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회

수북청년단과는 다르다!!수북청년단과는!!

경고! 이 문서는 충격을 유발하는 내용 혹은 표현이 포함된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사용자에 따라 불쾌감, 혐오감,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내용, 이미지, 외부 링크 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열람에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서를 열람하여 발생한 피해는 바다위키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문서를 읽고 싶지 않으시면 즉시 닫아주시기 바랍니다.


파일:KwG7bdQ.jpg

1 개요

[1]

인간 쓰레기들. 해방후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학살범죄단체. 존재해서는 안되었던 극악의 단체
대한민국에 실존했던 정치깡패 집단. 백색테러를 무수히 자행하던 조직이다. 서북청년단, 약칭 서청 이라 한다

초기 서북청년단의 강령
1.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2. 균등사회의 건설
3. 세계평화에의 공헌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단체들이 모여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에서 창단했다.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우기성을 선출했고, 중앙집행위원장 외에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가 설치되었다.

서북청년단의 창단과 행적
1946년 11월 30일선우기성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하여 서북청년단을 창단함.
1946년 8월북선청년회,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도회청년부, 양호단, 평안청년회와 통합협의
1947년 1월이선파(李鮮波)를 위원장으로 추대, 서울중구지부, 서부지구(평안북도), 인천지부, 청단지부등이 결성
1947년3·1절 기념식 남대문충돌사건
부산극장사건
좌익단체사무실점령사건
1948년 4월 3일 ~ 1954년 9월 21일제주 4.3 사건
1948년 9월서북청년회 합동파 대동청년단에 통합
1948년 12월 19일서북청년회 합동반대파 대한청년단에 통합
1950년 6월 25일 이후보도연맹 학살사건

이들은 주로 지주, 기독교계 인사[2], 민족주의자나 일부 친일파북한의 탄압을 피해서 도망온 젊은이들이었다. 실제 해방 후 한국전쟁 전까지 소련군정하의 기독교 박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단순히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거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기독교인 민족주의자 조만식선생이 한국전쟁 전에 고려호텔에 연금됐던것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탓에 한국전쟁 직후 북한에는 지주, 자본가, 기독교도,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죄다 월남한 탓에 숙청할래야 숙청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 생겨버린다. 하지만 박헌영이 출동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1949년 백범 김구를 암살한 범인 안두희도 젊은시절 이 곳 정회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2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과의 통합

사건 순서서북청년회의 통합과 흡수[3] [4]
1대동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국민회청년단대한독립청년단서북청년회20여개 군소단체 통합조선민족청년단국민회(國民會)대한노동조합총연맹[[농민조합연맹 |농민조합연맹]]대한부인회공화민정회(원내 이승만 지지기반).
2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창단
3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조선민족청년단을 흡수함.
4대한청년단대한청년단, 자유당 내 이범석 족청계(조선민족청년단)
55개 사회단체 연합
61951년 12월 23일 원내 자유당 창당1951년 12월 17일 원외 자유당 창당(이범석 족청계)

1947년 4월 지청천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기존의 청년 단체들을 통합하면서 서북청년회를 해체하고 대동청년단에 합류시킬 것을 요구하자 장택상은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조병옥 또한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서북청년단 해산을 반대했다.

1947년 4월: 지청천 대동청년단의 조직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5]광복청년회대한독립청년단[6]청년조선총동맹[7]서북청년회 합동파서북청년회 합동반대파
1948년 9월: 합동파 대동청년단에 통합서북청년회 제건 합동반대파(문봉제, 김성주)
1948년 12월 19일: 합동반대파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됨, 자연해체

한편 대동청년단 합류를 둘러싸고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었는데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는 문봉제를 위원장으로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고 초기 서북청년회가 김구 노선을 지지한 것에 비해 이들은 이승만 노선을 따라 이승만 친위대 역할을 했으며, 1949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되었다. 서북청년단이나 대동청년단 같은 기존 단체들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시킨데에는 다른 정치가들의 세력 기반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이승만의 의도도 한몫했다. 대한청년단은 총재를 이승만으로 단장은 신성모로 했다. 일부는 내분에 염증을 느껴 탈퇴를 하거나 군이나 경찰, 특무대 등으로 들어가는 등 제3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3 암살, 테러, 민간인 대량학살

