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Nobel Prize
1 개요
(유산에서 발생하는) 이자는 다섯 등분하여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화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이나 개발을 한 사람,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문학 분야에서 이상주의적인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국가간의 우호와 군대의 폐지 또는 삭감과 평화 회의의 개최 혹은 추진을 위해 가장 헌신한 사람에게 준다.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서 매년 인류의 문명 발달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으로 만들어졌다.
2 탄생 배경
노벨의 형 루드비그 노벨(Ludvig Nobel)이 사망했을 때 한 신문에서 실수로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고 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에 노벨을 '죽음의 상인'이라 지칭했다. 안 그래도 다이너마이트가 군사적으로 이용되는 걸 싫어했던 노벨은 후에 유언으로 유산의 94%(약 440만달러[1])를 기부, 노벨상을 설립하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알프레드 노벨의 재산을 대부분 기부하려하자 친척들[2]이 죽기살기로 반대하며 서로 먹으려고 발악했다. 게다가 노벨은 유언장에서 국적에 상관없이 이 상을 줄 것을 당부했는데, 이것 때문에 세기말의 국수주의에 휩싸여있던 스웨덴 내 여론과 스웨덴 국왕까지도 노벨을 비난했다고 한다. 게다가 평화상 수상을 당시 스웨덴 식민지인 노르웨이에 넘겼으니 더더욱 그럴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언 집행인 랑나르 솔만(Ragnar Sohlman,1870~1948)의 결단으로 노벨의 재산은 안전한 유가증권으로 남게되었고, 지금의 노벨상의 위상을 봤을때 참 훈훈하게 탄생했을것 같은 상이지만 실제로는 참 우여곡절 끝에 탄생된 상이다. 솔만은 상을 제정하며 가진 인터뷰에서 욕을 그리도 많이 먹어보는지 참 재미있더군요라며 노벨의 친척들이 벌인 온갖 방해공작이나 욕설,명예훼손을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노벨상에는 수학상이 빠져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노벨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라는 수학자가 노벨 수학상을 받는 꼴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설, 미타그레플레르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그가 워낙 수학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보니 수상의 공정성이 떨어질까봐 제외했다는 설, 흠모했던 여인이 수학자를 선택하는 바람에 사랑이 쫑나서라는 설 등등. 근데 다 별 근거는 없는 이야기이다(관련 반론). 공학도 출신 실업가였던 노벨이 수학 배워서 어디다 써? 수학은 실용학문이 아니라서 노벨상의 취지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들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수학자들이 위와 같은 소문을 꾸며냈다는 해석도 있다. 수학상은 필즈상과 아벨상이 존재한다.
지질학상과 기상학상 역시 노벨상에서 빠져 있는데, 이들 분야들은 수학의 필즈상이나 아벨상 같이 해당 분야에 노벨상과 동급의 권위를 가진 상이 아예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이 심하다. 특히 지질학은 지구과학의 근본이자 지구의 기원과 역사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물리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 & 의학 등과 수준을 같이하는 중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권위있는 상을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게 나오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의 경우 1968년, 즉 나중에 따로 생긴 상이다. 노벨 경제학상은 노벨재단에서 수상하는 상이 아니므로 노벨 재단에서 상금을 주지는 않는다. 스웨덴 중앙은행 설립 300주년을 기념해 제정한 상이라고 하며, 상의 정식 명칭도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의 축약어를 노벨 경제학상이라고 한다. 노벨이 제정한 것은 아니지만, 노벨상으로 분명하게 인정받고 있다. 