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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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相允
1893 ~ ?

1 개요

한국의 교육자이자 사학자이다. 초대(初代) 고려대학교 총장이다. 3.1 운동에 적극 가담해 옥고를 치렀고, 그 후에는 교육자로서 민족운동을 펼쳤다.

2 생애

2.1 초년시절

189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1] 호는 기당(畿堂)이다.

진암(鎭菴) 현상준[2]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아버지 현석태는 문과에 급제하고 전적을 지냈으며, 근정전에 나아가 왕세자를 시좌하여 춘도기를 쓰기도 했다. 한일합방 때에는 방성통곡하고 조상과 임금께 큰 죄를 지었다며 달포동안을 미음으로 연명하였다고 한다.

평양의 대성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하였다. 당시 대성학교의 교장은 윤치호였다. 그러나 일장기 불게운동과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대성학교가 폐교되자 학업을 중단하였다.

1912년 스무살의 나이로 서울로 올라와 보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스물 두살 때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했다. 교비생(장학생)으로 합격하였기 때문에 등록금을 전액 면제받았다. 재학시절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였으며, 특히 한문실력이 뛰어나서 교수에게서 100점 만점에 120점을 받기도 했다. 일본 유학시절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홍명희, 정인보, 이광수, 신익희와 친하게 지냈다. 1917년 동경유학생 구국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모두 6편의 단편 소설을 썼다. 그 이후 문학가로서 전혀 활동하지 않아 그의 단편소설은 오랜 기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소설이 재평가를 받고 있다. 문학적으로 볼 때 우리 근대 단편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으로 주목 받고 있으며, 실제로 직접 읽어보면 요즘 소설이라고 말해도 믿을 만큼 문체가 매우 세련되고 간결한 것을 알 수 있다.

1918년 3월 와세대대학 문학부의 사학-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논문 '동서문화의 비교연구'는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동경제대학보에 게재되었을 만큼 그 내용이 탁월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2.2 3.1 운동에의 참여

그 후 1918년 중앙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중앙학교 교주는 인촌 김성수였고, 교장은 고하 송진우였다.

1919년 3.1 운동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장덕수와 협력하여 송진우, 최린, 최남선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거사를 도모했다. 천도교와 기독교계가 참여하게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로서 서명하고자 했으나 어린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 후 일본 경찰이 체포한 주모자 48인에 속해서 2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2.3 중앙고보 교장 시절

출옥 후 중앙보통고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서 얻은 폐결핵으로 오래 고생했다. 1922년 월남 이상재의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30대 중반에 폐병이 심해져서 5년간 생사를 오가며 투병하였다.

1931년 소설 '홍경래전'을 동아일보에 24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때 혁명남아로 이활, 이인좌, 정여립을 언급하면서도 홍경래전봉준이 그들보다 훨씬 더 높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홍경래전은 총독부의 검열에 의하여 삭제된 채 게재되는 등 수난을 당했다.

1932년 일본에 정변이 일어나자 그 이면에 있는 군부 파시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곧 동양에 전운이 휘몰아칠 것을 예지하는 글을 동광 제35호에 게재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후기 실학을 연구하여 유성원, 이익, 정약용에게 경제사상이 있음을 소개하였다. 특히 정약용을 아담 스미스에 비견할 학자로 높이 평가하였다.

1940년에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이면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경에게 수모를 당하였다. 당시 중앙고보가 일본어 교재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이때에 지적되었다.

1941년에는 일제가 금서로 지정한 책을 몰래 읽으면서 토론하는 '5인 독서회'가 중앙고보에서 발각되면서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일제가 5인 전원의 퇴학을 강압하였으나, 자청하는 학생 1인만 유기정학 처분하였고, '5인 독서회'의 지도교사인 최복현은 다른 곳에 직장을 알선하였다.

1944년 중앙고보 배석장교 사이또가 일본군에 자원입대를 권하는 연설을 장황하게 하였는데, 중앙고보 학생 가운데 1명도 자원입대에 응하지 않았다. 사이또가 욕설을 하고 물러가자, 교단에 올라가 입대에 불응한 학생들 모두를 칭찬하였다.

