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의 대통령 뷰캐넌
역대 미국 대통령 | |||||||
14대 | ← | 15대 | → | 16대 | |||
프랭클린 피어스 | ← | 제임스 뷰캐넌 | → | 에이브러햄 링컨 |
공식 초상화 | |
풀네임 | James Buchanan Jr |
출신 정당 | 민주당 |
생몰년 | 1791년 4월 23일 ~ 1868년 6월 1일(77년 1개월 9일) |
재임기간 | [[ 1857년]] 3월 4일 ~ 1861년 3월 4일 |
서명 | |
키 | 183cm |
젊어서도
늙어서도 머리를 기울이고 있는데, 저건 일부러 저런게 아니라 선천적인 부동시 때문이었다. 뷰캐넌은 한쪽 눈이 근시이고 반대쪽 눈은 원시인 부동시 환자여서 보려면 머리를 앞으로 기울여야만 했고 눈을 심하게 깜빡거리는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아주 만년에야 좀 고쳐진 듯.
"If you are as happy in entering the White House as I shall feel on returning to Wheatland, you are a happy man indeed.""만약 백악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만큼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오."
ㅡ 대통령에서 퇴임하면서 후임자 링컨에게 남긴 말.그러나 링컨은 살아서 퇴임하지 못했으니 몰랐겠지, 다만 생전에 링컨은 백악관을 홈,스위트 홈 이라고 했다.
James Buchanan Jr.1791.04.23~1868.06.01 (대통령 재임 : 1857-1861)
1.1 생애
펜실베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9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친 그는 1812년 영국과의 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한다. 전쟁 후 민주당에 입당한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의원이 된 것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그 후로도 그는 러시아 대사, 펜실베니아 하원의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1844년 경선에 도전했지만 잭슨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제임스 포크에게 패한다. 대신 포크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며 오리건 협약을 통해 현재 영토를 거의 완성시켰다. 정확히는 워싱턴, 오리건, 아이다호가 이 때부터 미국 영토가 되었다. 그 전에는 영국과 공동 점유 지역이었던 곳들. 국무장관일 때는 정말 훌륭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받았다.[1]
1848년과 1852년에도 경선에 도전했지만 번번히 패한 그는[2] 마침내 1856년 대통령 후보가 된다. 마침 상대당인 휘그당이 밀러드 필모어 등으로 분열된 상태였고, 국민들이 북부의 강경한 노예제 반대정책을 우려했던 만큼 그는 손쉽게 당선될 수 있었다.
그 또한 전임자인 피어스와 마찬가지로 북부 출신이면서도 남부의 노예제를 용인하는 도우페이스(doughface) 성향의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는 임기 중 남부를 달래느라 애썼다. 좋게 보면 연방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한거고 안 좋게 보면 남부 편만 든 것이다. 그는 전쟁을 피할 수 있고 분열을 잦아들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연방이 탈퇴할 권리 자체를 (무력을 쓰지 않는 한) 막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남부의 주들이 연방 탈퇴를 선언한 최후의 순간까지 남북전쟁을 피하기 위해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군이 섬터 요새를 습격하지 못하도록 설득했고, 그렇게 퇴임 후 1달 까지 전쟁을 미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미뤘을 뿐이다. 그는 섬터 요새의 미 연방군 증파 역시 거부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드레드 스콧 사건. 이 일을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의 치열한 대립이 벌어졌는데 뷰캐넌은 북부 편을 들던 연방대법원 판사들을 설득시켜 결국 남부의 편을 들게 끔 해주었다.
결국 북부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거기다가 뷰캐넌은 당시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오르던[3] 스티븐 더글러스를 굉장히 싫어해서 따로 후보를 내놓았고 이는 민주당의 분열을 초래해서 선거에서 지는 원인이 되었다.
뷰캐넌은 민주당을 탈퇴하고 자신의 부통령이기도 했던 존 C. 브레킨리지를 남부민주당(South Democratic) 후보로 내세웠고 그 결과 표가 분산된 민주당은 결국 신생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패하고 말았다.[4] 그 이후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민주당은 이후 몇십년 동안 기도 못피게 된다.
뷰캐넌은 이후 연방 분열 직전의 자신의 상황에 대해 변명하는 자서전을 썼으나 결국 오늘날까지도 그의 남부 달래기 정책은 재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아니, 더 까이고 있다. 거기다 1857년부터 발생한 경제위기[5]로 그가 퇴임했을시 연방정부의 빚이 1700만 달러나 늘어났다는 것 또한 비판의 대상.
