리실이 지하 1층에 있고 맨 끝에 Wee 클래스와 야외 테니스코트로 통하는 문이 있다. 점심시간에 많은 학생들이 식당과 가까운 중앙계단으로 몰리기 때문에 일부 학생들은 이 문을 통해 나가서 식당으로 향하는데 오히려 중앙계단을 통해 가는 것보다 빠를 수 있다.

1학년동 지하 1층 맨 끝에 있는 화장실은 학생들이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서 폐쇄되었다.

6.2 1층

강당, 물리실, 지구과학실, 수학교실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일반 교실이다.

앞 건물 1층에는 생활지도부, 인쇄실, 숙직실, 보건실이 있다.

6.3 2층

구름다리를 건너 앞 건물에 제1교무실이 위치한다. 그 외에 컴퓨터실, 기술실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일반 교실이다.

6.4 3층

중앙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도서관과 열람실, 왼쪽으로 어학실, 3학년 교무실(제2교무실)이 위치하고, 앞쪽으로 3학년 교실과 진학지도부가 있다.

6.5 4층

음악실과 미술실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일반 교실이다.

6.6 100주년 기념관

정문에서 중학교로 올라오는 길목에 중고등학교로서는 드물게 100주년 기념관이 있다. 100주년 기념관이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농구코트가 있었는데, 상큼하게 갈렸다.(...) 종종 동문회와 결혼식이 열리며 외부인의 강연이나 영어 발표 대회 같은 큰 행사가 열릴 때 학생들이 쓰기도 한다. 사실 100주년 기념관보다는 강당을 더 많이 써서 학생들은 사실상 거의 안 쓴다.

6.7 도서관 및 독서실

독서실의 경우 보아반[27]이 사용하는 시설과 일반 학생이 사용하는 시설이 구분되어 있다. 보아반이 사용하는 독서실의 경우 칸마다 2단계로 밝기조정이 가능한 조명과 콘센트가 달려있다. 일반 독서실의 경우 한 용자가 조명 전선에 멀티탭을 연결해서 콘센트를 만들어내었다. ㅎㄷㄷ 일반 독서실의 경우을 신청제로 운영이 되는데 이용시간을 많이 기재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배정하므로, 자리를 배정받기 위해 가짜로 사용시간을 부풀려 신청하고 찍튀 및 대리출석[28]을 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보아반 소속 학생의 경우 예전에는 특별히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는 한 무조건 자리를 배정해 주었지만, 2014년에는 신청제로 바뀌었다. 2015년에는 교장구씨이 바뀌면서 대격변이 일어나, 전체적인 시스템이 엄격하게 바뀌었다. 게다가 지문인식 시스템까지 도입이 되었다.지문도 복제가 되는데?

6.8 운동장 및 체육시설

학교 운동장이 묘하게 사다리꼴 비스무리해서 축구할 때 경계를 잡기가 애매하다. 현재는 육상트랙이 깔리면서 더더욱 애매해졌다(...) 게다가 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만큼 운동장은 항상 비좁다. 옆에 있는 세륜초등학교 부지를 사면 안되냐는 말이 나올 정도... 100주년 기념관이 지어지면서 농구코트가 운동장으로 옮겨가며 더 좁아졌다.

교정 옆에 실내 체육관이 있다. 이 역시 초창기 송파구 이전 때에는 몇 없던 훌륭한 시설이었으나 이제는 낡기도 낡았고(...) 대부분 체육관이 있는터라... 체육관에서는 농구나 배구 수업, 그리고 지하던전에서는 유도 수업이 이뤄진다. 운동부를 위한 체력단련실웨이트 기구가 한가득과 샤워실도 있다.

체육관 뒤편에는 테니스 코트도 있다.

