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은 鄭日祐로 배우 정일우와는 한자가 다르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부로, 원래 이름은 존 빈센트 데일리(John Vincent Daly)이며 1998년 대한민국으로 귀화했다. 세례명은 사도 요한.
정일우 신부는 지난 1960년 9월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후 1963년 실습이 끝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4년 뒤 고등학교 은사인 고(故) 바실 프라이스 신부(2004년 선종)의 영향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강대학교 설립의 주역인 프라이스 신부는 1966년 국내 최초로 노동문제 연구소를 열어 34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노조 활동, 단체교섭 방법 등을 가르친 국내 노동운동의 선구자이다.
정 신부는 프라이스 신부와 함께 서강대에서 강의하던 1972년 학생들이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간 것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에 눈을 떴다. 이때 정 신부는 "대한아 슬퍼한다. 언론자유 시들어간다."고 쓴 피켓과 상복차림으로 명동에 가셨다가 반정부 시위로 잡혀갔다. 경찰이 "왜 그랬냐?"고 물어보자 정 신부는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가 없고 죽어간다." 라고 하셨다. 이에 경찰이 "아니요, 한국에는 얼마든지 언론자유가 있어요." 라고 말하니 신부님이 말하시길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나요."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비참하게 살아가는 빈민들의 삶을 접한 뒤 청계천과 양평동 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빈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제정구를 만나 일생의 동지가 되었다. 빈민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의식 교육을 하고 판자촌 철거 반대 시위를 주도하면서 빈민의 '정신적 아버지'로 자리잡았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곳곳에서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상계동과 목동 등지에서 철거민을 도왔고 이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팔았다.
1998년 귀화한 뒤 충청북도 괴산군에 농촌 청년 자립을 돕기 위한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농촌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정일우 신부는 1986년에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고(故) 제정구 전 의원과 공동 수상했다.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이름없이 남들을 도우다 2014년 6월 2일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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