그 이유는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에서 경제학상 수상자를 선정하기 때문. 따라서 물리학상, 화학상을 선정하는 절차와 동일하게 진행되며, 수상식에 다른 분야의 수상자들과 함께 참석해 시상 받기 때문이다. 상금도 동일하다. 그리고 노벨상 제정 당시에는 경제학이 체계적인 분과 학문으로 발전하기 전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19세기 기준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시상 초기에는 지금처럼 권위있게 여겨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곧 세계적인 명성을 갖춘 상이 되었다. 상의 수준을 높여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지금의 노벨상을 있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노벨상은 평화상과 문학상을 제외하면 특정한 나라 출신이 더 받기 쉽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사실 문학상이 그나마 낫고, 나머지는 과학 연구 시설, 자금 문제, 홍보 등 여러가지로 제1세계에 속한 출신 인물들이 유리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냉전 기간이었던 1950~1990년 기간 사이에 제2세계(공산권) 인물이 수상한 노벨상과 제1세계 수상을 비교하면 제1세계가 수십 배 많다. 물론 제2세계가 일대일로 비교하면 밀렸던 건 맞겠지만 냉전기로 한정해서 과학기술이 수십 배 차이가 났다고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그나마 평화상이나 문학상은 지역 안배/배려를 하는 경향이 좀 있다. 실제로 동아시아 지역의 문학상의 경우 10년정도 주기로 준다는 속설도 있다. 과학 분야는 그런거 없다. 때문에 과학 분야는 미국이 독보적으로 앞서가고 있고, 서유럽이나 일본 정도에서 국적별로 몇년에 한 두명 정도씩 수상자가 나오는 수준이다.
3 수상 자격
국적은 일체 불문하고 가장 적합한 수상자를 선정한다.
한 상에 대해서 최대 3명에게 수상하고,[3] 생존자만이 수상할 수 있다.[4] 또한 수상자로 결정되고 나서 시상식까지 수상자가 사망한다고 해서 무효처리되진 않지만, 1년 이내에 상을 받지 않으면 수상을 거절한 걸로 간주한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 노벨의학상 수상자 가운데 한 명인 랠프 스타인먼 박사가 수상자 발표 3일 전에 사망한 걸 노벨위원회가 알지 못하고 명단에 올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었으나 수상자 목록은 그대로 유지시키기로 했다. 이유는 수상자 명단에 올리고 내리고 하는 기준은 심사위원회가 수상자가 사망하였음을 인지한 것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즉, 심사가 끝나고 수상자가 결정된 이후 인지는 수상자 변동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판단.#
해마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누가 후보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지만 노벨상 후보는 비공개가 원칙이며, 노벨상 최종후보자가 공개되려면 무조건 50년이 지나야지만 가능하다. 흔히 언론에서 누가 후보라 카더라는 영국의 도박사이트 래드브록스의 배당률을 참고한 것. 래드브록스는 2006년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와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수상을 맞힌 이력이 있다. 2011년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수상이 발표되기 직전 래드브록스에서 그의 배당률이 급격히 떨어져 수상자 정보가 유출됐다는 의혹도 있었으나, 의혹제기 직후 스웨덴 검찰이 수사에 나설 정도로 후보나 수상자 정보에 대해서는 철통보안이 이뤄지고 있다. 참고로 수상 과정에 대한 정보는 수상 이후 50년간 무조건 비공개이며, 50년이 경과했다 하더라도 적합한 심사를 거쳐야 공개할 수 있다.
한국 입장에서 불편한 사례는 러일전쟁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5]
4 시상 분야와 수상자
노벨상 | |||||
물리학상 | 화학상 | 생리의학상 | 문학상 | 평화상 | 경제학상 |
수상자 | 수상자 | 수상자 | 수상자 | 수상자 | 수상자 |
각 항목 참고.
인구당 수상자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이름도 생소한 세인트 루시아. 그 다음은 룩셈부르크, 스위스, 오스트리아 순이다.
유럽의 라이벌인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경제-과학분야 노벨상에서 영국이 거의 3배로 앞서고 있다. 참고로 수학상인 필즈 상은 프랑스가 인구비가 아닌 절대 수로도 2위.
