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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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思誠, 1360~1438

고려조선초의 문신. 자는 성지(誠之), 호는 고불(古佛).

본관은 지금의 신창역이 있는 지역인 신창, 출생은 충청도 온양이다.

1 개요

황희 정승과 함께 세종대왕시대, 그리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이자 정승계의 콩라인. 청백리의 상징으로 통하며[1] 우의정, 좌의정까지 오르기도 해서 역대 좌의정 중 최장기 재임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대 영의정 최장기 재임자인 황희에 밀려 은근히 이 사실이 묻히는데다 맹사성 본인도 영의정은 되지 못했다.(...)

사실 원래 삼정승 가운데 좌의정, 우의정이 실권자이고 영의정은 그냥 조정의 영수 같은 명예직 비슷한 느낌이라 조선조에 실세 영의정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히려 맹사성이 워낙에 뛰어나서 실권을 놓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이조 호조 예조 를 관할 하는 좌의정이 황희 처럼 좀 받을꺼 받고 재산도 좀 축적하면 안된다. 워낙에 청백리니 인사와 재무와 교육을 담당했다고 보는것이 옳다. 반면에 황희의 경우 이,호,예,병,형,공의 모든 관직을 태종때 두루두루 맡았다. 한마디로 두루두루 국정 전반에 관해서 넓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영의정의 임무가 실권은 없는 대신에 각조간의 조율을 맡는것이 관직의 임무이다. 그래서 과단성있고 국정 전반에 잘아는 황희가 영의정을 계속 맡았고 실무자로 청백리면서 자기주장만 강권하지 않고 적당히 물러설수 있는 맹사성을 좌의정에 제수했다고 보는것이 옳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가려서 못된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그 인물인 것이다. 예를들어 축구에서 베켄바우어와 게르트뮐러를 바꿀수 없는것처럼 황희는 영의정의 일을 잘 하는 인물이고 맹사성은 좌의정의 일을 잘 하는 인물인 것이다. 워낙에 그 분야에 출중했기 때문에 자리변동이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둘다 죽을때까지 혹사당하고 과로사했다. 특히 황희가 87세까지 영의정 노릇 한것은 아마 우리나라 최장수 총리(?)와 최장기 총리일듯

긴 관직생활 동안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해 덕망이 높았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이 모든 국정을 중단한 채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문상했다고 한다. 사실 87세까지 부려먹히고(...) 90세에 세상을 떠난 황희에 부각되지 않을 뿐, 맹사성도 79세로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장수한 편이다.

태종실록, 고려사, 팔도지리지, 신창경제육전 편찬에 깊이 개입했으며 특히 우리 고유 음악인 향악에 조예가 남달라 조선 초 우리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고 전해진다.

황희와 쌍벽을 이루는 명재상이지만, 어째 은근히 황희보다는 좀 대접을 못 받는 편. 우의정, 좌의정은 해봤는데 영의정은 못된 것도 좀 그렇고(…). 사실 이건 맹사성 개인의 성격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맹사성은 황희에 비해 관리들이나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박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황희는 강직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추진하는 인물(정사)이었는데 맹사성은 자신의 의견을 내더라도 분명하게 개진하기보다는 우회적으로 신중하게 의견을 내는 스타일이었다.

실록에서도 맹사성의 단점으로 너무 우유부단해서 강직한 결단력을 내리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적고 있는데 좋게 말하면 부드러운 성품의 호인이었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물러터진(!) 사람이었다는 소리. 그래서 실록에서도 이점을 크게 까고 있다 세종 16년 8월 7일자 실록을 보면 판이조 맹사성은 너무 착하고 우유부단 하고 판서 신개는 "예예"하기만 해 도승지 안숭선이 전선(銓選)을 도맡았다고 서술 하고있다.[2] 게다가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황희의 사위가 살인을 저질렀을 때 사위의 죄를 묻으려고 했던 황희의 부탁을 받고 같이 이 사안을 묻으려다가 세종에게 걸려서 파직크리를 먹고 망신을 당했던 일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맹사성의 이런 면모는 황희와의 투톱 체제에서 좋게 작용했는데, 맹사성의 이런 성품이 황희나 허조 같은 강직한 대신들의 단호함이나 날카로움을 완화시키고 대신들간의 논쟁을 중재,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황희와 맹사성은 일종의 상호보완 관계였던 셈. 그리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면모답게 섬세함이 요구되는 일처리에서 강점을 발휘했다.

고려 말의 명장인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3] 그리고 조선 전기의 시조인 강호사시가을 만든 사람이다. 송순과 비슷하게 자연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자연관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맹사성은 당시 임금을 찬양하면서 부르고, 송순은 한정가로 부른다.

