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니케아 공의회

지극히 영광되시는 우리 하느님 그리스도여,

교부들로 이 세상을 비추는 기초로 삼았고
그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진정한 믿음으로 인도하셨다.
지극히 자애로우신 이여 주께 영화로다.

-정교의 제1차 세계 공의회 참석 교부들 주일 찬양송, (한국 정교회 공식 번역판)


라틴어 : Concilium Nicaenum Primum
그리스어 : Πρώτη Σύνοδος της Νίκαιας(현대)
영어 : First Council of Nicaea

1 개요

* 제 1차 니케아 공의회를 그린 이콘 1
파일:ZFWcfg1.jpg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그린 이콘


서기 325년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후 소집된 최초의 보편 공의회[1]
고대 서양판 예송논쟁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선고 후 파문했고, 그때까지는 신자들이 사도전승으로써 이어받아서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논란을 만들던 예수의 신적 본질과 성부와의 관계[2]를 논리적으로 정립하여 삼위일체론을 교리로 선포했다.[3]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삼위일체론 개념 그 자체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갑자기 뚝딱 만들어진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전부터 그리스도교 내에서 믿던 내용이지만 논리적으로 온전하게 정립되지 않아서 애매한 개념을 논리적으로 다듬고 '정립'하고 공식적인 교리로 선포한 것이라고 함이 정확하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니케아 공의회 때 만들어졌지만 '담론' 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실제 2,3세기 주교나 교부들의 서신에 성부, 성자, 성령의 위상정립이 현 삼위일체론과 비교적 유사하게 이루어지고, 이에 벗어나는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들과 논쟁했던 것이 나온다.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없지만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개념은 성경에 적혀 있고, 기원후 2세기까지 보편교회가 정경으로 명시하고 있던 신약성서에서 추출할 수 있는 단서를 종합하면 성부는 말할 것도 없고, 성자, 성령도 특별한 신적 존재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지만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단 점에서 혼란이 발생했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소위 '삼위일체'란 '담론'은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었다.[4] 따라서 삼위일체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니케아 공의회 때 갑자기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초대교회부터 시작됐던 성부, 성자, 성령의 위상정립에 관한 담론과 그 시절 사료들을 너무 무시한 결과다. 아래 사이트에 더 상세한 정보가 나온다. [1] [2]

여하튼 이 공의회는 공의회 참석 주교들 스스로조차도 이것이 큰 영향을 끼치거나 할 줄은 몰랐기에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문헌을 적거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관련 정보는 공의회 참석 주교 개개인이 사사로이 적어놓은 것에 의한 것이다.

2 공의회의 소집 배경

※이 문서를 읽기 전에, 아리우스파 항목을 먼저 정독하는 것이 좋다.

정복자이신 최고 황제(Augustus)인 콘스탄티누스가 알렉산데르와 아리우스에게 고하는 바이오.
그대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충실하게 조사한 결과, 나는 그 원인이 참으로 사소한 것이며 격렬한 쟁점으로서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소. ······ 그러므로 이제 그대들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대들과 같은 하느님의 종이 드리는 충고를 받아들여 주기 바라오.
이 충고란 다름이 아니오. 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한 것도 잘못이었고, 제기된 질문에 응답한 것도 잘못이었소. 법의 권위가 아니라 논쟁의 정신에서, 즉 여가를 오용하여 심심풀이처럼 제기한 논점은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만 제한해야 하며, 대중 집회에서 서둘러 발표하거나 경솔하게 대중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토록 숭고하고 난해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II, 64~72[5]

요약: 정신 사나우니까 둘 다 제발 조용히 해라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가 로마 제국 전역에 유포되면서 제국 전체가 삼위일체 논쟁으로 분분해지자 콘스탄티누스는 지역 주교들의 회의는 중단하고 대신 니케아(니체아)에서 권위있는 세계 공의회를 열어서 아리우스파와 정통파 양측이 모두 승복할 만한 판결을 내자고 했다. 이러하여 325년 6월 19일에 니케아에 있는 황제 별궁에서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를 소집했으니 이것이 바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이다. [3]

나는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요를 전쟁이나 전투로 간주할 것입니다. 오히려 소요는 전쟁이나 전투보다도 진정시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소요를 적대시할 것입니다.

- 콘스탄티누스의 공의회 개막 연설[6] -

요약: 그만 좀 싸우고 쿨하게 합의보자[7]

이때 참석한 주교는 318±2명이라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8].