한국 수상자는 2016년 기준으로 2000년 12월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 한 명뿐이다. 여담으로 노벨상 상금은 대한민국 국적자가 받으면 소득세법 시행령 18조 2항에 따라 세금 없이 실수령할 수 있다. 그것도 노벨상이라고 정확하게 적혀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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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상 장소 및 시간
매년 12월 10일, 노벨의 기일에 수상한다. 수상자들은 수상식 몇달 전에 발표된다.
평화상만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수상식이 열리며, 나머지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다.[7]
6 한국에서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
참고로 노벨상 수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주아주 좁은 분야의 응용과학보다는 전 분야에 걸쳐 인류의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의 확장을 더 높게 쳐 주는데, 한국은 기초과학으로의 투자를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수준으로 그 역사가 아주 일천하다. 이런 연구일수록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데, 투자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누적 투자 총액이 크지 않고 결과물도 잘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과학 연구를 할 만한 상황이 된 지가 그나마 1990년대 중후반이고, 학문의 발전 양상을 보면 1세대는 교육 2세대는 연구를 3세대는 세계 수준의 연구를 하는데 한국은 주류 교수들이 2세대~ 2.5세대 정도다. 당연히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 힘들다. 한국은 정부가 수립된지 아직 70년 밖에 되지 않았고, 70년대까지만 해도 의식주의 해결 자체가 고민거리였던 나라이다. 따라서 초기의 한국의 과학자들은 아예 국가안보와 경제 건설에 즉각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양성되고 동원되었다. 그런 기억들을 고스란히 가진 중노년층이 아직은 사회 전반에 있어 많은 영향력을 지니다 보니 당장의 결과에 집착하게 되고, 전반적인 교육 방향도 그런 가시적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학생 육성으로 이루어지는 편이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 필요한 가치관과는 아직 거리가 먼 셈. 한국이 과학 분야의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좀 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여유로운 사고가 먼저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그나마 상술했듯 몇몇 경우에 있어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고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
대한민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공계 및 인문계 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는 한성 손재한 장학회를 설립한 손재한이 있다.
6.1 문학상
이 분야에서는 매년 문학상 후보로 언론에서 주도적으로 설레발만 치면서 고은을 거론하는데, 그 이유로는 한국어권(수상자 없음)/비주류 언어권/동양-한자 문화권 출신자인 점, 그리고 그동안 시인 수상자가 많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 안배 차원에서 수상 가능성이 상당히 높게 쳐주고 있었지만 2011년에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에게 상이 돌아갔고, 2012년에는 중국의 소설가 모옌이 수상하면서 향후 10년 안으로 다시 한자 문화권 작가에게 상이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낮아진데다가 고은의 나이가 2013년 기준 80세로 상당히 고령이기 때문에 수상 가능성이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이건 가까운 시일 내에 받을 수도 있고, 영원히 그림의 떡이 될 수도 있다. 문학상은 과학상과는 달리 돈과 인력을 퍼붓는다고 해서 수상 가능성이 무작정 올라가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훌륭한 문학가가 등장한다면(혹은 재평가된다면) 당장 몇 년 뒤에라도 받을 수 있다. 