1947년 삼일절 기념식을 따로 가진 좌·우익이 시가행진 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사건을 비롯하여 부산 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사무실 점령사건, 정수복 검사 암살사건 등 좌익 세력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고 경찰의 좌익 색출 업무를 도왔다. 제주도 4.3 사건에서 언급되는 토벌대로 불리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식 군대나 경찰이 아니라 이 서청이다. 가장 큰 문제는 빨치산을 색출하고 처벌한 것이 아니라 민간인, 때로는 군경의 가족에게조차 적법하지 않은 사적재재를 가했다는 점에 있다. 물론 빨치산은 지역 주민의 호응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이 글을 읽는 위키러가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라면(또는 반공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던 숙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맥락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나 서울대병원 학살사건등을 영원히 비판할 수 없게 된다. 1949년에 이루어진 제네바 협약에 의거하여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한 증오범죄는 금지되며, 이에 따라 서북청년단의 행동은 위법이다. 당장 ISIL이 왜 욕을 먹는지 생각해보자. 따라서 앞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감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서청 중앙본부의 문봉제 단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해명성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청년회를 파견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다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北韓硏究所, 北韓 1989년 4월호, 127쪽, 제주 4,3사건진상보고서, 271쪽에서 재인용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중산간마을인 애월면 광령리 주민이던 고치돈은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했다가 그곳에서의 무차별 총살에 놀라 다시 제주읍 외도리로 소개했다. 고치돈은 외도리 민보단장이 처가 쪽 친척이라 그의 배경으로 양민증도 비교적 빨리 얻었고, 특공대에 편입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고치돈은 특공대 시절 목격했던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출처 :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71쪽
1948년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 53)이 서청의 손에 고문치사 당한 사건도 서청의 위세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특히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 4,3사건진상보고서, 271~272쪽

3.1 다른면: 정부에게 이용당한 집단

다만 이 범죄도 정부가 조장한 부분도 크다.

예로 사설단체인 서북청년단을 군인으로 대량으로 공급한 것은 이승만 이다. 거기다가 제대로 된 배급체계도 갖추어주지 않아 사실상 학살을 조장하게 만들었다. 서청 경찰관 출신 박형요는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이 대통령의 허락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승만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라면서 이 사람들도 이승만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일 가능성을 주장했다.

자세한 건 이승만 문서에서 3.2.5. 제주도민 대량 학살 참고.

4 극우 선봉세력, 정치깡패 활동과 숙청

드라마 야인시대에 보면 서청의 활동상이 나와있다.

서북청년단은 정부수립 이전에 계림공작대라는 조직을 두고 독자적으로 대북공작을 벌이기도 했으며 이 조직은 정부수립 이후에 국방부와의 협력으로 호림부대라는 특수부대로 재편되어 북파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금강산까지 침투했던 호림부대원 상당수는 북한군 및 내무서원(경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생포되어 귀환한 자는 수십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의외로 서청 단원 중에서 성공한 사람은 몇 안 되며, 이들은 결국 한국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하여 궤멸되거나 그나마 운 좋은 경우에는 약간의 훈련을 거친 후에 예비역 장교 신분으로 국민방위군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역할에 배정되기도 했는데 이들조차도 후에 군인들을 굶겨죽인 죄로 처형당했다.(국민방위군 항목 참조) 이렇게 해서 지향점을 잃어버린 이들은 민병대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용가치가 없어진 서청 출신자들은 특별한 보상 없이 그냥 잊혀졌다. 남한군 예비역 육군 대령이자 언론인, 작가의 길을 걸었던 선우휘는 출신에도 불구하고 서청과는 거리를 두었다.(반공 성향은 이해하자.) 하지만 그의 말년 작품은 대부분 서청 출신으로 쓸쓸히 버려지는 사람들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가 진정으로 동인문학상을 주어야 할 작품이라 평한 "테로리스트"나 자신이 "대령"으로 등장하는 "오리와 계급장"이 대표적이다.

