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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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미국 대통령
16대17대18대
에이브러햄 링컨앤드루 존슨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공식 초상화
풀네임Andrew Johnson
출신 정당민주당
생몰년1808년 12월 29일 ~ 1875년 7월 31일(66년 7개월 2일)
재임기간[[ 1865년]] 4월 15일 ~ 1869년 3월 4일(3년 10개월 19일)
서명
178cm

President_Andrew_Johnson_standing.jpg
장경동 목사 닮았다 술 좋아한 것도 그렇고 웬지 살 좀 빠진 옐친같기도?


1875년 촬영.

1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1808년에 노스 캐롤라이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학문을 익히고 정계에 진출하여 연방 하원의원(1843~1853), 테네시 주지사,[1] 연방 상원의원(테네시, 1857~1862) 등을 거치면서 점차 이름이 알려졌다. 이후 1860년 링컨의 당선 이후 남부가 차례로 연방을 탈퇴했지만 그는 연방에 남아있었다. 왜 그랬는가 하면 존슨 본인은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연방 탈퇴에 반대했다. 이로 인해 북부에서는 찬양받았지만 남부에서는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의 출신주인 노스 캐롤라이나와 정치적 기반이나 다름없던 테네시가 모두 연방에서 탈퇴한걸 생각해보면... 결국 이것이 뒷날 탄핵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864년 대선에서 공화당은 국가연합당(National Union Party)으로 잠시 당명을 바꾸고 자신들에게 지지를 호소한다. 또한 링컨 대통령 또한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겠다는 의지에서 민주당 소속이었던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 당시 북부에는 민주당의 위세가 약한 편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민주당원은 남부를 지지했기 때문. 이 사례는 아직까지도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의 정당이 다른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2] 명목상 존슨도 국가연합당원이었다고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는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시작부터 영 좋지 않았다. 본인으로서도 어중간한 포지션에 있기도 하고 부담감도 있고 해서 긴장을 풀기 위해 부통령 취임식장에 위스키를 마시고 입장하게 된다. 결국 이로인해 주정뱅이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링컨이 그를 감싸주었지만... 불과 1달만에 링컨이 포드 극장에서 저격당한다. 다음날 링컨은 사망하였고,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2 대통령으로서

그는 일단 링컨의 뜻을 따라 남부에게 유화책[3]을 실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화당 급진파와 의견 대립이 발생한다. 급진파들은 남부에게 군정을 포함한 엄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존슨 본인으로서도 남부인이었기도 했지만, 링컨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그가 링컨의 뜻을 어긋나게 했을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거기다 해방된 노예들이 남부에서 시민권을 박탈당한다거나 KKK 같은 폭력 조직이 준동하는 등 박해당하고 있는데도 존슨은 그저 수수방관했다.[4] 이로 인해 공화당에서는 "기껏 노예들 해방시켰는데 이게 뭐임?"이라면서 존슨을 비판한다. 거기다 민주당에서도 "남부 출신이면서 북부 편든 배신자"라고 까인다. 뭐 어쩌라는 거지?

양 당이 등돌린 상황에서 오는 것은 의회와의 갈등 뿐. 이러한 갈등이 폭발하는 사건이 터졌으니 다름아닌 스탠턴 사건.

일의 개요는 전쟁장관 에드윈 스탠턴이 군이 충성할 상대는 의회라고 선언해버린 것. 존슨이 왜 그런지 묻자, 헌법에 모든 권력은 의회에 있다고 했으니까 당연한거 아님? 이라면서 오히려 대통령에게 도전한다. 결국 스탠턴은 파면되었다.

그런데 당시 공화당 급진파들이 주도했던 상하원에서 (존슨을 길들이기 위해) 1867년 "육군 통솔법"과 "공직 보장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장관 등을 해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에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결국 상원이 해임동의안에 거부를 했음에도 존슨의 의지로 스탠턴은 기어이 해임되었다. 결국 나중에 의결해줬지만서도[5]

3 탄핵

결국 "지금 우리에게 도전하는 거지?"라면서 하원에서[6] 탄핵안을 제출하여 가결된다. 탄핵안은 내놓적은 그 전에도 몇번 있었으나 상원까지 올라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다 상원의원의 2/3를 넘게 자치한 공화당 대부분이 존슨의 탄핵에 동의하고 있던 상황. 누구처럼 사임하지 않은게 용할 지경 그러므로 사람들은 존슨이 당연히 탄핵될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1표 차이로 부결. (찬성 35표 반대 19표.)

이렇게 된 이유는 민주당 의원 12명이 그의 탄핵을 반대한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소수(7명)의 공화당원들이 막판에 등돌렸던 것. 그들도 존슨을 지지한건 아니었지만, 의회가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즉 삼권분립의 원칙 침해를 막기위해 반대표를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60년 뒤인 1926년, 대법원은 이 공직 보장법이 위헌이라고 판단하면서("마이어스 vs U.S" 판결) 존슨이 주장한 공직 보장법의 위헌성은 입증되었다.