6.9 기타 시설 및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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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 일주문이 있는데, 개교 때부터 함께해온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원래는 교사에 딸린 작은 건물로 수송동에서 지어졌고 이후 혜화동으로 옮겨져 양호실로 쓰다가 오륜동으로 이전할 때 벽을 헐어내고 일주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잘 모르고 지나친다. 이 문 앞에는 전통관이라고 일종의 학교 박물관이 있는데 특별한 날 빼고는 개방을 하지 않아서 학생들은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졸업하는 경우가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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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동장 위에 종각도 있다. 개교 80주년에 혜화동 교정에 지었는데 1989년 오륜동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이전되었다. 종에는 3.1운동 정신을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개교기념식이나 3.1절 기념식에 이 종을 친다. 이걸로 쉬는 시간 타종을 한다면...
  • 중학교 쪽에는 설립자인 충숙공 이용익 선생의 흉상이, 고등학교 쪽에는 현 재단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 선생의 전신상이 있다.[29] 학교 설립자는 왜 전신상이 아니고 흉상일까
  • 교정에 시비(詩碑)가 4개 있는데, 모두 이 학교 출신 시인들의 시가 새겨져 있다.[30] 한 때 시비가 있는 유일한 고등학교라고 학교에서 내세웠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학교에서 캐치프레이즈 같은 걸 내세운 건 아니고 그냥 교사들이 이야기해 주는 정도일 텐데, 송파구 내에 존재하는 시비들은 이 학교에 있는 것들 뿐이라는 수준의 이야기였다.

7 교육

유도부가 있고, 교기(校技)인지라 모든 1학년생들은 1주일, 1교시 동안 의무적으로 유도를 해야한다. [31] 근데 그것도 1주일에 한번밖에 없다. 뭐지?
2016년 현재는 유도가 사라졌고 1학년도 체육을 배운다.
(일주일에 유도 1교시 체육1교시씩 들어있다.)

제2외국어 과목으로 한문, 중국어, 일본어가 있으며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갈때는 계열과 제 2 외국어 선택을 해야 반 배정을 받을 수 있다. 일본어반에는 오덕이 많을 가능성이 높다 이과 한문 반은 전통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경향이 있다. 제2외국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DSD반인데, 2010년 학교에 처음 설치됐고, 1학년 때 부터 일주일에 10시간씩(형편상 실제로 10시간을 채우지는 못한다.) 독일어를 배우는데, 3년 간 꾸준히, 열심히 배우면 졸업할 때 독일어와 영어실력이 비슷해지는광경을 볼 수 있다. 개설 후 처음 몇 해 까지만 해도 1학년 때 독일어 반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입학하는 편이었으나, 점차 면학분위기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평이 나오기도 한다. 2학년에 진학하면서 대부분이 탈퇴를 하는 바람에 절반 가량으로 인원이 줄고 3학년이 되면 하는 학생이 손에 꼽힐 정도이다. 몇몇 학생들은 학교에서 홍보한 대로 독일 대학으로 진학하거나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한다. 개설 첫 해에 Ivo Roesel 이라는 원어민 교사가 왔으나 3-4년 후 독일로 돌아가셨고, 이후 짧게는 한 학기, 길게는 1년 정도 돌아가면서 한국인 교사와 원어민 교사가 바뀌는데, 학생 학부모들과 불협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오가기도 한다.

3학년 이과는 전통적으로 화학 II 필수에 물리 II 와 생명 II 중 택1을 하며 대체로 생명 II 반이 압도적으로 많이 개설된다. 물리 II 반에 상위권 학생들이 몰리는 것 또한 전통이라면 전통인데 상술한 한문반의 경우와 비슷한 맥락이다. 한 해에 서울대에 진학하는 학생이 3-4명이 물리반 한 반에서 나오는 일도 부지기수다. 일부 선생님들은 생명과학2 반에 진학하는 학생들과 달리 물리2반에 진학한 학생들 중 상위권 학생들은 공대와 자연대에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얘기하시곤 하는데, 늘 몇 명씩은 의대에 진학해왔고 심한 해에는 연세대 의예과와 서울대 공과대학에 복수합격한 두 명의 학생이 모두 연세대 의예과에 진학하는 일도 있었다. 지구과학 II 반은 개설된 적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문서가 작성된 시점 기준으로 몇 년간 설치된 적이 없다. 과탐을 3과목, 4과목 보던 시절에는 지구과학도 나름 인지도가 있는 과목 이었지만 2과목 선택제도로 바뀌면서 화학과 생물에 밀려 비교적 인지도가 낮아졌다.

