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태종 집권기인 1408년 12월 5일 평양군 조대림이 모반을 획책했다는 고변이 사헌부에 접수된다. 이때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으로 맹사성이 한달전에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중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맹사성과 그의 아들 맹귀미를 비롯하여 여러 신하들의 목이 달아날뻔 했다.
사실 목인해와 조대림이 중심인물이지만, 사건을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이 사건은 태종의 권모술수 총집합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건이다.
2 조대림, 역모를 꾀하다(?)
평양군 조대림은 조선개국 원종공신인 조준의 아들이며 태종의 차녀 경정공주의 남편으로써 태종의 사위 되는 사람이다. 사건 당시 22세였는데 시대의 명신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사리판단도 느리고 영민한 구석도 별로 없었던 그저 범용한 인물이었던 듯 하다. 이런 조대림을 이용해서 공을 세워야지! 하고 음흉한 생각을 품은 놈이 있었으니 목인해[1]라는 사람이었다. 목인해는 '조대림이 아직 어리고 어리석으니 저 놈을 이용해서 내가 부귀영화를 얻어야징!' 이라는 생각을 하더니 대담스럽게도 조대림이 반역을 하려는 것처럼 꾸미고, 조대림을 고발하는것으로 공을 세워서 뒤통수를 쳐서 벼슬을 얻을 계획을 짰다.
일단 목인해는 조대림을 찾아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서 죽은 흥안군의 이야기를 꺼냄과 동시에 조대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슬슬 겁을 준다.
"군대를 맡은 사람들 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생길까 걱정되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경험도 많고 식견이 많아서 걱정이야 안되지만 평양군께서는 군사를 다루는데는 서투니 대처할 방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저는 유사시에는 몸을 아끼지 않고 평양군 나으리를 도울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조대림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목인해의 말에 귀를 기울이니, 자기 생각대로 조대림이 낚이고 있다고 생각한 목인해는 다음과 같은 말을 신랄하게 떠들어 제낀다.
"경험 있는 장수가 반란을 일으키면 궁궐 안을 장악하고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한 뒤, 내시로 하여 임금의 명령을 위조해서 위로는 장수와 정승, 대언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인데, 이렇게 되면 임금이라 한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말에 또 다시 조대림이 속아넘어가자 "요즘 갑옷 입은 병사 수십명이 경복궁 북쪽에 모인다는데 이게 평양군 대감을 해치고자 하는 일이라니 마땅히 관하의 군사를 동원해 그들을 잡으셔야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낚시를 시전한다.
이 말에 크게 놀란 조대림이 "그럼 이거 이숙번공에게 이야기 해야 되는거 아니냐?"하고 물으니 목인해가 "그거 누구 군사인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말하면 안됩니다" 하고 대답하니 조대림이 다시 묻기를 "그럼 임금님한테 가야겠군?" 하니 목인해가 다시 "확증도 없이 그냥 들은 말로만 임금님한테 보고 하면 어떡합니까! 그리고 위급한 경우엔 임금님 지시도 받아야 하는데 자칫하면 말이 샐 우려가 있습니다. 행동하고 나중에 보고 하는것이 옳습니다." 하고 조대림을 낚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조대림 낚기에 성공한 목인해는 이숙번에게 후다닥 뛰어가서 의심이 많고 정적이 많은 그의 성질을 이용하여 "평양군이 딴맘 먹고 군사를 일으켜서 대감하고 권규, 마천목을 죽이고 왕실을 도모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하고 뻥을 친다. 이숙번이 깜짝 놀라서 내막을 물어보니 목인해가 또 말을 꾸며 덧붙였다.
이숙번이 입궐하여 슬그머니 자기가 들은 말을 태종에게 말하니, 태종은 목인해의 말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고 조대림이 어린나이라 딴 마음을 품기도 어렵거니와 만약 정말로 딴 마음을 먹었다면 필시 주모자가 있을것이라 판단하고 조대림을 떠보기로 작정한다. 태종은 조대림에게 초제[2]를 지내라고 명령하여 조대림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볼 작정이었다. 당연히 태종의 그 속내를 알 리 없는 조대림은 몸이 부정을 범했으니 불가하다 하며 초제를 사양했다. 이것으로 태종은 조대림이 딴마음을 먹은 것이라 판단하게 된다.
