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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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88년에 일어난 영국 역사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

의회가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을 메리 2세로 옹립한 사건... 이긴 하지만 메리 2세는 바지사장이고 그의 남편 네덜란드 공화국의 통령 오랴녜 공 빌럼이 의회와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윌리엄 3세로 즉위한 사건이라 볼 수 있으며 종종 최후의 영국정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연찮게 이전 정복자와 이름도 같다.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을 이뤄냈다(=어떠한 폭력적인 사태도 발생하지 않았다)하여 명예혁명이라고 불린다.

2 배경

발단은 이렇다. 올리버 크롬웰이 죽은 후 국민들의 강력한 열망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그 자리에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왕자가 찰스 2세로 즉위했는데, 그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 에스파냐 같은 가톨릭 국가와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개신교가 주류였던 의회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1]

3 과정

이 와중에 제임스 2세가 늘그막에 왕자 제임스를 보게 되자[2]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의회는 당시 제임스 2세의 맏딸, 메리 공주와 결혼한 네덜란드의 월리엄 공에게 "영국의 왕위를 양도할테니 부디 영국에 와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그를 런던에 초청한다. 당시 네덜란드가 원래 신교파였기 때문에 영국이 가톨릭 국가가 되면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이라 월리엄 공은 의회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영국에 상륙하고 영국군은 제임스 2세에게 등을 돌리고 월리엄 공에 가담한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면

제임스 2세 : 뭣이!! 윌리엄 짜식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온다고!! 사위가 장인을 노리고 쳐들어와? 햐, 세상 한번 말세로다!! 당장 윌리엄 놈의 군대를 콩가루로 만들어 버려랏!!

신하1 : 군대가 있어야 콩가루건 미숫가루건 만들죠......
제임스 2세 : 그......그런가? 그러고 보니 이거 큰일났구나야~~!!
제임스 2세 : (의회에 가서)이제부터 너희들 안 무시하고 같이 일할께! 싸인할 거 시원히 다 해줄께!!
의회 : 때는 늦으리!!! 폐하께 드릴 말씀은 오직 두 단어... 잉글랜드를 떠나라! 조사까지 세 단언데?
제임스 2세 : 얘야, 너라도 이 애비를 위해 뭔가 말좀 해 다오!
(둘째 딸인)앤 공주 : 잉글랜드를 떠나쇼.

...희극적으로 묘사해놨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제임스 2세는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프랑스로 망명했고, 런던에 입성한 월리엄 공과 메리는 각각 월리엄 3세와 메리 여왕으로 공동 국왕이 된다.[3] 월리엄 3세의 부재 기간 동안에는 메리 여왕이 국왕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사실 위에 인용된 먼나라 이웃나라의 설명은 오류가 있는게, 제임스 2세에게는 상당한 수준의 병력이 있었고, 제임스의 2세의 권력기반인 스코틀랜드에서도 그의 명령에 따라 군대가 소집되고 있었다. 다만 이들 부대의 소집과 이동에는 당연히 시간이 많이 소모되어 소규모 정예부대를 동원해 전격적으로 밀고 들어온 윌리엄과 맞설 시간이 부족했을 뿐. 사실 잘 안 알려져있지만 제임스 2세 자신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4 결과

이 사건을 계기로 왕의 왕권은 한층 줄어들었다. 오늘날 영국 왕실의 권력이 정립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사건이다.

따지고 보면 무혈 혁명이란건 선전에 불과하며 사실은 피를 많이 흘렸다. 윌리엄 공의 상륙 이후 제임스 2세의 군대와 몇 차례 무력충돌이 있었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지에서는 아예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전국을 뒤엎고 두고 두고 문제가 된 자코바이트/윌리어마이트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이 터졌고 영국 밖에서는 제임스 2세가 왕위 탈환하려고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윌리엄 3세 지휘하에 있던 영국과 네덜란드, 여기에 편을 들은 스페인이 맞붙은 9년 전쟁이 일어났다.[4] 다만 프랑스 대혁명과는 달리 잉글랜드 내부보다는 외적 충돌이 더 많아서[5] 무혈 혁명이라 부르는것 뿐이며, 이 또한 현재 사학계에서 대대적인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문제.

실제로 혁명이라고 하긴 했으나 왕에 맞서 귀족과 젠트리의 이권을 보장한 측면이 강하다. 혁명은 일종의 미사여구였으며, 무혈이 덧붙여진 것은 어떻게든 이 사건의 파장을 축소시켜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었다. 실제로 인민의 주권이나 저항권에 따른 획기적 변화 그런 거 없고 그냥 제임스 2세가 물러나서 빈 왕좌에 다른 사람이 와서 앉는 식으로 잘 이어졌다. 그리고 의회는 이렇게 냉큼 왕을 쫓아내고 이권을 차지하자마자 밥그릇을 지키려고 선거권 동결하기, 있는 선거권 빼앗기, 선거권 안정적으로 물려주기를 일삼았다.[6] 그래놓고는 훗날 대혁명이 벌어지자 우리는 평화롭게 혁명했지 피분수를 일으킨 프랑스 놈들과 다르다는 선전을 덧붙인다.

명예혁명으로 인해 자코바이트 문제가 발생한다.
  1. 청교도가 주류인 휘그파(現 자유민주당) 뿐만 아니라 제임스 2세의 왕위계승을 옹호했던 왕당파인 토리파(現 보수당)까지 들고 일어날 정도면 말 다한거다(...) 토리파는 성공회 교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2. 당시 제임스 2세는 50세가 넘는 고령이었고 슬하에 딸만 메리, 앤 둘이었던 데다, 딸들도 전부 성공회 신도였기에 당초 신하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제임스 2세가 늘그막에 덜컥 아들을 본 것이었다.
  3. 이때 제임스 2세는 도망가면서 국새와 의회 소집장을 챙겨 달아났고 강에 버렸다는 말이 있다.
  4. 이 전쟁은 1697년 레이스웨이크 조약으로 종결되는데 사실상 프랑스의 패배였다. 다만 그건 전략적으로 루이 14세가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버린 탓이었고, 전술적으로는 당시가 루이 14세의 최전성기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큰 전투는 프랑스군이 승리했다. 조약의 결과 윌리엄 3세의 영국 왕위를 프랑스가 인정하고 프랑스가 일부 점령한 벨기에 지역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윌리엄 3세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은 해군을, 네덜란드는 육군을 주로 양성하는데 이게 영국 해군이 네덜란드 해군을 앞지르는 결정타가 되었다.
  5. 당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현재와 같이 영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체제에 묶인 상태가 아닌 엄연히 별개의 독립 국가였다.
  6. 로버트 월폴이 이 때 맹활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