다만 전 인류에게 도움이 될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가치가 글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한국의 문학 교육을 보면 그런 인재가 발굴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항상 "한국어는 너무나 다양한 표현이 존재해서 외국어로는 한국어의 정수를 맛 볼 수 없다"는 식으로 번역의 문제가 노벨상을 못 받는 주요 이유마냥 묘사되는데, 번역이 영향을 아무런 주지 않는다고 하긴 어렵지만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애초에 한국어 번역을 들먹거리기 전에 한국어와 영어에 모두 능통하면서도 문학적 감각까지 겸비한 전문 번역가를 적극적으로 육성하려는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서 번역 탓을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번역 운운하며 드는 흔한 예시로 한국어의 노랗다, 누렇다, 샛노랗다, 누르스름하다 등은 전부 영어로는 yellow다 하는 식의 말이 있는데, 반대로 따지면 영어의 violet, purple, lilac, magenta 등등은 한국어로는 전부 보라색이다. 이런 식의 비교는 무의미하며, 전체 어휘로 따져봐도 외국어를 좀 배워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한국어가 특별히 다른 언어에 비해 어휘가 더 풍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요 언어에 비하면 어휘가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노벨 문학상은 언어적 기교 따위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온 인류가 공감하고 높게 평가할 만한 문학적 가치가 필요한 것인데, 그 부분에서 한국의 문학이 지금까지 과연 제대로 이루어낸 것이 있는지가 심히 의문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전혀 복잡하거나 화려한 문체가 아님에도 모든 사람에게 전달될 만한 주제 의식이 높게 평가되었기 때문에 상을 받은 것이다. 번역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고 해서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는 작품이라면 그건 애초에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정말 책을 안 읽는다는 점이 문학적 가치가 있는 책의 창작을 어렵게 만들며 그나마 읽는 책마저 그 분야가 거의 대부분 불쏘시개자기계발서나 상업문학, 연애 소설 같은 분야라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담인데 80년대 3S 정책 중 하나로 노벨문학상을 노려 군부 정권 독재에 대한 불만을 덮고 정권 찬양에 쓰고자 당시 한국소설들을 마구잡이로 번역하여 내놓던 적도 있었다. 문제는 이러면서 언론이 엄청 설레발을 떨었기에 김동리 작가는 살아 생전 자신의 소설 사반의 십자가가 노벨문학상에 근접했다느니 뭐니라는 말을 지겹게 듣어서 늘그막에 이걸 비판하기도 했다.
6.2 물리/화학/생리의학상
문학계는 고은 같은 사람이 있어서 추측성 기사를 내 보내는 반면에 과학 쪽은 언론도 별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해서 과학 전문지가 아니고서야 설레발 기사도 거의 없다는 점(...). 한 때 그래핀 분야의 권위자인 김필립 교수가 수상후보로 언급된 적이 있었지만 2010년에 김 교수가 업적을 남긴 그래핀 연구에 두 사람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고, 상을 받은 업적에 노벨상을 다시 줄 가능성은 드물기 때문에 앞으로 새로운 업적을 발견하지 않는 한 현재로선 수상권하곤 거리가 먼 상황이다. [8]
그 다음 후보로는 2014년에는 기능성 메조나노다공성 탄소물질과 제올라이트 분야의 개척자인 유룡 카이스트 교수가 노벨화학상 후보로 오른 적이 있으며, 이 분야는 아직 연구중이고 해당 분야의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는 없어서 현재 수상 가능성은 있다.
CT, MRI, PET 의 대가로 인정받는 조장희 교수도 양전자 단층촬영기(PET)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업적이 있어서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다.
한국인은 아니지만 한국계 출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게 거의 확실시 되었던 물리학자는 핵물리학의 재규격화와 게이지 이론등을 연구한 벤자민. W. 리 (이휘소) 박사가 있다. 미국 국적을 취득한 이후 노벨상 후보로 강력하게 노미네이트 되던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그와 같은 연구를 함께 진행한 스티븐 와인버그나 셸던 그래쇼, 헤라드뤼스 엇호프트 같은 인물이 훗날 해당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보았을 때 리 박사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물리학 발전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 뿐만 아니라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있었을것으로 보아 과학계의 많은 아쉬움을 자아냈다. 애당초 이휘소 박사는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기 때문에 수상했더라도 그게 한국에 있어서 별 의미는 없지만....[9]
그래도 과학에서 수상 가능성은 있어서 몇 년안에 가능한가에 국내 과학자들에게 설문조사에서 6 ~ 10년 안에 조금 많았다. # 그리고 가장 유력한 한국인 후보로 김빛내리 서울대 석좌교수(IBS 연구단장)가 선정됐다.