이 무렵 목인해는 호군 벼슬을 같이 지냈던 진원귀라는 사람을 찾아가 "평양군이 뭔가 일을 도모하려는거 같은데 나 따라 올래?" 하고 꼬신다. 목인해가 진원귀를 데리고 조대림의 집에 들어가니 조대림은 의심도 없이 "함부로 날뛰는 일곱 여덟명 정도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하고 목인해에게 물어본다. 이에 목인해가 다시 위, 아래로 친교 있는 사람하고 의논해야 한다고 대답하자 조대림이 "나 별로 친한 사람 없는데..."하는 대답을 했다. 이쯤에서 목인해가 진원귀를 돌려보내고서는 이렇게 물었다."거사는 세상물정 잘 아는 선비랑 의논해야 되는데, 잘 아는 사람 없어요?"
이에 조대림이 "나 관직에 있는 사람이라곤 조용 밖엔 몰라."하니 조대림은 목인해의 의견을 쫓아 조용을 불러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요청하니, 조용이 말하길 "그거 임금님한테 먼저 말하는게 옳은데요?" 하고 충고하고 조대림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재빨리 입궐해서 태종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고자 했으나 목인해가 사람을 시켜 그를 붙잡아둔다. 그리고 목인해 자신은 이숙번의 집으로 후다닥 달려가 역모의 주모자는 조용입니다! 하고 거짓으로 고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조용은 탈출하여 태종에게 모든 일을 말하니 태종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태종이 일의 전모를 모두 짐작하고 있는 이상 그 시점에서 사건을 충분히 종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종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한데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좌군도총제 조대림은 당시 군부 핵심관료 중 유일한 종친이었다. 신하들에게만 병권을 맡겨둘 수 없었던 태종이 일부러 임명한 인물이었는데 사건을 섣불리 드러내어 목인해를 잡아들이면 사건 자체는 끝나겠지만 목인해와 접촉한 조대림의 혐의 자체는 남는다. 왕조국가에선 그 정도 혐의만으로도 충분히 불충을 논할수 있었고 더 나아가 종친이 군무에 관여하는 것 자체에 대한 반발여론이 조성될 게 뻔 했다. 태종입장에선 조대림에게 역심이 없음을 보다 확실히 하고 신하들의 관심을 다른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날 저녁, 조대림이 입궐하여 태종을 뵙고 경복궁 북쪽의 도적을 잡는다는 이유로 군사를 내어주기를 청했고 태종은 조대림이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그 청을 승낙한다. 그 후, 이숙번을 불러서 "조대림이 출발하면 목적지가 있을텐데, 네 집에서 신호탄을 터뜨리면 내가 주라를 불어서 응하겠다."하고 보냈다.
태종이 내어준 병사를 받은 조대림은 목인해를 불러서 도적이 어디있냐고 물으니 대담한 목인해는 또다시 대담하게 마천목을 죽이러 가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남산 마 총제의 집 옆에 있다고 당당하게 또 뻥을 친다. 조대림이 남산으로 향하려고 문을 나서자 이숙번이 몰래 보고 있다가 신호탄을 터뜨리니 신호를 본 태종이 궐내에서 주라를 불었다. 이것을 들은 조대림이 군사들에게 "어디로 가야 하니?"하고 물으니 주라소리를 들으면 궐문에 모이는 것이 군령이라는 대답을 듣고 대궐로 가야 한다 판단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목인해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을 알고 남산으로 향해야 한다고 극구 주장했으나 조대림은 듣지 않고 대궐로 향했다.
대궐에서 임금이 주라를 분다면 대궐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인데, 조대림이 진짜로 딴생각을 품었다면 대궐로 안 가고 자기 목적지로 향했을 것이다. 따라서 조대림이 궐문으로 돌아온 것은 역심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만약 계속해서 남산의 마천목의 집으로 이동한다면 마천목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이숙번이 재빨리 조대림을 죽였을 것이다.
목인해는 계획이 이그러지자 급한 마음에 한발 앞서 대궐로 들어가 조대림이 군사를 동원해서 대궐로 향했다고 외쳤다. 태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조대림을 하옥시켜 국문했다. 국문을 받게 된 조대림이 목인해의 꼬임에 넘어가 도적을 잡으려 했으며 딴마음을 품은 적이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니 태종은 기다렸다는 듯 목인해를 신문하라는 명을 내렸다. 목인해는 장 10대를 맞고 사실을 자복했고 진원귀가 그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조대림의 무죄가 밝혀졌다.
