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웨이드 앤서니 보그스 (Wade Anthony Boggs) |
생년월일 | 1958년 6월 15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
포지션 | 3루수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입단 | 1976년 드래프트 7라운드(보스턴 레드삭스) |
소속팀 | 보스턴 레드삭스(1982~1992) 뉴욕 양키스(1993~1997) 탬파베이 데블레이스(1998~1999)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웨이드 보그스 | |
헌액 연도 | 2005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91.9% (1회) |
보스턴 레드삭스의 영구결번 | |||||
1 | 4 | 6 | 8 | 9 | 14 |
보비 도어 | 조 크로닌 | 자니 페스키 | 칼 야스트렘스키 | 테드 윌리엄스 | 짐 라이스 |
26 | 27 | 34 | 42 | 45 | |
웨이드 보그스 | 칼튼 피스크 | 데이비드 오티즈 | 재키 로빈슨 | 페드로 마르티네즈 |
탬파베이 레이스의 영구결번 | ||
12 | 42 | 66 |
웨이드 보그스 | 재키 로빈슨 | 돈 짐머 |
1 개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3루수로 3000안타를 기록한 교타자이자, 출루머신 중 한 명. 원래대로면 가장 많이 뛴 보스턴 레드삭스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라고 써야 하지만 뉴욕 양키스로 자신의 발로 이적한 거의 최초의 선수라는 점에서 꼭 그렇게만은 쓸 수 없고, 하여간 이런 이적으로 인해서도 제법 유명한 선수기도 하다.
통산 성적은 18시즌 동안 타율 .328, 출루율 .415, 장타율 .443, OPS .858, 순장타율 .115, BB/K 1.9, wRC+ 132, 3010안타, 118홈런, 1412타점을 기록했다.
2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태어난 곳은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1]지만, 자란 곳은 탬파다. 미식축구를 즐기는 탬파에서 키커로서 명성을 날렸지만, 정작 야구를 더 좋아해서 1976년 드래프트에서 겨우 7라운드에 지명받았는데도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마이너리그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대단히 박하게 한 것. 이 때문에 데뷔 자체가 나이 24세에 이르러서야 했다.
늦은 데뷔였지만 3루수 자리를 꿰차고 정교한 타격 실력을 앞세워서 명성을 떨쳤다. 데뷔 시즌인 1982년 104경기 출전 타율 .349의 맹타를 휘두르며 AL 신인왕 3위에 오른 뒤[2], 풀타임 주전이 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7년 연속 200안타를 달성해 스즈키 이치로가 깨기 전까지 1900년대 이후 아메리칸리그 최고 연속 200안타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보스턴에서 보낸 1980년대 총 5번[3]의 타격왕을 차지하면서 정교한 교타자로 명성을 떨쳤다. 발이 빠른 편은 아니라서 도루 실력은 거의 없었지만, 대신에 선구안이 뛰어나서 많은 볼넷으로 커버했다. 정교한 타격과 뛰어난 선구안은 6번의 출루율 1위와 출루율 1위 5연패[4]를 안겨줬다. 이 때문에 정교한 타격과 높은 출루율을 바탕으로 팀의 1번 타자 자리를 차지하면서 타격왕 4연패와 다섯 번의 타격왕을 일굴 수 있었다.
1986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아메리칸 리그 우승의 주역이기도 했다. 다만 문제는 이 때도 끝내 빌 버크너의 어이없는 알까기 쇼로 인해 결국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일 뿐. 이 때 보스턴 덕아웃에서 펑펑 우는 그의 사진은 메이저리그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런 아픔은 있었지만, 적어도 1980년대 타격의 교과서 하면 토니 그윈보다는 웨이드 보그스를 더 먼저 꼽았고, 과연 보스턴에서만 뛰며 6번 타격왕에 오른 테드 윌리엄스의 아성을 넘을지가 관건이었다. 1980년대만 따지면 통산 타율이 무려 0.352.[5]
오죽 했으면 재능있는 3루수 거포였던 제프 배그웰을 보스턴이 포기할 정도로 그의 아성은 굳건했다. 하지만, 1990년 들어서면서 부상에 시달리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 사이 1980년대 그보다 뒤쳐졌던 토니 그윈은 더 힘을 내면서 마침내 8번의 타격왕을 차지하게 되지만, 그는 1980년대 이후 단 한 번의 타격왕도 차지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허접했냐면 그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통산 타율도 0.304다. 남들은 한 번 하기 힘든 3할 타율이 통산이다(...)
1992년 그가 0.259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보스턴 레드삭스 수뇌부는 그를 미련없이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 FA가 된 그에게 관심을 보인 팀은 LA 다저스와 뉴욕 양키스. 그는 뉴욕 양키스를 선택했다. 조건이 더 좋았었다.