4 말년

탄핵으로 인해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장난 상태에서 백악관을 떠나게 되었지만, 명예 회복한답시고 계속 정계에 남는다. 결국 1875년 테네시주 상원의원이 되었지만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다(4월 당선되어 7월 사망). 그의 고집불통 같은 면모는 죽기 직전에도 잘 보여줬는데, 죽기 직전 존슨은 앉아 있다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쓰러졌다. 몸 오른쪽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고통을 호소했는데 놀란 딸이 의사를 부르려고 하자 "의사 따위는 필요 없어! 혼자 설 수 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하여간 한많은 삶을 살다 간 대통령.

5 평가

"나는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거만한 귀족들이, 사실은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여러분 앞에 보여줄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돈을 버는 그들은 열심히 노동해서 자기 먹을 빵을 버는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로 형편없는 사람들이지요."

ㅡ 대통령이 되기 이전 존슨 본인의 말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만큼 고통을 겪고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면에서든지 앤드루 존슨을 평가할 수 없다.

ㅡ 그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결정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

"만약 내가 그랬듯이 여러분이 그의 정직한 모습과 진심 어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결국 그를 믿게 될 것이다."

ㅡ 오하이오 주지사 제이콥 콕스

그러나...

"칼리굴라의 말(馬)[7]에 필적할 만한 술주정뱅이 짐승"

ㅡ 공화당 급진파 상원의원 찰스 섬너[8]

" 저런 무례한 촌사람이 대통령 옆에 서있다니! 하나님! 링컨을 축복하고 용서하소서!"

ㅡ 뉴욕 월드지, 부통령 취임 당시

"그는 자신 출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부에 관심이 별로 없었으며 칭찬과 비난에도 무감각했다."

ㅡ 남부 연합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 1865년 발언

나름 업적도 있었다. 알래스카 매입같은 게 대표적. 당시에는 슈어드(국무장관)의 냉장고라 불리면서 의회로부터 조롱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매입은 미국에게 아주 유리한 결과가 되었다.[9] 그 외에도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멕시코에서 나폴레옹 3세가 찝적거리던 프랑스 세력을 몰아낸 것도 업적. 내전 이후 아메리카에서 미국이 맹주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조치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링컨의 후임자라는 불리한 위치에서 고생만 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본인이 남부 편의를 많이 봐주고, 남부 연합 가담자가 연방에 충성을 인정한다면 사면시켜 주려고 한 것이 제일 많이 까이겠으나. 결국 뒷수습이잖아 그럼에도 노예제 폐지와 시민권 보장을 다져 놓은 것은 그의 임기 때의 일이었다.

위의 언급에서 보듯 스스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농장 소유주나 귀족화 된 상류층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계속 자신 출신성분을 반영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많은 반감과 어그로를 샀지만, 그만큼 자신의 신념에 투철하고 도덕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듯 그의 올곧은 행보 때문에 양당에 모두 왕따 당하는(...) 불행한 임기를 보냈다는 동정어린 평가도 있지만, 그럼에도 링컨 이펙트 때문인지 대통령 인기 순위에서는 항상 하위권을 놓치지(?) 않고 있다.

  1. 18대(1853~1857), 20대(1862~1865) 두차례나 지냈다. 특히 20대 주지사로서는 1861년 벌어진 남북전쟁의 전장에서 3년간 군정 주지사(military governor)를 맡았는데, 이 공로로 주지사에서 물러난 뒤 바로 부통령이 되고 또 뒤로 대통령이 된 것.
  2. 대통령과 부통령의 정당이 달랐던 사례는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때의 부통령 토마스 제퍼슨도 있다. 그러나 이 때는 부통령 후보가 따로 없이 대통령 선거에서 2등을 한 자가 부통령이 되었다.
  3. 존슨은 남부가 남부연합에 빌려준 전쟁 빚을 포기하게 했다. 또 해방된 흑인들의 교육, 의료, 토지, 일자리 등을 제공하는 "해방노예국" 법을 거부하기도 했다.
  4. 물론 이건 딱히 (온건한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존슨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몇백년간 노예로만 생각하던 흑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게 당시 남부인들의 생각이었다.
  5. 정확히는 탄핵이 부결 된 후 스탠턴의 사임으로 해결을 봤다.
  6. 당시 하원은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거기다 스탠턴도 공화당이었으니...
  7. 유명한 야사로 칼리굴라가 자신의 애마를 원로원 집정관(또는 의원)으로 임명했다는 소리가 있다. 다만 실제로 그런 적은 없다. 칼리굴라가 원로원을 조롱하기 위해 '저 노친네들 대신에 내 애마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해도 딱히 별일 없을듯.'이라고 농담했던 게 시간이 흐르면서 와전된 것이다.
  8. 찰스 섬너는 그의 스피치를 듣고 빡친 사우스 캐롤라이나 하원의원 프레스턴 브룩스에게 지팡이로 공격당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말이 좋아 지팡이지 보스턴에 있는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에 전시된 것을 보면 금박도 잘 되어있는 엄청난 흉기이다. 흠좀무. 이 사건으로 인해 섬너는 3년 간 요양을 해야 했다. 이 사건은 남과 북을 더욱더 양극화시켜 훗날...
  9. 냉전시기의 미국 vs 소련, 그리고 현재의 미국 vs 러시아의 구도를 살펴보면 미국에게 있어서 알래스카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만약 알래스카가 현재에도 러시아 땅으로 남아 있었다면 미국은 아마도 지금까지 천문학적인 국방비로 엄청난 부담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