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잉글랜드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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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II of England
생몰 1633년 10월 24일 ~ 1701년 9월 16일(67년 10개월 23일) |
재위 1685년 ~ 1688년(3년)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다. 스코틀랜드 왕으로서는 '제임스 7세'가 된다.
찰스 1세의 둘째 아들이자, 찰스 2세의 동생. 젊은 시절에는 찰스 1세의 처형과 함께 형 찰스 2세와 함께 망명 생활을 했다. 찰스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1] 제임스 2세는 형 찰스 2세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위 계승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찰스 2세 항목으로.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마자 전제정치를 펼쳤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톨릭 신도였기 때문에 가톨릭의 부활을 외쳤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달리 성공회 신도와 청교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그 와중에 그의 둘째 부인이 아들을 출산한다.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왕조가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은 당연지사. 당시 영국 의원들만 해도 성공회와 청교도 신자가 많았으므로 제임스 2세 입장에서도 이들을 필연적으로 경계해야 했다. 그럼 이들을 찍어누르기 위해 제임스 2세가 뭘 했느냐? 섬나라 영국에 상비 육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2]
제임스 2세에게는 메리라는 이름의 개신교도 맏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훗날 윌리엄 3세가 되는 '오라녜의 빌럼(윌리엄 공)'의 아내였다. 개신교 의원 7명이 그들에게 위해 제임스를 타도할 것을 요청했고 1688년, 윌리엄은 그의 군대를 영국으로 보낸다. 이것이 바로 명예 혁명.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당시 제임스 2세는 50세가 넘는 고령이었고 슬하에 딸만 메리, 앤 둘이었던 데다, 딸들도 전부 성공회 신도였기에 당초 신하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제임스 2세가 늘그막에 덜컥 아들 제임스를 본 것이다. 거기다가 사생아도 아니고 적자였기 때문에 의원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윌리엄을 불려들인 것이다. 아들이 없어서 불안해 하던 제임스 2세는 늦둥이를 안고 싱글벙글했지만 혁명의 기세에 밀려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제임스 2세는 복위를 노리고 1689년 3월 아일랜드에 상륙하였지만 패배하고 다시 도주했다. 결국 프랑스에서 여생을 마쳤다.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제임스 3세)는 이복 누이들인 메리와 앤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1701년 왕위를 요구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코바이트이다. 조지 1세가 들어서고 나서도 제임스는 왕위를 요구하다가 1766년 사망하고 그의 아들 찰스(찰스 3세)가 왕위를 1788년 사망 때까지 요구했다. 찰스 사망 후에는 그의 딸 올버니 공작 샬럿이 있었지만 그는 사생아였기에 뒤를 잇지 못했다. 찰스의 동생 헨리가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 제임스와 형 찰스와는 달리 왕위 요구를 하지 않았고 1788년 찰스가 사망 한 후 교황청에서도 헨리를 영국의 합법적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고 ‘요크의 추기경 공작’으로 명명하였다. 헨리는 성직자로 일생을 교황령에서 보냈으며 1807년 선종할 때까지 교회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추기경에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 아들이 없던 것은 아닌데 서자들이여서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그래도 이들은 현재까지 가계가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클로드 드 빌라르 장군과 함께 알만사 전투의 승리에 기여한 제임스 드 피츠제임스 장군 겸 제 1대 베릭 공작, 제 1대 피츠제임스 공작(루이 14세에게서 받음). 참고로 이 장군의 현재 후손이 스페인의 알바 공작가다.서자들중 장자인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은 제임스 2세에게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처형 되었다.
- ↑ 청교도가 주류인 휘그파(現 자유민주당) 뿐만 아니라 제임스 2세의 왕위계승을 옹호했던 왕당파인 토리파(現 보수당)까지 들고 일어날 정도면 말 다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