서청쪽 간부이고 유엔군의 북한 통치시기 이승만이 임명한 평안도 지사 대신 미군정에 임명돼서 벼슬을 한 김성주(김일성이 아니다.)는 이렇게 버려진 대표적 케이스, 그는 후일 반 이승만 음모혐의로 시간을 달려서 사형당한다. 정확하게는 고문치사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8] 시체를 헌병 사령관 집에 유기해버리고 사형 판결과 집행을 이전에 한 것처럼 날짜조작을 해버렸다. 4.19 이후에나 진상이 공개되고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김성주의 억울함을 증명한 건 같은 극우가 아니라 중도 보수였던 민주당이었다.

제3보병사단이 '백골부대'로 불리게 된 연유를 제공한 것도 서청 단원들. 제3보병사단(당시 3보병여단)의 제18연대에 자원입대했던 서북청년단원들이 '죽어 백골이 되어서도 고향을 되찾겠다'는 의미로 방탄헬멧에 백골을 그려넣은 데서 이런 호칭이 유래되었다. 헌데 서북청년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저 '백골부대라는 호칭의 유래가 된 단체'로만 알고 있어서, 이들을 건전한 청년단체로 아는 경우도 있단다(…). 충공깽. 사실 같은 단체 소속이었다고 해도 때로 몰려다니며 사적 린치로 민간인이나 죽이는 위험분자들에 비하자면, 언제든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혼란시국에 고향을 되찾겠다고 제대로 된 군대조직에 몸담은 이들이 훨씬 제대로 된 사람인 것은 맞다.

이 밖에 월남한 이북 청년과 학생들의 생계를 돕는 지원사업을 했고, 활동자금은 한반도 서북부 출신 실업가들과 미 군정청 고위관리들,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의존하기도 했고, 각 지방단의 유지로부터 염출하거나 미 군정청의 원조물자를 유출하여 자금화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제대로 된 조직 같아 보이는데, 전형적인 초기 조폭의 형태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돈을 받아서 정치 깡패이고, 각 지방단 유지에게서 염출했다라고 하는데 이건 당시 서청의 위치로 보면 거절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 삥 뜯은 것이고, 원조물자 유출은 현재도 아프리카 쪽 군벌들이 자주 하는 비리지만, 당시 조직폭력의 역사를 다루면 빠지지 않는 유형이다. 이승만 정권때 박살나긴 했지만 이 때 살아남았어도 아마 몇년 뒤 박정희가 정권 잡고 나서 털어버렸을 것이다. 정치권력에 기생하는 정치깡패들은 또다른 독재자의 눈에 들지 못하면 쉽게 구충되기 때문이다.

5 평가

태생부터가 폭력을 일삼는 극우 정치 깡패 조직일 뿐이다. 활동상만 보면 바로 정답이 나온다. 오죽하면 같은 우익조차 외면했다. 김성주의 비참한 최후는 이렇다. 서청은 같은 반공 세력에게도 환영을 못 받았다. 반공이 국시이던 당시 기준으로도 서청은 엄청난 만행을 자질렀다.

서청 출신자들은 "남한마저 사회주의 세상이 되면 살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생존차원에서 투쟁해야 했다"고 항변한다. 즉, 고향에서도 살해위협을 받으며 재산마저 빼앗기고 쫓겨났기 때문에 살아남으려고 과격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북청년회가 행한 일들이 합리화 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은 심각한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반공 이데올로기 아래 숨어서 처벌을 면하고 일부는 승승장구했지만 유죄는 유죄다.

이승만에게는 서북청년회뿐만 아니라, 삼우회도 있었다. 하는 일은 같다. 해방 이후 좌익들 사이에서는 이승만에게 삼우회가 있으면, 김구에게는 백의사(대동단이 후신이라고 한다.)가 있다고 소문이 났다. 여기에 양자 모두를 따른 것[9]김두한이 이끌었던 대한민주청년동맹, 약칭 대한민청이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중국의 어느 테러집단이나 일본의 정신나간 극우단체와 공통점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들과는 다른 점 역시 상당하다. 사실 서청이 한 짓은 구일본군이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한 짓과 비교하는 것이 합당한 수준이다. 가장 큰 특징은 명분은 크고 폼나게 내거는데, 정작 진짜로 사고친 것은 후방에서 한참 약자들 상대로 했다는 것이다. 보도연맹도 그렇고, 정치깡패짓도 그렇고, 제주도에서도 그렇다.