7 수상 차별 논란
수상자의 국적, 인종, 종교 등으로 차별이 있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는 유럽이나 북미에 몰려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유대인, 독일계, 앵글로색슨계가 유달리 많고, [10] 아시아계나 아프리카계, 이슬람인은 인구에 비해 수상자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인종이나 국가에 따라 교육수준 및 기초과학 육성수준에 차이가 나므로 정말로 수상자 선정과정에서 차별이 있는지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문학상은 어느정도 국적과 사용언어에 따라 불리점이 있다는 데 동의가 있는 편이다. 문학작품의 주목도가 높은 나라에 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서방 국가에서 인지도를 얻기 유리한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가 노벨상 수상 위원회의 인지에 들고 작품성을 평가받기 쉽다는 주장이다. 출판업계에서는 관심이 적은 나라의 작품보다는 많은 나라의 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하려 하고, 번역 작품의 작품성을 잘 살릴 수 있는 유능한 번역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언어 분야에는 적기 때문이다.
8 노벨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사람 및 단체들
- 국제적십자(단체) - 평화상 3회
- 라이너스 폴링 - 화학상, 평화상.[11][12]
- 마리 스쿼도프스카 퀴리 - 물리학상, 화학상[13]
- 존 바딘 - 물리학상 2회
- 프레더릭 생어 - 화학상 2회
- UN 난민기구 - 평화상 2회
9 가족 수상
- 부부
- 피에르 퀴리·마리 퀴리 부부(1903년 물리학상 공동 수상)
- 프레데리크 졸리오 퀴리·이렌 졸리오 퀴리 부부(1935년 화학상 공동 수상) - 위의 퀴리 부부의 사위·딸이다.
- 칼 퍼디낸드 코리·거티 테리사 코리 부부 (1947년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
- 군다르 뮈르달(1974년 노벨 경제학상)와 알바 뮈르달(1982년 노벨 평화상) 부부
- 에드바르드 모세르·마이브리트 모세르 부부(2014년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
- 부자
- 조지프 존 톰슨 (아버지, 1906년 물리학상)과 조지 패짓 톰슨(아들, 1937년 물리학상)
- 윌리엄 헨리 브래그(아버지)와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아들), 1915년 물리학상 공동 수상
- 닐스 보어(아버지, 1922년 물리학상)와 오게 닐스 보어(아들, 1975년 물리학상)
- 칼 만네 예오리 시그반(아버지, 1924년 물리학상)과 카이 만네 뵈리에 시그반(아들, 1981년 물리학상)
- 한스 폰 오일러켈핀 (아버지, 1929년 화학상)과 울프 폰 오일러(아들, 1970년 생리의학상)
- 아서 콘버그(아버지, 1959년 생리의학상), 로저 콘버그(아들, 2006년 화학상)
- 형제
- 얀 틴베르헌(형, 1969년 경제학상), 니콜라스 틴베르헌(동생, 1973년 생리의학상)
10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사람들
- 장폴 사르트르 - 1964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함.
- 레득토 - 북베트남 외교부장. 베트남 전쟁 종전에 기여한 공로로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과 함께 1973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공동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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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1950년에 닥터 지바고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러시아 혁명을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하여 소련 정부와 작가 동맹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면서 수상을 거부함. 하지만 노벨상 주최측에서는 그의 거부를 거부가 아닌 보류로 남겨두었고, 그의 사후 소련에서 닥터 지바고가 출판되고 공적으로 허락받자 그의 아들이 노벨 문학상을 대리수상. 고로 받긴 받았다. -
리처드 파인만 - 유명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수상을 거부하려 했으나 "그런 짓(=노벨상 수상을 거절하는 것)을 하면 더 유명해질걸요."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 받기로 결정했다.