3 뉴욕 양키스 및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시절
보스턴의 결정은 너무 성급했다. 양키스에서 다시 3할타자로 부활했는데, 특히 수비력이 과거보다 더 상승하면서 마침내 첫 3루수 골드글러브의 영광을 안았다. 첫 수상 자체가 3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 아직도 그보다 더 많은 나이에 첫 골드글러브를 탄 선수는 없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5년에도 골드글러브 수상.
양키스의 주전 3루수로서 1996년 월드 시리즈에서 괜찮은 모습을 선보였다. 승부의 분수령이 된 4차전 연장 10회초에서 결승점이 된 밀어내기를 얻어내면서 특유의 선구안으로 우승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이게 생애 첫 우승 반지.
우승을 하고 뉴욕 경찰의 기마대 말에 타고 엄청 환호하면서 보스턴 팬들에게는 찍혔지만(...) 우승 자체를 너무 좋아하는 것은 당연지사[6].
1997년 나이 39세가 되자 노쇠가 찾아와 부진하기 시작했다. 이 해 두 번째로 3할 타율에 실패하는데, 나이도 많고 부상도 있던 보그스를 굳이 양키스는 잡지 않았고, 그는 마지막으로 3,000안타 도전을 위해 당시 갓 생긴 팀이자 어린 시절을 보낸 탬파베이로 이적했다. 그리고 여기서 210안타를 치면서 3,000안타 돌파에 성공했다. 그가 친 3천번째 안타는 홈런인데, 이는 메이저리그 최초다.[7][8]
그리고 이 경력을 끝으로 화려했던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었다.
4 플레이 스타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선구안이 좋은 교타자다. 전성기인 1980년대에는 그야말로 안타와 볼넷만을 얻는 선수였지만, 점차 나이가 먹으면서 안타 생산 실력은 다소 쇠퇴했다. 하지만 통산 1412볼넷, 745삼진, BB/K 1.90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뛰어난 선구안을 자랑했다. 동시대를 뛰었던 교타자 토니 그윈과 비교되는데 보그스는 1980년대, 그윈은 1990년대가 전성기였으며 도루 실력은 그윈이 더 좋았고[9][10] 타고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한 출루율은 보그스가 더 나았다. 보스턴 시절 6번의 출루율 1위와 5년연속 출루율 1위를 달성했다.[11]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한것은 단 두해[12]로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해도 24개에 그칠정도로 시대를 풍미한 3루수치고는 장타력이 뛰어났다고 보긴 힘들다. 대신 2루타를 많이 치는 스타일이었다. 통산 2루타 개수는 578개. 보스턴 시절 8번이나 40개 이상의 2루타를 달성했고 7년연속 40개 2루타를 달성하기도 했다.
이런 타입이 은근히 팀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에서는 스캇 해티버그의 말을 빌려 보그스의 타격 스타일이 보스턴의 마초적인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아마 팀에서 버림받게 된 것도 장타력이 다소 떨어지는 교타자의 한계를 들먹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적으로 볼 때, 보스턴이 내린 어리석은 결정 중 하나였다고 해도 무방하지만.[13]
화려한 타입의 거포는 아니지만, 정교한 타격과 뛰어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를 주름잡은 타자였다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5 징크스
원래는 이런 부분은 이모저모의 한 항목으로 넣어야 하지만, 웨이드 보그스는 징크스가 화려한 선수라서 따로 항목을 만들었다. 출처는 민훈기 기자의 MLB리포트.
- 저녁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반드시 오후 1시47분에 집을 나선다. 운동장에 갈 때나 집으로 올 때는 반드시 같은 길로만 간다. 사고가 나거나 교통 체증이 있어도 절대 다른 길을 택하지 않는다.
- 오후 4시 47분 전에는 절대 운동장에 발을 들이지 않으며 5시 47분에 운동을 시작하고, 내야 수비 훈련을 할 때면 반드시 150개의 땅볼을 처리하고 훈련을 마친다.
- 수비 훈련을 하러 들어갈 때는 반드시 1루와 2루 베이스를 찍은 후에 3루 자리로 이동한다. 돌아올 때는 3루 베이스-2루 베이스-1루 베이스를 차례로 찍은 후 파울 라인을 밟고 나서 코치 박스 쪽으로 두 걸음을 옮긴 후에 정확히 네 걸음을 디뎌 더그아웃으로 들어간다.
- 일상적인 7시 5분 경기면 6시 47분에 외야에서 달리기로 마지막 몸을 푸는데, 만약 경기가 7시 35분에 시작되면 외야 운동은 7시 17분에 시작한다.
- 경기 시작 전에 12켤레의 배팅 글러브를 모두 착용해보고 그날 가장 마음에 드는 글러브를 선택한다.