3학년 문과반은 교육과정에 따라 다르다. 2005년~2009년 시기[32] 윤리와 사상 사회문화 한문 필수에 한국지리 세계사 중 댁1을 해야했다. 제2외국어는 일본어와 독일어를 배웠다. 전통적으로 제2외국어는 일본어반이 많고 독일어반은 소수다.[33] 3학년 반은 한국지리 일본어&독일어반이 문과 6개반중4반 세계사 일본어&독일어반이 2반정도 였다고 한다. 사탐 4개를 볼때라 최상위권중 윤리와 사상 국사 한국지리 사회문화 그리고 제2외국어 를 선택하는 비율이 높았고, 국사 한국근현대사 세계사 3역사 놈들도 있었단다(...) 한국지리 경제지리 세계지리 3지리도... 경제 법과정치 사회문화 같은 조합도... 그만해 미친놈아 교육 과정이 변화함에 따라 선택 2개와 간혹 제2외국어를 선택했다고 한다. 오래된 소식이니 최신상태로 동문 들의 추가 바람.

보성고등학교가 송파구에 있는 타고등학교에 비해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것은 학교의 도움이라기 보다는 애초에 인풋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근처의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가 물적, 교양적 수준이 상당한데, 어려서 부터 해당 아파트가 자리한 동네에서 자라온 아이들 중 일반고에 진학하는 아이들 거의 전부가 보성고에 진학하는 편이며 학구열이 높은 타지역 거주 동네 학생들도 보성고에 오기 위해 위장전입을하는 등 (고교선택제 실시 이전) 갖가지 노력으로 보성고에 입학하려고 한다. 한편 단순 지리적 위치때문에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도 상당수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대학 입시 실적이 저조해지고 있다. 입시에서 수시의 중요성이 점점 커져가고 있고 적극적으로 시스템을 혁신한 송파구 내의 일부 학교들은 2015년 입시에서 여태껏 이루어내지 못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보성고 역시 적극적인 혁신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성고 입학을 재고하는 것은 금물. 이 글을 보는 당신이 대학을 잘가면 되는 것이다! 남들이 다 떨어져도 본인만 붙으면 되는거 아닌가? 학교 시스템이 아무리 개판이여도, 학생 본인이 적극적으로 달려들면 항상 길은 열려있다. 송파 내 고등학교 TOP 5에 무난히 들어가는 학교이다. 전국 단위 자사고나 특목고에 갈 수 있는게 아니라면, 보성고가 그나마 가장 나은 대안이다.

상위권 학생들을 따로 모아 보아반이라는 이름으로 생기부와 학습 관리를 해준다. 개교 100주년인 2006년 신학기 즈음 Posung Academy Class, 약칭 보아반 이라고 하여 처음 도입[34].흡사 신분제 고1때부터 학생부종합전형 등에 필요한 자기소개서 작성법을 배우고 직접 써보는 시간을 가지며, 창의체험활동으로서 가치가 있는 R&E 연구 활동도 참여할 수 있다. 연사들이 학교에 찾아와 강연을 하면 보아반 학생들을 의무적으로 참여시키고, 보아반 학생들에게 독서실 고정석과 연간 플래너 제공 등의 혜택도 주어진다. 고1 2학기가 끝나고 찾아오는 겨울방학마다 1학년 보아반 학생들은 일본으로 단체여행을 간다. 명시적 목적은 당연히 학구적인 성취를 얻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그리고 Party Time!!! 고2 올라가서야 보아반이 되는 학생들은 부들부들

보아반에 들어가려면 중간고사 30% 기말고사 30% 모의고사 40% 비율로 산출되는 점수가 일정 등수 이내에 들어야 한다. (보아반 등수는 내신과 모의고사 두개를 같이 평가해서 산출하기 때문에 단일 내신등수, 단일 모의고사 등수와 다르다.) 매년 약간의 변동이 있을수 있지만 전교생 중에서 10% 정도가 보아반이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고1의 경우에는 국어, 영어, 수학만 반영이 되고 고2부터는 국어, 영어, 수학, 탐구(이과는 과탐, 문과는 사탐)이 반영 된다. 모의고사의 경우 표준점수를 기준으로 평가 하기 때문에 탐구 과목을 잘보면 들어가기에 유리한 구조이다. 고2 모의고사 까지는 탐구 공부가 제대로 안 된 학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게다가 갓수생도 없지 고3 올라가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표준점수가 뜨는 경우가 태반이다. 사실 이 현상은 국영수에서도 벌어지지만, 탐구 만큼 표준점수 폭이 심하지는 않다. 2015 고2 9월 학평 영어 만점 표점이 150이 떠버려서 이례적인 케이스가 생기긴했다. 전국에서 고작 200명 가량이 받은 표준점수