2014년 9월, 뜬금없이 이른바 서북청년회 재건위가 등장해서 이 단체를 부활시키겠다고 선언해 서북청년회가 어떤 단체였는지가 재조명받고 있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민주화의 수혜자들로, 제1공화국을 제외한 독재 시절이었으면 오히려 이들은 정치깡패 취급받아 남산에 끌려갔을 것이다. 이후 서북청년회 재건위는 2014년 11월 28일에 서울에서 재건총회를 개최했다. # 이 과정에서 수련관의 대관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진입해 강행했다고 한다.

2014년 10월 2일에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회 대표가 서북청년회 재건위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서북청년회 재건위에서 김구김일성꼭두각시였고 암살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인데, 이는 명백한 허위사실이다.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재건위 관계자들은 억울하다고 항변하며 정당성을 부르짖고 있다. 시사인에서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숙청된 김성주나 서청 관계자들에 대하여 말을 하자 그에 대하여 어물쩍 넘어가면서도 여전히 이승만 찬양이나 했다. 사실관계를 굳이 따지자면, 서청은 당시 국민방위군과 연관된 신성모의 세력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기붕을 띄우기 위해 이승만에 의해 고문 및 암살당함으로써 공중분해된다. 또한 한국에는 우파는 있지만 극우가 없다며 네오나치 같은 극우가 필요하다는 정신나간 헛소리를 하고 있을 정도. 사실상 본인들과 네오나치를 동류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10]

물론 독일 극우네오나치와 자기들을 동일시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11]

범인들의 연령으로 볼 때 생존 범인들이 존재한다고 봐야 하며 전쟁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없으며 국제법 관할이다. 미 군정은 당시 서북청년단을 테러집단으로 규정했으며 현재 같은 명칭의 단체가 이를 승계하는 단체로 볼 수 있는 경우 이 단체는 알카에다, 적군파, 미국 극우 민병대 처럼 테러집단이며, 정부에서 이를 비호 은닉했을 경우 테러집단 및 전쟁범죄자를 비호 은닉한 것이 되어 국제법상 큰 문제가 된다. 상당수의 고령 및 20대 일베 성향 유권자들이 이들의 과거 만행을 지지하고 있는 것도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90대가 넘는 우크라이나 나찌범죄자를 색출하여 전범재판에 회부한 사례도 있는 만큼 동일한 처분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물리적으로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 경우 국제적으로 최소한 서구 세계로부터는 고립을 감수해야 한다. ICC 관할 범죄이니 만큼 국제법에 따르는 유죄 판결은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큰 타격을 경제 기타 등 측면에서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체포 압송 재판 과정 등에서 특수한 형태의 충돌이 가능하다)

냉전시기에 서북청년회같은 극우 조직들이 기승을 부린 것은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남미나 아프리카에서도 극우 조직들이 형성되 빨갱이 사냥을 한답시고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콜롬비아의 "자위군"이라는 우익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동조하진 않고 단지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본거지에 거주했을 뿐인데도 부락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5.1 파시스트 세력의 왜곡

파시스트 세력에선 이 정치깡패 집단을 "(對)테러집단"이라고 왜곡하기도 한다. 관련은 조우석 문서 참고하자.

이주영[12]은 이 집단을 호국세력이라 왜곡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8권. 그간 금기시되어왔던 '서북청년회'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낸 책이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 직후 좌익들과 싸워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던 우익 청년단체의 하나인 서북청년회와 서북청년들의 건국, 호국 활동을 개략적으로나마 소개하고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남북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련군이 북한을 빨리 공산화시키려는 의지가 너무나 강해 미군과의 합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13] [14] [15]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좌익과 남북협상파들의 반대가 너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도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운다는 허망한 목표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우익 세력은 좌익과 남북협상파들의 친일파 숙청과 통일이라는 민족주의의 명분 앞에 주눅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유부단한 보수우익 세력을 반공과 건국의 방향으로 강하게 이끌고 간 세력의 하나가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들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탈출한 월남민이었기 때문에 전투적인 반공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대로 그들이 없었으면 치안유지도, 건국도 할 수 없었던 중요한 세력이었다.