여담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공의회의 개막식 때 개회 연설까지 반강제로 떠맡게 되었는데, 참석한 주교들 거의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주교들이었고 황제 자신도 그리스어를 비교적 잘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답게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연설했다.

당시 카이자리아의 주교 에우세비오는 황제가 개막식에 입장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라고 묘사하였다. 아부 쩌네효

공의회에 소집된 주교들은 박해시절의 박해 때문에 한쪽 눈이 없던 주교도 있었고, 양쪽 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 주교도 있었고, 다리를 질질 끌고다니는 주교도 있었다고 공의회 참석 주교들 중 하나는 적어놓았다. 그야말로 상전벽해.

3 공의회의 쟁점과 결과

공의회의 쟁점은 주로 아리우스 논쟁이었고, 간간히 부활대축일의 날짜 계산 같은 것들이 논의되었다.

공의회는 아리우스의 새로운 주장을 물리치고, 예수와 성부가 동일본체(homoousia)라는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오던 가르침을 발전시켜서 삼위일체론으로 정립하였다. 그리고 아리우스는 결국 그리스도가 성부와 성령과 똑같은 천주성(天主性)을 지녔다는 니케아 신경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여서 이단자로 결정되어 파문되었고, 그는 아우구스타 트리베리움으로 유배를 갔다. 키배에서 진 자의 말로

그리고 부활대축일의 날짜 계산에서는 요일과는 관계없이 유월절에 따라 유대력의 니산월 14일을 부활절로 정하고 기념하는 전통과 그 다음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하고 기념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춘분 이후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번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되었다. 여담으로 동방교회에서는 20세기까지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동서방교회가 둘 다 부활절의 날짜를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에 따라 기념함에도 그레고리오력을 사용하는 서방교회와 부활절이 차이가 난다. [9]

그리고 이 공의회는 사제서품과 성직자의 승격 그리고 교회위계질서에 대한 20개의 규범과 니케아 신경을 채택했다.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이 공의회를 통하여 콘스탄티누스는 강력한 정치적 리더쉽을 발휘하였고 전체 교회의 통합까지 도왔다는 찬사를 들었다. 황제는 공의회로 소집된 주교들을 몇 주일 더 비티니아에 머물게 하고 자신의 즉위 20주년 기념 연회에서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앞서 언급한 카이자리아의 에우세비오는 이 공의회에서 정통파로 돌아왔으며 이 연회에도 참석했는데, 당시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황궁의 연회에 참석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연회였다. 황제의 경호관을 비롯한 여러 병사들이 검을 뺴어 들고 황궁 입구를 에워싸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그 한가운데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들어갔다.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이르자 황제의 벗들 몇 사람이 앉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양측에 배치된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마치 그리스도의 왕국을 미리 본 것처럼 그 장면은 현실이라기보다 꿈과 같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III, 15

태세전환한 주교의 아부 같지만 넘어가자[10]