2015년에는 학교에 흥미를 영 못 붙이는 학생들을 모아 '챔피언반' 이라는 것을 개설하여 학교에 대한 흥미와 진취적 욕구를 길러주기 위해 다양한 수업과 활동을 진행했다. 챔피언! 소리 지르는 네가! 챔피언! 공부에 미치는 내가! 그만해미친놈아

7.1 유도부

추가 바람

7.2 아이스하키부

추가 바람

7.3 야구부

구한말 보성중학시절부터 창단되었던 유서깊은 야구부였다. 학교 위치를 현재로 옮겨온 1989년에 해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보성고등학교 야구부 항목 참조.

8 출신 인물

역사가 매우 오래된 학교답게 다방면에서 많은 동문들을 배출했다. 특히 문화예술계가 두드러지며 염상섭, 이상, 현진건, 조정래, 김기림, 조세희같은 한국 문단을 이끈 기라성 같은 동문들을 많이 배출했다.

가나다순으로 정렬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저명성 있는 인물만 기록 가능합니다.

추가바람

9 주요 행사

  • 5대 사립 축제
    배재고, 보성고, 양정고, 중앙고, 휘문고[51] 다섯 학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행사로 1977년부터 1998년까지 총 12회 열렸다가 잠시 중단되었고 2011년부터 다시 열리고 있다. 2015년에는 제 1회 High5 Festival이란 이름으로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렸다. 음악회, UCC 경연대회, 체육회 등을 한다. 위의 다섯 학교들 모두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학교들[52]이다. 2015년 5대사립축제에 참가한 학생들이 와이파이로 특정 학교를 비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53]
  • POSUNG FESTIVAL
    다른 학교들처럼 딱히 이름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1990년까지 보성제, 2000년까지 보성 개교 ○○주년 기념축제라고 하다가 2000년대에는 보성 개교 ○○주년 기념축제, 보성축제, POSUNG FESTIVAL이 혼용되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POSUNG FESTIVAL로 부르는 걸로 굳혀진듯 하다. 학생들도 사실 어떤 명칭을 쓸지 몰라서 그냥 축제라고만 한다.
    오전에 개교기념식이 끝나고 바로 본교생들은 보성의 낮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동아리별 부스활동을 하다가 해질녘에 강당에서 보성의 밤 공연을 진행한다. 보성의 밤 공연을 보기 위해 타 학교 학생들이 많이 오는데 강당 앞에서 운동장까지 길게 줄을 서서 대기한다. 공연이 시작하고도 못 들어간[54] 수많은 사람들이 강당 앞에서 월드워Z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예전에는 연예인이나 가수가 왔지만 이제는 오지 않는다.
  • 휘보전/보휘전
    배양전, 양배전처럼 휘문고와 1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갖는 친선 축구경기가 있는데 휘보전, 보휘전으로 불린다.[55] 나름 정식적인 심판진을 갖추고 하는 아마추어 경기치고는 수준 높은 경기로 전반전 30분은 1학년끼리, 후반전 30분은 2학년끼리 맞붙으며 전후반 동안 나온 골의 총 합계로 승패가 결정된다. 상대 전적은 2015년까지 3승 3무 4패로 휘문고가 근소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번외경기로 교사들간의 경기가 있다.양측 모두 교사들이 나이가 들어 페지하자는 말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 삼일절 행사
    100년 역사를 자랑하고 만세 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학교다 보니 삼일절을 상당히 잘 챙기는 편이다. 실제로는 삼일절이 공휴일이므로 다른 날 하기는 하지만. 삼일절 행사 때는 길고 긴 교장 교감 이사장 연설과 타종타종은 더 길다!을 포함하는 행사와, 학기 초 선후배 간 인사를 하는 식을 진행한다. 운동장에 세워놓고 진행하는거라 다들 굉장히 따분해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반대로 줄 세워놓고 계속 돌아다니시면서 줄 단속을 하시지만 딴짓할 놈들은 다 한다.

