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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 족청(族靑) |
설립 | 1946년 10월 |
해체 | 1954년 1월 |
1 개요
1946년에 창당된 대한민국의 정당이자 청년단체다. 이범석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약칭으로 '족청'이라 한다.
사건 순서 | 조선민족청년단의 통합과 창단, 창당 과정[1] [2] | ||||||||||||
1 | 대동청년단 | 청년조선총동맹 | 국민회청년단 | 대한독립청년단 | 서북청년회 | 20여개 군소단체 통합 | 조선민족청년단 | 국민회(國民會) | 대한노동조합총연맹 | [[농민조합연맹 |농민조합연맹]] | 대한부인회 | 공화민정회(원내 이승만 지지기반) | . |
2 |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창단 | ||||||||||||
3 | 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 이 조선민족청년단을 흡수함. | ||||||||||||
4 | 대한청년단 | 대한청년단, 자유당 내 이범석 족청계(조선민족청년단) | |||||||||||
5 | 5개 사회단체 연합 | ||||||||||||
6 | 1951년 12월 23일 이기붕 중심의 원내 자유당 창당 | 1951년 12월 17일 원외 자유당 창당(이범석 족청계) | |||||||||||
7 | 1953년 9월 자유당: 이승만 족청파 제거에 대한 담화 발표 | ||||||||||||
8 | 1954년 자유당 | 1954년 1월 이범석 족청계 완전 숙청, 해체(잔류세력 대한청년단에 흡수) |
이승만 집권 뒤 청년단체 통합 흐름에 의해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되었다. 이 조직은 이범석을 중심으로 모인 단체여서 자유당 창당의 핵심세력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자유당의 초기 집권세력이였다. 1951년 12월 이기붕 중심의 자유당이 결성되면서 부산에서 발기인대회를 갖는 등 권력투쟁에 나섰으나 이후 패배하여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은 자유당의 기원 세력 중 하나였다.
2 족청의 강령: 단지삼칙(團旨三則)
① 우리는 민족정신을 환기하여 민족지상·국가지상의 이념하에 청년의 사명을 다할 것을 기한다. ② 우리는 종파를 초월하여 대내자립·대외공존의 정신으로 민족의 역량을 집결할 것을 기한다. ③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며 원대한 곳을 바라보고(着眼遠大), 비근한 것부터 착수하여(着手卑近) 건국도상의 청년다운 순감(純感)을 바칠 것을 기한다. |
3 족청의 주요 인물
단장 | 이범석 |
부단장 | 안호상(安浩相) |
전국위원 | 김관식(金觀植), 김활란(金活蘭), 이철원(李哲源), 현상윤(玄相允), 이용설(李容卨) 등 32명 |
이사 | 백낙준(白樂濬), 최규동(崔奎東) 등 10명 |
상무이사 | 김형원(金炯元)·노태준(盧泰俊)·박주병(朴柱秉), 설린(薛麟), 김웅권(金雄權) |
4 선거
1948년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조선민족청년단 | 6석 |
당시 선거에서 무소속을 제외하고 4위의 성적이였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