- 3루 수비를 위해 운동장으로 달려갈 때는 절대 파울 라인을 밟지 않으며, 수비가 끝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갈 때는 반드시 파울 라인을 밟고 지나간다.
- 투수를 중심으로 야수들이 모이는 경우 절대로 마운드를 밟지 않는다.
- 매 타석에 들어서기 직전에 타석에다 스파이크 징으로 ‘Chai’라고 적는다. 히브루어인 이 단어는 삶(life)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보그스는 유대인이 아니다. 한 마디로 그냥 적는 것.
- 첫 타석에 앞서 껌을 씹는데 만약 안타를 치면 그 껌을 계속 씹지만, 안타를 치지 못하면 곧바로 뱉어 버리고 새 껌을 씹는다.
- 경기 전에는 반드시 닭고기를 먹는다, 요리 방법은 상관없이 닭튀김이든 조림이든 구이이든 반드시 닭고기를 먹는다.[14]
- 경기 전 정신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에 반드시 4타석을 연상하면서 4안타를 쳐내는 상상을 한다.
- 홈 경기 더그아웃에서 야수 포지션으로 이동할 때면 반드시 똑같은 길로만 왕복한다.
- 경기가 시작될 때면 항상 가장 먼저 더그아웃에서 뛰어나와 자기 포지션으로 이동한다.
- 3루에 자리를 잡으면 흙 속에서 3개의 조약돌을 골라 라인 밖으로 던진다. 반드시 3개여야 한다.
이건 일부고... 실제로는 약 80개 가량의 징크스가 있었다고 한다. 선수 본인의 말로는 이 징크스를 신봉하면서 경기의 집중력이 좋아졌다고 한다. 하도 징크스를 믿으니까 토론토 블루제이스 구단은 그를 골탕먹이려고 시계를 바꾼 적도 있었다고 한다. [15]
6 명예의 전당 입성 및 거래 의혹
시카고 컵스의 라인 샌드버그(좌)와 함께 2005년 HoF에 입성한 웨이드 보그스 |
3,000안타 달성 선수고, 1980년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교타자였기 때문에 명예의 전당 입성은 어렵지 않았다. 2005년 투표 첫 해 91.9%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한 번에 입성했다. 여기까지면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문제는 바로 그가 명예의 전당에 어떤 모자를 쓰고 갈지를 두고 의혹이 일어난 것.
선수 생활 말년에 탬파베이로 가면서 그가 영구결번과 현금을 받는 조건으로 명예의 전당 동판에 탬파베이 소속으로 가기로 했다는 의혹이 인 것이다. 실제로 보그스 전까지 명예의 전당은 본인 맘대로 모자를 고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놀란 라이언의 경우, 가장 적게 뛴 텍사스 레인저스의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갔다.[16] 결국 이 의혹 때문에 보그스 이후부터는 명예의 전당 모자 선택은 명예의 전당 위원회의 권고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었다. 이 결정의 첫 케이스가 2010년 헌액자인 안드레 도슨. 가장 오래 뛴 몬트리올 엑스포스 소속으로 들어갔지만, 그의 최전성기는 시카고 컵스였고, 선수 본인도 시카고 컵스 모자를 쓰길 희망했지만, 결국 위원회의 권고로 몬트리올 엑스포스 소속이 되었다.[17]
보그스 자신은 거래설 자체를 일축했고, 3팀 모두 소중한 팀이라면서 선정권을 위원회에 넘겼는데, 이것이 전례가 되었다. 위원회가 선정한 팀은 그의 최전성기를 보낸 보스턴이었고, 그래서 보그스는 명예의 전당에 보스턴 모자를 쓰고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흔히 팀을 위해 10년 이상 뛰었고, 또 그 선수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면 취해주는 영구결번은 보스턴에서 아직 움직임이 없었다.[18] 그렇지 않아도 영구결번에 깐깐한 보스턴이 자발적으로 양키스로 간 선수에게 주지는 않을 듯 했는데[19].... 2015년 12월 21일, 레드삭스에서 보그스의 등번호 26번을 영구결번 처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숙명의 라이벌 양키스로 제 발로 간 선수에게 영구 결번을 준 것은 어찌보면 페드로의 영구결번보다 더 파격적. 보그스의 영구결번식은 2016년 5월 26일에 거행된다.
7 기타 이야기거리
심슨에 출연한 보그스. | 퓨처라마에도 머리만 출연. |
- 마이너리그 시절인 1981년 8시간 25분이 걸린 33회 연장전을 치룬 적이 있었다. 이 때 상대팀의 유격수는 칼 립켄 주니어였다.