1945년 4월 중앙고보 2층 강당에서 일본 배석장교가 학생들에게 소년항공학교 지원을 강권하는 연설을 했는데, 이에 몇 명의 학생이 지원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 학생들의 부모에게 급히 전보를 띄우고 학부모들을 불러 "자식을 어떻게 가르쳐서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게 만드느냐"고 엄히 힐책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동년 9월에 미군정에 의해 경성대학의 예과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면서 중앙고보 교장을 사임하였다.

2.4 고려대학교 총장 시절

1946년 2월에는 경성대학 예과부장을 사임하고, 보성전문학교 교장이 되었다가 보성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승격하면서 초대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총장이면서도 매주 교양 강좌를 통해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다. 좌우 대립으로 혼란스럽던 상황이었으나, 이념과 관계없이 교수로서의 능력이 있다면 보호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우파적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좌파 지식인의 활동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교수들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하여 개방적이면서도 학구적인 대학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총장 시절 공사 구분이 엄격했으며 지독히도 청렴했다고 한다. 봉급을 올릴 때 자기 봉급은 전혀 올리지 않고, 교수들과 직원들 봉급만 올렸으며, 총장용 승용차는 업무에만 이용하고 출퇴근시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1949년 12월에는 저서 '조선유학사'를 발간하였다. 1950년 1월에는 '한글전용 어떻게 보나'라는 토론회에 참석하여 한글전용 운동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낙원동 인근에 은신하다 8월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이때 탈출이 용이하여 함께 수용되었던 인사가 탈출을 권유하였으나, "공산당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나를 잡아두고 어쩌겠습니까? 사상이 서로 다르다고 하여 죽이겠습니까? 그들이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 공산당을 우리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탈출하지 않으렵니다."라고 하며 태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후 생사는 불명이다. 필생의 저서 '조선사상사' 원고는 당시 출판사에서 조판중이었는데, 전쟁으로 인하여 모두 분실되고 말았다.

1949년에 출간한 저서 '조선유학사'로 나중에 고려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박사학위이다. 하지만 현상윤 본인은 정작 자신의 박사학위증을 만져보지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학위심사를 통과한 1953년은 이미 납북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현상윤 박사의 학위수여식은 궐석으로 진행되었고, 학위증을 낭독하던 당시 고려대학교 총장 유진오는 오열했다고 한다.

3 학문적 업적

서구 학문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우리의 유학, 특히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여 당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표로 삼고자 한 점에서 돋보인다.관련 글 참조

대표저서라고 할 수 있는 '조선유학사'는 단순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정리에 그친 것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 체계적인 저술이었다. 여기서 조선 유학의 주류는 성리학이라고 규정지은 후에, 조선 유학이 조선사상사에 미친 공(功)과 과(過)를 지적하였다. 우선 공은 소인이 되지 말고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군자학을 권장한 점과 인륜도덕을 숭상하고 청렴절의를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어낸 것을 꼽고 있다. 반면에 과로는 모화사상과 당쟁, 가족주의의 폐해, 계급 사상, 문약, 산업능력의 저하, 복고 사상 등을 꼽고 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살피면서도 그 역사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는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 서경덕에서 이언적, 이황, 조식, 이항, 김인후, 기대승, 이이, 성혼, 장현광에 이르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들을 두루 살피고 있다.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반대하였고 율곡 이이의 기발이승설을 천세에 빛날 단안으로 표현할 만큼 극찬했다.

일찌기 장지연이 조선 유학에 관한 정리를 시작했지만 아직 학문적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는 못했는데, 현상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학문적 체계를 갖춘 유학사상에 관한 정리가 이뤄졌다.

4 가족관계

1904년 열두살의 나이로 오산학교 초대 교장 백이행(白彛行)의 딸 백숙량(白淑良)과 혼인했다.[3]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중앙고보 교장 시절 장남을 일찍 잃었다.

차남 현인섭은 의사로서 이화여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현인섭의 3남 현재현은 부산지검 검사 시절 동양그룹 창업주 이양구의 맏사위가 되었고, 1989년 장인이 타계하자 동양그룹 회장직에 취임했다.
  1. 춘원 이광수와 고향이 같다. 이광수보다 1년 늦게 태어났다.
  2.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충북 제천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독립투사이기도 했다.
  3. 백숙량이 현상윤보다 5세 연상이었다. 장인 백이행은 관서지방의 선각자로 정주에 육영소학교를 설립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