10 트리비아

국보급 문화재들로 유명한 간송미술관의 설립자 간송 전형필의 인수 이후로 지금까지 전형필의 후손들이 재단을 운영해오고 있는데 현 이사장인 전성우 박사(1934~)의 경우 1971~91까지 직접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전성우 본인이 예술가 출신이기도 해서인지 7~80년대 다른 고등학교에 비해 상당히 널널한 분위기의 학풍이었던 걸로 유명했다고.[56] 또한 경복고, 휘문고와 함께 재벌들이 주로 나온 학교로 유명하다.[57]

혜화동의 옛 보성고등학교 자리의 반은 서울과학고등학교가, 반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차지하고 있다. 88년 올림픽 직후 올림픽선수촌아파트 모서리에 부지가 남았는데, 원래 혜화동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현재 오륜동 교정 부지에 들어설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올림픽선수촌아파트의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그 자리에 학교를 짓기로 했고 때마침 도심공동화로 인해 학생수가 줄어들던 보성고와 부지를 맞교환하기로 한 것.[58] 이전할 때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통학거리가 갑자기 늘어나버렸다. 유명한 동문 중 이 때 피 본게 신해철. 정확히 이야기하면 당시 고3으로 올라가던 71년생부터 이전된 방이동 학교로 다니게 되었다. 신해철 동문은 68년생이므로 혜화동에서 졸업. 이전 당시 고2였던 72년생들은 졸업할때까지 학교에서 제공하는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고1(73년생)부터는 인근 지역 학생들로 모집.
여담으로 88년도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후 신해철 동문은 무한궤도 멤버와 함께 방이동 학교로 선생님들에게 인사 차 방문했다. (학교 전체가 난리 났다는 후문)

유명한 한글학자 주시경이 교편을 잡았던 적이 있다.

전통적으로 서울 내에서 휘문, 중앙, 양정, 배재와 함께 5대 사립으로 묶이던 학교였다. 이후 송파구로 이동하면서 당시 한창 새아파트로 올림픽선수촌아파트로 주가를 올리던 중이라 동네가 부촌으로 각광받아 한 때 입시실적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지금은 8학군과 자율형사립고[59] 등의 부각으로 비교적 입시실적에서 주춤한 상태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비강남권 및 송파구에서는 최고의 입학실적을 내고있다.[60]

운동부는 역사가 오래된 사립학교치고는 짧은 편이나 유도부와 아이스하키부는 전국 톱 클래스의 성적을 자랑하며, 특히 유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유도부 중 하나라고 봐도 될 정도. 2000년대 이후 올림픽아시안게임에서 동문들이 잇달아 금메달을 가져오며 위상을 높이고 있다. 과거 야구부도 운영한 적이 있었으나 이렇다 할 성적은 내지 못하고 1989년 해체. 과거 OB 베어스에서 활약했던 교타자 김종석이 이곳 출신.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인공 김현수[61]가 정문고[62]로 전학가기전에 다녔던 학교가 바로 이곳이다.

보성중학교와 같은 건물이기 때문에 다른 특목고를 가거나 이사를 하지 않는 이상 보성중학교 학생들은 대부분의 경우 보성고등학교로 배정받게 되는데, 보성중학교에도 유도부, 아이스하키부가 있어 아래 성적을 깔아주기 때문에 보통 학생들은 성적 미달로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할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아래 성적을 깔아준 운동부들은 보성고에서 스카우트 형식으로 입학을 시켜버려서 고등학교 못가는 일은 없다고(…) 그래도 일반 학생들 중에선 해마다 공부를 아예 안 해서 못 가는 학생들은 한 두명씩 나온다