6 관련 문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서북청년회
(시사상식사전-방문각)서북청년단
(위키백과-한국어)서북청년회
(디지털제주문화대전)서북청년회 제주도지부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제주4·3항쟁에 대한 인식

7 관련 항목

  1. 폭행만이 아니라 강도, 강간, 살인, 고문 등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은 거의 전부 저질렀다고 보면 된다. 전시상황이라고 옹호할 수 없는 것이, 이 자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단체였다.
  2. 해방 직후 평안남도는 조선에서 가장 기독교 비율이 높았다. 한경직 목사가 이들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3. 서북청년회의 통합과 흡수 과정-근거자료1
  4. 서북청년회의 통합과 흡수 창당 과정-근거자료2 (자유당)
  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5946&cid=46624&categoryId=46624
  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5474&cid=46623&categoryId=46623
  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3462&cid=46626&categoryId=46626
  8. 다만 재판부는 살인죄로 규정했다.
  9. 회장 유진산, 고문 신익희, 명예회장이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다. 당시 대표적인 우익지도자는 거의 다 보인다. 김두한은 감찰부장.
  10. 다만 한국에 극우가 없는 건 맞다. 극우나 극좌나 사회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 혼란=북한의 적화통일 시도 가능성 상승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큰 한국에서는 역대 정부가 좌우를 막론하고 극단주의를 처단했다. 독일에서는 네오나치들이 외부에서 간혹 시위라도 벌이지만, 한국에서 그랬다가는 국민들이 뭐라 할 것 없이 정부가 알아서 강제로 해산시킬 것이다. 당장 인터넷 공간에서조차 극우 논객들이 별다른 영향력 없이 혼자놀기를 시전하지, 조직화와는 거리가 멀다.
  11.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치 붕괴 이후 기존의 독일 극우세력들 중에 나치에 동조했던 인종주의자들은 무너지고 단순히 타민족에 배타적인 극우 민족주의자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들 극우세력은 외국인에게 배타적이긴 하지만 나치처럼 인종제일주의를 외쳐서가 아니라 그냥 독일 민족이 우선이라는 정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배기 극우들은 소위 정재계의 거물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데, 네오나치들은 사회불만 세력이 자기들의 사회적 경제적 불만을 약자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이름만 네오나치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나치에게 박해를 당했던 폴란드나 러시아에서 네오나치가 나오는 것인데, 이게 소위 진짜 극우들 눈에 찰리가 없다.
  12.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미국사가 전공인 사람이면 걍 미국사나 쓰지 왜 이딴걸 써!!!!
  13. 설득력이 별로 없는 주장이다. 해방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남북한 모두 좌익의 세력이 우익보다 강력했다.(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제 말기까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한 이들이 주로 좌익이었기에 민족적정통성에서 우월했다는 점이 그 하나다. 반면 우익들은 아예 노골적 친일로 돌아서거나 그 정도는 아니라도 항일운동을 사실상 포기한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더 급한 쪽이 미국이었을까 소련이었을까? 특히나 당시 소련은 동유럽에 정신이 팔려 동아시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제 패망 후 한반도에 진주할 때 소련은 미국이 분할 점령선으로 39도나 심지어 40도선을 제안하더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는 사실이 그 반증이다.
  14. 이외에도 아래에는 독단적인 주장이 많다. 이주영교수 전공분야도 원래 한국현대사가 아니라 미국사다.걍 미국사나 하지
  15. 12번의 주에서 설득력 없는 주장이라 했는데, 1992년 이후 러시아에서 공개한 스탈린-김일성-모택동 사이의 기밀문서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철저히 스탈린에 의해 기획되고 김일성이 수행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소련은 미국과의 합의 의사가 없었으며, 동북아 공산화의 교두보로서 한국의 공산화를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