조대림은 그제서야 "어제 전하께서 주라를 부신것은 바로 나를 위해서였구나!"하고 목인해의 흉계를 깨닫는다. 조사끝에 조대림 및 조용은 무죄방면되었고 목인해에게는 능지처참형이 떨어졌다. 사건은 거기서 종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3 그들의 저의가 무엇이냐? 신문하되, 죽어도 상관없다.
목인해의 형이 저잣거리에서 집행되기 직전, 대사헌 맹사성을 비롯한 대간들이 이를 중지시키고 태종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
"목인해를 능지처참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조대림이 일찍 전하에게 아뢰지 않은 죄도 큽니다. 형을 늦추고 대림과 대질심문하여 주범과 종범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태종이 받아들여 조대림과 목인해의 대질심문이 벌어졌지만 목인해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조대림은 결국 무죄방면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태종은 기다렸다는 듯 조대림을 고문하고 목인해의 사형집행을 늦춘 저의를 캔다며 조사에 참여한 맹사성과 박안신 등을 옥에 가두고 국문토록 하였다.
목인해와 그 일가족들에 대한 형을 집행 시킨 후, 태종이 백관을 모아놓고
"조대림은 본래 역모를 꾀한적이 없는데 맹사성이 목인해와 함께 주범과 종범을 가려야 한다고 말한 저의가 대체 무엇이냐? 모반 대역에서도 주범과 종범을 나누어야 하느냐? 이번 대간의 의논은 대림을 죽여서 왕실을 약화시키려 한 것이니 그들의 입에서 모약왕실,[3] 이 네 글자를 반드시 받아내야 할 것이다. 승복하지 않거든 모질게 때려 신문하되, 죽어도 상관없다."
결국 맹사성을 포함한 신하들이 매를 견디지 못해 죄를 인정하였고 이 일로 인해 관직에 나가 있던 맹사성의 아들 맹귀미까지 함께 죽게 되었다.[4]
결국 태종 8년, 서기 1408년 12월 11일 대사헌 맹사성, 정언 박안신, 좌정언 이안유, 감찰 맹귀미 등을 극형에 처하고 저자에서 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을 집행하라는 태종의 어명이 하달됐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숙번은 "맹사성이 주범과 종범을 구분하고자 한 것은 목인해와 진원귀를 말한 것인즉, 다른 마음이 어찌 있겠습니까? 그들의 직책이 언관인데 직책과 관련된 말로 능지처참을 당하는것이 어찌 가한 일입니까?" 하고 간언했다. 이에 태종이 진노하여 "어찌하여 그대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누구의 사주를 받고 그런 말을 하는가!"하고 받아치니 이숙번도 "신은 사주를 받은 일도 없고 사사로운 감정도 없습니다. 맹사성 등이 죄를 인정한 것은 매에 이기지 못한 결과입니다. 전하께서도 일찍이 모진 매로 얻지 못할것이 무엇이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그들을 극형으로 다스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고 되받아쳤다.
하지만 이숙번도 태종의 결정을 번복시키는데 실패했다. 이어서 노신 권근이 병든 몸으로 가마까지 타고 달려와 맹사성 등을 용서해줄 것을 요청했고 영의정 하륜과 좌정승 성석린과 영삼군사 조영무 등도 극형을 면하게 해달라 간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끝까지 그들의 말을 전부 거절하고 백관들이 시가지에 모여 형을 집행하기 바로 직전에 비로소 극형을 거둬들였다. 태종은 "사안이 중하고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나, 나라를 군주 혼자서 다스릴 수는 없기에 경들의 말을 따르겠다. 차후로 경들도 왕실이 약해지는 것을 방치하지 않도록 하라."고 이르렀다.
그 결과 맹사성은 장 100대에 유배조치 되었다. 이후 1409년 1월 1일 설날에 세자(양녕대군)가 하례를 와서 맹사성을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자 태종이 스승을 생각하는 아들의 마음을 읽고 쾌히 승낙했다.[5] 이후 세자의 요청으로 유배에 풀린뒤 1년 7개월 후인 1410년 8월 10일에 직첩을 돌려받았으며 1411년 12월 7일에서야 충주 목사 직책으로 다시 관직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