11 예산
아무리 노벨이 많은 돈을 남겼다지만, 상금을 계속 지급하기에 그 예산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노벨재단에서는 노벨의 유산을 토대로 여러 사업[14]을 진행하고 있다. 다행히도 노벨상 위원회는 지속적으로 투자를 하여 지속적으로 상금을 줄 예산을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노벨상 위원회의 투자도 경기 불황을 비켜갈 수 없는지, 1949년에 인당 지급하는 상금을 한번 줄였었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상금을 높여서 인당 140만불(2015년 기준으로 약 16억원)까지 지급했다가 2012년 글로벌 경기 불황으로 다시 인당 110만불(2015년 기준으로 약 13억원)로 줄였다고 한다. 관련 기사
12 패러디
- ↑ 19세기 말에는 엄청난 돈이었다. 2000년대 초반,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당시, 국내 방송에서 현재 값어치를 원화로 추정했더니 약 2,215억 원으로 추정했다.
- ↑ 반평생 넘게 독신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기에 노벨의 직손은 없었다.
- ↑ 어떨 때는 한 업적으로 4명의 수상자가 나오는 바람에 1명이 수상자에서 제외되었을 때 3명이 상금을 나눠서 그 1명에게 주었다고 한다.
- ↑ 이걸 못 받고 사망한 대표적인 사례는 주기율표를 만드는 데 큰 공로를 한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갈리폴리 전투에서 사망한 헨리 귄 제프리스 모즐리. 예외로는 1961년 콩고 내전을 중재하러 가던 도중에 북로디지아(현재 잠비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같은 해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제2대 UN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가 있다.
- ↑ 잘 알다시피 러일전쟁에 뒤따른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을사조약의 조건이 사실상 완비되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얽힐 건 없지만 이것도 한국인 입장에서는...
- ↑ 정확히는 소득세법시행령 제18조 2항 노벨상또는 외국정부·국제기관·국제단체 기타 외국의 단체나 기금으로부터 받는 상의 수상자가 받는 상금과 부상, 국가법령정보센터 출처.
- ↑ 노벨이 살던 당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병합된 상태였기에 노벨 사후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분리되며 평화상만이 노르웨이에서 수상식을 열게 되었다.
- ↑ 이 당시 네이쳐에 김필립교수의 수상실패문제를 비롯해, 보도자료의 허술함등을 신랄하게 디스하는 기고문이 올라왔었다.
한국에서만 논란이 아니다 - ↑ 여담으로 벤자민 리 박사의 죽음에 대해선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호사가들의 대화거리가 되곤 하는데, 한국에서도 다큐멘터리로 다뤄진 적이 있다. 궁금하다면 찾아볼 것.
- ↑ 인종 구분에는 논란이 있어 공식적으로는 정확한 수를 산출하지 않는다.
- ↑ 반핵운동 때문에 당시 매카시즘 광풍이 불고 있던 미국정부에 출국금지조치를 받는 바람에 DNA의 X선 사진을 보지 못했고 DNA의 잘못된 구조를 내놓는 바람에 왓슨-크릭에게 생리의학상을 빼앗겼(?)다. 최상의 시나리오의 경우 3회 수상까지 가능했을지도...
- ↑ 타 복수 수상자와 달리 폴링은 2회 모두 단독 수상했다.
- ↑ 사상 최초로 2번이나 노벨상을 받았다. 남편 피에르 퀴리 역시 1903년에 그녀와 공동으로 물리학상을 받았고, 첫째 딸과 사위는 1935년에 화학상을 받았으며, 둘째 사위는 1965년에 유니세프를 대표하여 평화상을 받았다. 둘째 딸인 이브는 이에 대해 "저는 우리 집안의 수치입니다."라는 농담을 하곤 했는데, 이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 그리고 그녀의 남편까지도 노벨상을 탔는데 자신만 못 탔다는 이유라고. 하지만 이브도 베스트셀러 작가에, 여러 상과 훈장을 받았다. 그야말로 가족들 모두가 능력자
- ↑ 근데 여기에는 무기회사도 있는데, 노벨이 무엇으로 돈을 벌었는지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