전통적으로 야자가 없다. 가끔 대학 가면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자기 야자할 때 얘기하다가 강제 야자가 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열폭하기도 한다.(...) 물론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게 돌려보낸다거나 하는건 아니고, 공부하고 싶으면 도서관 옆 독서실에서 자리 맡고 공부하면 된다. 고삼쯤 되면 방학 때도 나와서 공부하게 된다. 물론 돈 안 내고 가는 독서실인만큼 여럿이 와서 떠드는 애들이 있을 수도 있음은 감안해야 한다. 상술했듯이 2015년 부터는 돈을 꽤 들여서 지문인식 시스템을 도입하고 졸업생 선배들이 멘토로 찾오게 하여 학생들의 공부를 돕게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이때 몇 백석 가량의 자리를 고정석으로 만들어 신청을 하지 않은 학생은 이용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 보아반 학생들에게 야자를 강제했는데, 이에 반발한 많은 학생들이 보아반을 탈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닐땐 이게 굉장한 축복이라는걸 잘 모르지만, 대학 가서 다른 애들 야자한 썰 듣고 있으면 학교에 대한 애교심이 쑥쑥 솟아난다. 얘들아 힘내!
2015년을 기점으로 구**,박**선생님의 급진 정책으로 수천 만원을 들여 지하철 개찰구를 빙자한 지문 인식기 2대를 야심차게 설치했으나, 학생들의 찰진 발길질로 고장이 나고 현재 지문 인식기 회사가 망해 고치지도 못하고 있다...

보아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여럿 있다. 학부모들이 일반 학생들에게도 그런 몇몇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주자고 몇 번 건의했으나, 아직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2010년 정도[63]간송미술관의 일부를 식당이 이전하면서 빈 학교 지하에 이전하는 계획안이 나왔다고 한다!!! 물론 이 기획안은 취소되었다.남고에 박물관이라니 혼파망

언덕을 깎아 만든 학교로, 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는 만큼 봄, 가을에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산에서 내려오는 쥐, 벌 등으로 인해 수업시간을 날려먹는건 덤.

선생님들 중에 보성고를 졸업하고 사범대에 진학하거나 일반과에서 교직이수를 한 뒤 다시 보성고에서 교편을 잡는 분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심지어는 어떤 선생님의 제자가 위의 루트를 거쳐 후배 선생님으로 오는 경우까지 있다. 보성고가 전통있는 사학이라 가능한 일.

2007년에 유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강연을 하러 왔었으며[64], 2009년에는 '마시멜로 이야기'의 저자인 호아킴 데 포사다가 강연을 왔었다.[65]

2016년, 별을 단 동문이 강연을 왔었는데, 강연 대상이 하필 수능 끝난 고3이었다.[66]

선생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3층 추락 얘기가 있다. 혈기왕성한 남고생이라 그런지 점심 시간에 어떻게든 빨리 가려고 4교시 선생님에게 조르거나 5분 전 크라우칭을 하는 등 난리도 아닌데, 2013년 어느 고3이 랩 타임을 줄여보려고(...) 3층에서 뛰어내렸다가 다리가 나가서 6월 모의고사를 못 쳤다는 이야기다. 어이가 없는 얘기지만 예전에 근처 학교까지 널리 소문이 퍼졌고 지금도 구글 연관검색어로 뜬다.
이것은 SNS에서 조작된 이야기다.
보성고는 각 창문마다 창문 위에 시멘트로 된 작은 처마가 있는데, 친구들끼리 장난을 치다가 한 친구의 가방을 아랫층 처마 위에 놓아서 가방의 주인이 가방을 가져오려고 아랫층 처마로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급식을 빨리 먹으려고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는 사실무근. 바리에이션으로 누가 창문 바깥으로 나가 장난을 치다가 추락사하는 바람에 지금처럼 고등학교 건물 창문에 나가지 못하도록 쇠창살을 3개씩 박아놨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10여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2001년 4월, 4층 1학년동 교실이었다.[67] 좌우지간 학생들은 실내에서 뛰어다니거나 지나친 장난은 금하는게 좋다.

군대의 수양록에 맞먹는 정신교육 교재가 있다. 1학년은 보성인, 2학년은 한국인, 3학년은 세계인이라는 제목의 책을 받는다. 내용과 형식은 모두 수양록과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의도는 좋지만 학생들을 괴롭히는 교재였다. HR 시간에 할 게 없으면 이걸 쓰라고 하니... 교재는 학기가 어느 정도 지나면 수거했다가 돌려주는데, 독후감을 잘 쓰면 상을 주었다.