4 니케아 신경

위 문서 참고

5 규범

  • 고자 : 심영 고자는 성직자가 될 수 있으나,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은 안 된다. (규범1)
  • 개종자 : 이단으로부터 개종한 자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성직품에 오를 수 있다. 신품성사 이전에 고백하지 않은 죄가 드러나면 면직된다. (규범2)
  • 가족 : 가정 집에 모친과 자매 외에는 어떤 의심받을 만한 여인도 함께 있을 수 없다. (규범3)
  • 주교 선출 : 주교는 교구에 속한 모든 주교, 최소 3명의 주교들의 선임과 그외는 동의서신을 받아야 하고 최종적으로 대주교의 확인이 있어야 한다. (규범4)
  • 시노드(주교회의) : 주교회의는 일년에 두 번 해야 한다. 사순시기 전과 가을 전에 개최되어야 한다. (규범5)
  • 파문 : 주교에 의해 파문 된 자는 그 어느 주교도 복귀시킬 수 없다. 단, 무기력이나 다툼 외에 이와 비슷한 경우에 의한 파문은 제외된다. (규범5)
  • 관할 구역 :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리비아, 펜데포리스을 관할하며, 로마 총대주교는 로마에 속한 지역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그 이외의 지역을 관할한다.
  • 대주교의 판단에 거슬리는 주교는 주교 자격이 없다. (규범6)
  • 성직 자격 : 검증없이 신품성사를 받은 자가 이후 죄인임이 밝혀지면 면직된다. (규범9)
  • 면직 :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타락한 성직자는 서품을 베푼 자와 함께 면직된다. (규범10)
  • 회개 : 타락한 자는 관대함을 받을 만하건 못하건 간에 12년 동안 회개해야 한다. (규범11)
  • 폭력 : 폭력을 참고 유혹을 물리쳤더라도 차후에 사악함에 빠졌다면 10년간 파문당한다. 그 기간동안 회개하는 생활은 철저한 감시와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규범12)
  • 성체 성사 : 임종에 있는 자는 영성체를 받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면 기도와 준비를 한 후에 영성체 한다. (규범13)
  • 예비신자 : 예비신자가 타락하면 3년동안 다시 예비신자 준비를 한 후에 예비신자가 되야한다. (규범14)
  • 구역 이탈 : 주교, 사제, 부제오는 도시를 옮겨다닐 수 없다. 계속 옮겨다니면 소속 도시로 돌려 보내져야 한다. (규범15)
  • 소속 구역 : 사제 혹은 부제가 소속 교회를 이탈하여 다른 교회에 받아들여졌다면, 본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타 교구 소속인 자에게 신품성사를 소속 주교의 허락없이 베풀어졌다면 무효가 된다. (규범16)
  • 고리대금 : 150%의 고리대금을 받는 자는 교회법규에 의해 파문된다. (규범17)
  • 부제 : 부제는 자신의 구역에만 머물러야 한다. 부제는 사제에게 성체성혈을 베풀거나, 사제보다 먼저 영성체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석을 하지 못한다. (규범18)
  • 여성 부제 : 여성 부제가 타락하면 성직품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평신도로 간주한다. (규범19)
  • 기도 : 주일과 오순절에는 서서 기도한다. (규범20)

6 관련 항목

  1.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들의 회의를 최초의 공의회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니케아 공의회가 최초의 보편 공의회라는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2. 요한복음서에도 나오듯이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하느님" 같은 개념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내려오던지라 유일신 종교인 그리스도교에서는 큰 논란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사실 아리우스파도 이 개념을 정립하려 들다가 나온 이단설이다. 다만 아리우스파는 심플하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가장 극단적인 주장이라는 위험성도 있었다. 즉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구절과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구절을 어떻게든 둘 다 받아들이려고 애를 쓰던게 당시의 삼위일체 떡밥인데, 아리우스는 한쪽의 구절을 완전히 무시하자는 심플하면서도 극단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이는 아리우스파가 단죄되는 원인이 된다.
  3. 사실 이후에도 네스토리우스파 논쟁, 단성론 논쟁, 단의론 논쟁 등등 굵직굵직한 논쟁들이 계속 따라오지만, 이들은 엄밀히 말해 삼위일체론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봐야한다.
  4. 조금 더 보충설명하자면, 복음서에서는 예수와 하느님을 구분하는 듯한 문장과 예수와 하느님을 동일시하는 듯한 문장이 모두 병행해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요한 복음서 1장에서는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아리쏭한 문장이 콤보로 등장한다. 당연히 초기 교회의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아리쏭한 문장들이 논쟁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가장 극단적인 주장이었던 '예수는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일단 쳐내고 본 게 니케아 공의회의 삼위일체 논의라고 할 수 있다.
  5.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간접인용.
  6. 출처 <비잔티움 연대기>
  7. 콘스탄티누스는 이제 막 제국을 통합시킨 입장이라 교리문제로 제국이 분열하는건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어했다. 당장 이 항목에 쓰인 편지와 연설의 어조만 보더라도 '정확하고 합리적인 결론' 같은 것 보다는 '당장 이 문제를 끝내는 것'에 관심이 컸다. 애시당초에 그는 당시 보통 사람들처럼 세례가 원죄와 본죄와 그 벌까지 한방에 모조리 용서하는 효과가 있다는 걸 노리고 죽기 직전 337년 5월 22일 성령강림대축일에 세례를 받는 등 교리 자체에 큰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로마 버전 파스칼의 내기
  8. 그리고 이 주교들 중 3명은 끝까지 아리우스파를 옹호하다가 파문당했다.셋 중 한명이 다름아닌 아리우스라는건 함정흑형
  9. 4년마다 한번씩 겹친다고 한다.
  10. 에우세비오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