2 일화

  • 태종이 그를 종친 세력 강화 용도로 이용해 먹은 적이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태종의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에 걸려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난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조대림 사건 참조. 참고로 이 사건에 아들인 맹귀미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한다.
  • 사람됨이 소탈하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4]로 하였고, 바깥 출입을 할 때에는 타기를 즐겨,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결백한 맹사성의 성품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
  • 황소를 타고 수수한 차림으로 다녔다는 일화도 유명. 고향인 온양[5]에 내려갈 일이 있었던 맹사성에게 한 현감이[6] 잘 보이기 위해 그가 지나갈 길을 닦고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맹사성은 나타나지 않고 웬 소를 탄 노인이 길을 떡하니 지나갔다. 어이가 없어진 현감이 하인들을 시켜 그 노인을 잡아오려 했지만 노인은 하인들에게 "온양 사는 맹꼬부리가[7] 제 소 타고 제 갈 길 가는데 어찌 바쁜 사람을 붙잡는가?"라고 허허 웃으며 받아치고는 제 갈 길을 갔다.
하인들에게 보고를 받고서야 그 노인이 맹사성이었다는 것을 안 현감이 사죄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인수를 연못에 빠뜨려 버려서 그 연못을 '인침연(印沈淵: 도장 빠진 연못)'이라고 했다는 일화도 유명한 이야기.[8]
  • 음악에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집에서도 퉁소를 즐겨 불어서 맹사성을 찾아온 사람들이 집 밖에서 퉁소 소리를 듣고 그가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 야사에선 벼슬자리 구하러 가던 선비와 벌인 언어유희(지금 시각으로 보면 그야말로 '야자타임'겸 '통신체'...)인 '공당문답'으로 유명하다.
맹사성이 길을 가다 정자에서 쉬는데, 거기에 어떤 젊은 선비가 먼저 와 있었다. 맹사성의 검소한 옷차림을 보고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젊은이가 그를 놀릴 양으로 "우리 '공당놀이'란 걸 해 볼까요? 댁은 말 끝에 '~공'이라고 하고 나는 말 끝에 '~당'이라고 하는 거요"라고 제안했다.옛날이라 그런지 몹시 단순하다[9][10] 그리하여...

"그대는 어딜 가는공?" / "한양에 간당."
"한양엔 왜 가는공?" / "벼슬자리 구하러 간당."
"한양가서 벼슬자리 줄 사람 있는공?" / "없당."
"그럼 벼슬자린 어떻게 얻으려고 하는공?" / "나도 모른당."
"그럼 내가 벼슬 하나 줄공?" / (폭소하며) "바라지도 않는당."(혹은 "가당찮은 소리 맙시당.")

그 후 시간이 지나 맹사성이 신참 관리들의 하례를 받게 되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예전에 자신을 놀리던 그 젊은이도 있었다. 이에 장난기가 동해 장난을 걸었다.

"자네, 나를 알아보겠는공?" / (고개 들고는 깜짝 놀라) "아, 알아보겠당."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떠한공?" / "주, 죽고만 싶당."("죽여주사이당."으로 되어있는 버전도 있다. "그저 죽어지어당."도 있다.)

이후 맹사성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그 선비를 잘 보살펴 뒤를 봐 주었다고 하공...

그런데, 맹사성은 그렇다 쳐도 저 와중에서 공당놀이로 다시 화답한 선비도 좀 짱인 듯.[11]

단 맹사성이 먼저 공당문답을 제안했다는 바리에이션도 있는데 이 버전은 공당문답의 상대 젊은이가 웬 싸이코가 찝적대냐는 식으로 속으로 생각하다가 나중에 맹사성의 은혜를 입은 뒤 공당문답의 그 싸이코(...)가 맹사성임을 알자 대경실색한다는 내용이다.

3 여담

창작물에 출연한 사례로는 드라마 용의 눈물대왕 세종이 있다. 용의 눈물은 배우 임혁주가, 대왕 세종은 안대용 이 각각 배역을 맡았다. 두 작품 모두 잘 알려진 것과 비슷하게 온화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묘사하고 있다. 용의 눈물에서는 왕권파의 인물로 그려지며 청렴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맞지만 강직한 캐릭터로 묘사되기 때문에 쓴소리를 많이 하고 소 리도 많이 친다. 후반에는 이화와 함께 민무질 형제를 벌해야 된다는 대사가 절반이다. 양녕과 함께 사신단에 포함되서 명나라로 가던 도중 이지성이 민무질 형제를 옹호하자 발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16년 사극 장영실에서는 김병기가 맡았다.
  1. 맹사성은 청백리가 맞지만, 황희는 사실 청백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알고보면 흑역사가 은근히 많았던 양반이기에... 자세한건 황희 항목을 참조.
  2. 요즘식으로 말하면 안행부 장관과 인사처 장관이 너무 유약해서 대통령 비서실장이 인사를 전횡하는 상황이라 생각하면 된다.
  3. 그런데 최영의 서녀는 우왕의 왕비다.
  4. 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던 쌀.
  5. 지금의 아산시 배방읍 쪽. 실제로 이쪽에 맹사성 고택이 있으며 2015년 기준 가장 오래된 민간가옥이다. 원래는 최영장군의 집(1330년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이 지었다고 함)이었으나 위화도회군 이후 비어있던 집에 맹사성 일가가 정란을 피해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택과 사당, 구괴정,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단을 망라하여 맹씨행단이라 부른다.
  6. 버전에 따라서는 아예 그 일대의 수령들이 죄다 모여서 진을 치고 있다고도 한다. 맹꽁이 서당의 경우는 두명으로 묘사했다. 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경우에는 진위(현재의 평택시 진위면) 현감, 양성(현재의 안성시 양성면) 현감 등으로 언급된다.
  7. 그의 호, 고불을 살짝 비틀어서 등이 꼬부라졌다는 뜻의 언어유희를 구사
  8. 참고로 조선시대에 이렇게 공인(公印)을 잃어버리는건 익직이라 하여 파면을 면치 못하는 중죄에 속하였다.
  9. 사실 심오할듯 심오하지 않은 의미가 담겨있는데, 의문형 어미인 '-고'가 변하여 된 공公과 종결형 어미인 '-다'가 변하여 된 당堂이 서로 '-ng' 으로 운자韻字가 맞추어져 한시漢詩적 율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10. 그리고 진짜 중요한 부분은, 노인인 맹사성이 '-고'의 성격으로 묻는데 청년인 선비는 '-다'의 성격으로 답하게 되어 장유의 구분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선비는 이것을 노리고 놀려 먹을 양으로 '공당문답'을 제안했던 것.
  11. 실제 선비가 곧바로 공당놀이로 대답하자 맹사성이 크게 감탄했다는 버전의 이야기도 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