동문들의 추가 바람.
  1. 이 사진에서 보이는 곳은 대부분 보성중학교가 쓰고 있으며 정작 이 사진 속 보성고등학교에서 쓰는 곳은 둥그런 모양의 건물과 앞으로 돌출된 ㄷ자 모양 건물의 절반이고 나머지 보성고 교실들이 있는 곳은 이 사진에서 잘린 교사 동편에 있다.
  2. 개교 100주년 기념 현수막이 걸린 건물 부분은 '학급'으로 사용되는 교실이 없으며, 왼쪽에 있는 건물은 보성중학교 건물이다. 정작 짤린 오른쪽 부분에 고등학교 학급으로 사용되는 교실들이 있다.(...)
  3. 왼쪽이 정식교표, 오른쪽은 간소화한 휘장. 학교 깃발에는 간소화한 휘장이 들어가 있다.
  4. 학교를 세워 나라를 버틴다는 뜻으로 설립자 이용익 선생의 교육으로 나라를 일으킨다는 생각이 여기에 담겨있다
  5. 목련이 교정에 많이 심어져 있어 봄에는 교정이 하얀 목련잎으로 물들어 보기가 좋다
  6. 또 목련이 완전하게 개화하면 목련제라는 축제를 한다.물론 학생들과는 아무 상관 없다
  7. 역사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고종이 하사한 이름이다.
  8. 이 재단은 1928년 훗날 동국대학교가 되는 불교전수학교를 개교하였고 보성중학교는 1935년까지 동국대학교와 같은 재단이었던 것이다.
  9.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 인수했고 보성고보는 고계학원 산하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산하에 남고, 보성전문은 중앙학원(현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소유로 바뀐다.
  10. 학제 상으로는 이 때 보성중과 보성고가 분리되었다.
  11. 그래서 고려대 교표에는 1905란 숫자가 쓰여져있고 보성고는 1906년을 개교년도로 하고 있다
  12. 현재 학제 상의 중학교와는 당연히 다르다.
  13. 현재의 보성고등학교
  14. 현재의 보성중학교
  15.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김성수는 정작 보성이란 이름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16. 휘문고의 교가도 이 사람이 작곡. 악보를 잘 보면 보성고와 휘문고의 교가가 표절 수준으로 비슷하다! 때문에 보성고에서는 교가가 휘문고 교가를 베껴서 그렇다는 썰도 돌았다. 보성고 교가의 멜로디를 좀 더 빨리 재생하면 휘문고 교가와 거의 똑같아진다. 개교연도도 같은 쌍둥이학교
  17. 보성고와 휘문고의 동복상의도 상당히 비슷하다. 넥타이 무늬와 상의자켓 스타일은 비슷. 바지는 다르다.
  18. 원래는 한세기 대신 70년이었으나 개교 100주년을 맞이할 즈음 한세기로 개사되었다. 한 때는 '일백년'으로 개사하던 때도 있었다.
  19. 원래 이것도 이만명이었다가 졸업생이 늘어나면서 사만명으로 바뀌었다.
  20. 이것도 개교 100주년 즈음 반세기에서 한세기로 개사
  21. 사거리의 한 직각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22. 정확히 말하면 올림픽공원 부지 내 한국체육대학교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
  23. 보성중고등학교 정류장 미경유
  24. 방이동 바로 옆이라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보성고까지 바로 오는 버스가 없다. 서울 버스 3413제2롯데월드까지 올라갔다 오륜동으로 향하고, 서울 버스 3319은 보성고에 내려주지 않고 올림픽공원역에 내려준다. 그것만으로도 어디냐
  25. 동문인 전 현대자동차 회장 故정세영씨의 지원으로 현대건설이 준공을 맡았다
  26. 당시에는 현대적 건축양식이라고 잡지에도 실렸다고 하나 자세한 내용은 확인바람.
  27. 트리비아 항목 참조,보성 아카데미반의 줄임말
  28. 밤에는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출석체크 및 관리감독을 한다.
  29. 선생 동상의 다리가 너무 짧아보인다고 부인이 싫어했다고 한다.
  30. 급식실에서 중학교 건물 쪽으로 올라오는 길에 있는 것은 무려 이상(작가)의 것이다.
  31. 유도부가 있는 계성고 같은 타 학교에서도 유도 시간이 의무로 주어진 학교들이 많다.
  32. 정확한것은 아니지만 당시 졸업생들의 증언
  33. 현재는 어떤지 추가바람
  34. PCA! 는 아니고... 학교에서 명칭은 저렇게 정했으나, 당시 재학생들이나 선생님들도 보아반으로 호명하였다고...