- 최고의 너클볼 투수인 필 니크로의 광팬이다. 훗날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선 적이 한 번 있는데, 그 때 너클볼을 던져서 삼진 1개를 기록하며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 이처럼 훌륭한 선수였으나 불륜 스캔들이 있다. 1998년 마고 애덤스라는 여자와의 불륜이 그것. 소문에 따르면 애덤스는 관중석에 앉아 있다가 보그스가 안타를 치면 다리를 벌려 안 쪽을 보여줬다고(...) 김구라가 방송에서 언급한 적도 있다...
- 프로레슬러 故 '미스터 퍼펙트' 커트 헤닉과 대단히 친한 사이였다. 1988년 스포츠 만능 기믹으로 WWE(당시 WWF)에 데뷔한 헤닉의 프로모 비디오에 헤닉의 재능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역할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같이 사냥을 나갔을 때 덫에 걸린 일이 있었는데, 커트 헤닉이 완력으로 덫을 부숴서 구해줬다고 한다.이후 2007년 고인의 WWE 명예의 전당 헌액을 위해 WWE에 재출연하였다. 다른 모 교타자처럼 WWE 측으로부터 스토리라인을 받은 적은 없었다.
- ↑ 워렌 버핏이 사는 그 동네 맞다.
- ↑ 참고로 이 때 AL 신인왕은 칼 립켄 주니어.
- ↑ 1983, 1985, 1986, 1987, 1988
- ↑ 1983, 1985, 1986, 1987, 1988, 1989
- ↑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전성기 7년 동안 그가 쌓은 WAR은 무려 56.0이다. (fWAR, bWAR 모두 56.0)
- ↑ 더구나 86년 월드 시리즈에서 메츠에 패한후 메츠의 우승을 울면서 바라봐야했던 그의 모습을 본 이들이라면 "저럴만 혀."라고 할 수 밖에 없다.
- ↑ 이후 데릭 지터가 3000호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하는 기록을 세운다.
- ↑ 아이러니하게도 NPB 안타 1위이자 이치로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3천안타를 기록한 장훈 선생의 3000안타도 홈런이었다.
- ↑ 그윈은 통산 319도루 125실패, 보그스는 통산 24도루 35실패를 기록했다.
- ↑ 둘 다 중거리형 타자로 장타율은 거의 차이가 없다. 그윈은 통산 20시즌 135홈런 .459의 장타율을, 보그스는 통산 18시즌 118홈런 .443의 장타율을 기록했다.
- ↑ 이 때문에 세이버메트릭스적인 평가에서는 보그스가 그윈을 앞선다.
- ↑ 1987년 24홈런, 1994년 11홈런
- ↑ 보그스의 통산 WAR은 공격형 3루수인 조지 브렛이나 치퍼 존스보다도 높고 마이크 슈미트와 에디 매튜스보다 낮은 정도다.
- ↑ 레드삭스 동료 짐 라이스는 그를 ‘치킨 맨’이라고 불렀고 그것이 그의 별명이 되었다. 아울러 웨이드의 부인 데비는 닭요리의 달인이 돼 닭고기 조리법만 40가지를 넘게 개발해서 ‘파울 팁(Fowl Tips; 닭/가금류를 의미하는 fowl의 발음이 foul과 같음)’이라는 요리책을 내기도 했다.
- ↑ 시계를 조작해서 7시 16분 다음에 바로 18분이 뜨게 하였다. 하지만 보그스는 그 경기에서 2안타로 화답.
- ↑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에 등록된 그의 '주요 팀(Primary Team)'은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이다.
- ↑ 그렇다고 하여 랜디 존슨의 사례처럼 선수의 의견을 전적으로 일축시키지는 않는다. 명예의 전당 위원회 혼자서 결정하는 사안이었다면 가장 오래 뛴 팀인데다 활약도도 큰 시애틀 매리너스 로고가 새겨졌겠고 실제로도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에 등록된 '주요 팀' 역시 시애틀이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모자를 고르고 싶다는 존슨의 의견이 반영되어 동판에는 디백스 로고가 새겨졌다. 물론 이는 복수의 팀들 중 어느 팀의 로고가 새겨져도 무방할 정도로 고르게 활약했던 선수에게나 통하는 얘기일 뿐, 웨이드 보그스는 이에 해당되는 사례가 아니었다.
- ↑ 레드삭스 구단 명예의 전당엔 2004년에 올려줬지만, 다른 팀들의 구단 명예의 전당이 곧 영구결번임을 인정하는 것과 달리 레드삭스는 영구결번은 구단 명예의 전당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 취급한다.
- ↑ 레드삭스팬들과 구단 사이에는 한가지 비공식 불문율이 있는데 레드삭스에서 전성기를 누린 선수는 양키스 유니폼을 입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양키스팬들이나 구단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상대방 출신들이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나오면 변절자로 낙인찍힐 각오를 해야한다.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그 어떤 투수는 그래서 메츠 유니폼을 입었어야 했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