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제이슨 앤드류 배리텍 (Jason Andrew Varitek) |
생년월일 | 1972년 4월 11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미시간 주, 로체스터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양타 |
프로입단 | 1994년 시애틀 매리너스 1라운드(14위) 지명 |
소속팀 | 보스턴 레드삭스(1997~2011) |
보스턴 레드삭스 역대 주장 | |||||
짐 라이스 | → | 제이슨 배리텍(2005~2011) | → | 없음 |
1 소개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前 야구 선수.
2 활약상
화려한 경력은 없었지만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2번의 우승반지를 가져다준 정신적지주
2000년대 보스턴 레드삭스의 안방마님, 그리고 CAPTAIN TEK
조지아공대 시절부터 공수를 겸비한 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 포수로 뽑히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93년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트윈스에 1라운드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4년, 포수로는 최초로 아마야구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상인 '골든 스파이크 어워드'를 수상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고, 그 해 드래프트에서 시애틀 매리너스에 1라운드(전체 14위) 지명을 받고 입단한다.
하지만 불과 3년 뒤인 1997년, 시애틀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무리 투수인 히스클리프 슬로컴을 데려오기 위해 배리텍과 데릭 로우를 넘겨주는 트레이드를 단행하는데, 훗날 이 트레이드의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어쨌든 배리텍은 그 해 막바지에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어 잠깐 모습을 드러냈고, 이듬해인 1998시즌,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로 이적한 빌 해슬먼 대신 백업 포수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1999시즌, 팀의 주전 포수였던 스캇 해티버그가 부상을 당하자 곧바로 그 자리를 꿰차며 0.269 20홈런 76타점의 좋은 활약을 펼친다.
그렇게 주전 포수로 자리매김하며 활약을 펼친 배리텍은 2003시즌 0.273, 25홈런 85타점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처음으로 올스타에 뽑혔고, 이듬해인 2004시즌에는 0.296 18홈런 73타점의 활약으로 밤비노의 저주를 깨뜨리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2004시즌 후 FA가 된 배리텍은 보스턴과 4년 4,000만달러에 재계약한다. 팀은 평소 클럽하우스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온 그를 칼 야스트렘스키, 짐 라이스에 이은 보스턴 역사상 세 번째 공식 주장으로 임명하며 유니폼에 '캡틴'을 상징하는 알파벳인 C를 붙여주게 된다.
배리텍은 2005시즌, 0.281 22홈런 70타점으로 실버 슬러거와 골드 글러브를 동시에 차지하며 팀의 기대에 보답했지만 이듬해인 2006시즌에는 데뷔 이후 최악의 타율인 0.238으로 부진했고, 2007시즌에는 0.255 17홈런, 계약 마지막 해인 2008시즌에는 0.220 13홈런으로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시즌 후 배리텍은 최소 2년 이상의 연장 계약을 원했지만 보스턴은 하락세가 뚜렷하게 보이는 37살 포수와의 연장 계약을 부담스러워했고, 그렇게 협상에 난항을 겪다가 결국 2009년 2월, 배리텍은 1년 500만달러의 계약으로 보스턴에 남게 된다.
배리텍은 2009시즌에 0.209 14홈런의 부진한 성적을 남기는데, 이 와중에 팀이 시즌 중에 빅터 마르티네즈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배리텍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시즌 후 보스턴은 500만 달러의 클럽 옵션을 거부했지만 배리텍이 300만 달러의 선수 옵션을 사용하면서 그는 계속 보스턴에 남게 되었으나, 더 이상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2010시즌 39경기 출장에 0.232 7홈런을 기록한 배리텍은 또다시 1년 200만달러에 재계약[1]했고, 2011시즌에는 제로드 살탈라마키아와 마스크를 나눠 쓰며 0.221의 타율에 11홈런을 기록했다.
2012시즌 시작 전에 본인은 현역 유지를 원했으나 팀에서는 마이너계약을 제시하였고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배리텍은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여전히 레드삭스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지도 밝혔고, 살티도 배리텍에게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표현한만큼 레드삭스를 떠날 일은 없어보인다.
3 이모저모
- 1984년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서 결승까지 간적이 있지만 대한민국 서울대표팀에 져 준우승에 머물렀다.그때 당시 서울팀에는 심재학이 있었다.
- 포수 마스크를 쓰며 4번의 노히트게임을 캐치했는데[2], 이는 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레이 샤크와 더불어 메이저리그 타이기록이다.
- 선수 시절 팀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한 동료는 투수 팀 웨이크필드지만 정작 둘이 호흡을 맞춘 경기는 많지 않았는데, 배리텍이 웨이크필드의 너클볼[3]을 받는 걸 힘겨워했기 때문이다. "너클볼을 받는 건 젓가락으로 파리를 잡는 것과 똑같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 때문에 웨이크필드의 등판일에는 배리텍 대신 덕 미라벨리를 비롯한 전담 포수들이 마스크를 썼으며 플레이오프 때 일일이 미라벨리를 올릴 수 없어서 억지로 배리텍이 마스크를 쓸 때마다 모든 이들이 불안에 떨어야 했다.[4]
- 팀에 대한 애정이 매우 강해서, 2004년 FA자격을 얻었을 당시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에게 "보스턴 외의 다른 팀과는 협상도 하지 말라" 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 뉴욕 양키스 팬들의 영웅인 호르헤 포사다와 자주 비교되는데 같은 스위치히터임에도 공격형 포수 vs 수비형 포수라는 차이점과 실질적인 가치에 대한 논쟁으로 과거 왁봑대전의 주요 떡밥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물론 둘다 향후 각자의 팀에서 영구결번에 가까운 대접을 받을 선수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보스턴이 영구결번을 더럽게 안 시켜주는 팀[5]이라 결번이 될지는 미지수.
- ↑ 팀 웨이크필드에게도 적용된 이런 베테랑 연봉 후려치기 전략으로 보스턴은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을지는 몰라도 팬들에게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며, 심지어 뉴욕 양키스의 팬들까지 이들에게 동정을 보냈다. 또한 클럽하우스 내에서도 젊은 선수들이 베테랑의 몸값을 후려치는 프런트의 횡포를 보며 팀 케미스트리가 와해되거나 선수들의 구단에 대한 충성심이 하락하는 원인이 되었고, 대표적으로 2011년 종료 후 조나단 파펠본의 필라델피아 필리스행으로 이 일은 점점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는 보사구팽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금까지 테오 엡스타인을 까는데에 있어 필수요소가 되었다.
- ↑ 2001년 4월 5일 노모 히데오, 2002년 4월 28일 데릭 로우, 2007년 9월 2일 클레이 벅홀츠, 2008년 5월 20일 존 레스터.
- ↑ 아리랑볼이라고 하는데 던지는 투수조차 컨트롤을 잘할수없는 변화구이다. 즉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며, 잘못 던져서 얻어맞으면 홈런을 맞기 쉽상이다. 갑자기 로케이션이 바뀌는 공의 성격상 베리텍의 미트질은 그렇게 준수한편이 되지는 못했다...
- ↑ 실제로 배리텍은 1이닝 3패스트볼로 포스트시즌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웨이크필드가 등판한 경기였다.
- ↑ 기본적으로 누적 성적이 명예의 전당은 갈 급은 되어야지 거의 확실시 된다. 심지어 웨이드 보그스 같은 경우에는 명전 들어가고도 말년에 뉴욕 양키스로 이적을 감행한 것에 따른 괘씸죄로 거의 20년 가까이 물을 먹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