  35. 수능 모의고사, 문제지에 자주 등장하여 익숙할 시 '바다와 나비'의 저자. '바다와 나비'는 이 학교 내에 시비가 세워져 있어 정문에서 등교하는 1학년들은 매일 아침 마주하게 된다.
  36. '세시봉'으로 유명한 그 사람이다.
  37. 그 도올 맞다
  38. 현 뉴데일리 고문, 내부자들(영화) 이강희 논설주간의 모티브로 추정
  39. 두산그룹 박용성회장의 차남
  40. 두산그룹 박용성회장의 장남
  41. 한국석유공사 사장
  42. 옛날엔 가수하겠다고 했다가 선생님들한테 엄청 까였다는 말이있다. 그래서 유명 가수가 된 후 선생님들이 모교로 초대하셨을 땐 "그땐 무지 깠으면서 이제 와서 부르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교사들의 평은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학교와 서로간에 사이가 좋지 않은 듯. 정확한 사실 추가바람.
  43. 참고로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
  44. 이병철의 차남
  45. 삼영산업 회장
  46. 정주영의 동생
  47. 정주영의 아들이자 현정은 현대 회장의 남편.
  48. 이 사람도 전라남도 보성에서 산 적이 있으며, 심지어 이 사람이 쓴 소설에도 보성군이 나온다(...).
  49. 동기인 故 신해철과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신해철이 대학 시절 결성한 밴드 무한궤도 멤버로도 활동했었다.
  50. 쌍화점, 미녀는 괴로워의 그 주진모가 아니다
  51. 전부 남고.(...)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남학교 5개가 모여있어서 그런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땀냄새가 진동한다
  52. 배재고는 1885년, 보성고는 1906년, 양정고는 1905년, 중앙고는 1908년, 휘문고는 1906년 개교했다.
  53. 자사고 미만잡, 일반고랑 대학 보내는 성적 똑같은 자사고...등등...
  54. 강당이 타학교에 비해 매우 좁아 평상시에 본교생도 절반 밖에 못 들어가는데 외부인까지 몰려있으니... 게다가 강당이 계단식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서서 보다간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축제 시작하고도 2~3시간 기다렸다 들어가는건 예삿일
  55. 개최 학교명의 앞글자를 뒤에 넣는다. 홀수 해에는 휘문고에서, 짝수 해에는 보성고에서 개최를 하기 때문에 홀수 해는 보휘전, 홀수 해는 휘보전이라고 불린다.
  56. 까까머리가 기본이던 80년대 이전에도 두발규제에 대한 내부규정이 없었던 걸로 유명하다. 물론 당시 사회분위기상 고등학생이 머리를 성인처럼 기르는건 불가능했지만.
  57. 당시 부촌으로 통했던 성북동과 가까운 혜화동에 있었으며 혜화동 또한 1980년까지는 부촌으로 통했다. 장면#s-2박사 가옥이 거기 있다.
  58. 서울 4대문 안의 많은 사립학교들이 도심공동화로 1980년대에 강남권으로 이전했다. 그 분위기를 따른 것. 공립학교는 70년대에 먼저 이전
  59. 지역안배 등의 이유로 주변에 보인고가 자사고가 되면서 탈락하였다.자사고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도 있다.
  60. 사실 8학군의 부각 또한 강북 도심부의 유명 고교의 8학군 이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3대 공립중 경기, 서울, 5대 사립중 휘문고가 8학군지역으로 이전했다.
  61. 권상우 분
  62. 이 학교의 모티브는 상문고이다.
  63. 정확한 시기 추가바람.
  64. 100년된 민족사학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 학교를 골랐다고 한다.
  65. 앨빈 토플러가 강연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골랐다고 한다.(...)
  66. 즉 16년도 졸업생, 15년에 고3이었던 학생들이 청강한 것.
  67. 시험이 끝나고 정답을 맞춘 후 학생들이 웅성웅성 거리며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분위기에 취한 학생들은 "시험 망쳤어" "죽어버릴꺼야" 라고 장난으로 소리지르며 교실을 뛰어다녔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창문에 올라갔다가 비가와서 젖은 난간에 미끄러지며 사고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