1.2 사생활과 평가
평생동안 결혼을 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 그렇지만 그와 가장 친밀했던 사람은 있었는데 바로 전임자 피어스의 부통령 윌리엄 킹[6]. 당연히 킹은 남자다. 앞서 말한 미혼남이었다는 사실과 겹쳐서인지 사학자들은 이러한 그를 두고 동성애자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실이야 본인들만 알겠지만, 어쨌든 둘은 15년간 한 집에서 같이 살았고, 그 즈음 킹의 별명이 '미시스 제임스 뷰캐넌' 혹은 '팬시 아줌마 (Aunt Fancy)' 등 이었다니까... 사실 동성애가 터부시 되던 과거의 인물 중 게이였는지 아닌지 분명한 증거를 남기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심지어 링컨도 동성애자설이 돌기도 하니까... 하지만 게이라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설' 중 하나일 뿐이니 속단하지 않도록 하자.
일설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죽을 때까지 연애를 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앤 콜먼이라는 여성과 약혼까지 이르렀으나 그녀 집안과의 갈등 때문에 파혼에 이르렀는데, 이 이유는 이 여성의 아버지는 철강공장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이었는데 앤은 약한 정신질환이 있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뷰캐넌을 두고 "저놈이 우리 재산을 노리고 결혼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했고 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파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앤은 죽고 말았다.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뷰캐넌은 평생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결혼하지 않았다고. 이 설이 사실이라면 상당히 순애보적인 남자인 셈. 어쨌든 그의 미혼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이 난무하며, 이 때문에 대통령 재임기에는 그의 조카딸이 영부인 역을 수행했다.
대통령 인기 순위에서는 항상 최하위권을 고수하고 있다. 후임자가 너무 막강하기도 하거니와 결정적인 순간에 연방을 분열시켰다는 책임을 면치 못하기 때문. 다행히 맨 꼴찌는 워렌 하딩이나 앤드루 존슨이 맡아놓고 있는 편인데, 가끔씩 꼴지를 차지하기도 한다. 링컨이란 빛이 있는 한 전쟁을 방치하고 연방을 수호하지 못한 뷰캐넌은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그 외에 18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대통령이라는 특징도 있다.
유능한 국무장관이자 유능한 정치가였던 그의 실패는 대공황을 맞딱트린 허버트 후버와도 여러모로 겹친다. 그의 임기에 남북전쟁이 일어났다면 차라리 평가가 나았을 것이란 측면도 있다. 그가 남부의 무력 사용을 좌시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 필모어와 달리 임기 중에 남북 문제로 소소한 업적조차 세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인간으로서의 뷰캐넌은 선한 인물이였던 것이 본인이 노예들을 사들여서 자유주였던 펜실베이니아 주에 해방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는 노예제 허용 여부는 각 주의 자유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노예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보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 경제학자 뷰캐넌
James McGill Buchanan (Oct. 3, 1919 - Jan. 9, 2013)
공공선택론에 관한 연구로 인하여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 정치가들이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정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연구하였다.
한때 에이브러햄 링컨을 싫어했다고 한다.- ↑ 제임스 포크는 당시에 이미 그를 격찬하면서도 지나치게 신중하고 유우부단한 면을 걱정했는데, 바로 그 지점이 후에 그의 문제점으로 극명히 드러났다.
- ↑ 대신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 때 영국 대사를 맡게 됐다. 이것 때문에 오스텐드 선언이 터지기도 했지만.
- ↑ 뷰캐넌은 이미 재선에는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상태였다.
- ↑ 브레킨리지는 역대 최연소인 만 36세에 취임한 '젊은 피'였는데, 결국 죽기도 만 54세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뷰캐넌과의 나이차가 만 29년 9개월로 미국 역사상 최대의 러닝메이트 나이차이가 된다. 또, 아주 단명까지 볼 나이는 아니긴 한데, 역대 두번째로 오래 살지 못한 부통령이다.
- ↑ 이를 두고 미국에서는 1857년의 공포(Panic of 1857)라고 부른다.
- ↑ 만 67세의 늙은 나이에 취임하여 1달 보름만에 죽은 (승계를 제외한) 최단명 부통령이기도 하다. 뷰캐넌보다 5살이 많았다. 재직 기간은 무지 짧지만, 여튼 뷰캐넌처럼 그 역시 미국 역사상 유일한 미혼 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