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 유일의 방송 네트워크. 조선총독부가 운영했으며, 한국의 한국방송공사와 그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의 시초이다. 당시 경성(서울)지역 호출부호는 JODK였으며 이후 부산, 평양 등지에 지역국이 개설되었다. 해방과 분단 이후 남측 지역의 방송국은 서울중앙방송국(오늘날의 KBS 라디오)가 된다.
2 라디오 방송의 시작
조선방송협의 송출 역사는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를 기원으로 하며 이 날 개국한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JODK)이 모체이다. 이는 동양에서는 4번째. 사실 당연한 것이... 아시아의 라디오 방송이라는 게 도쿄의 JOAK를 시작으로 오사카, 나고야 다음으로 개국했기 때문에, 일본의 무선호출 국가코드인 'JO' 다음에 네 번째인 'D'코드를 부여받은 것. 이러한 연혁 때문인지 몰라도 아직도 NHK의 호출코드 중 JODK는 결번이다.(....)
송출개시 전파는 겨우 1 kW에 불과했으나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미국에서도 약하게 감지되어, 어느 아마추어 전파동호인이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역시 양덕후
원래는 1924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매일 시간을 맞추어 시험방송을 하고 있었지만 이 기록은 방송 관계자들이 그냥 기록으로만 취급하고 있는 듯.
3 경성방송국 시대
(경성) 안테나 중천에 솟다 ((京城)アンテナ中空に聳ゆる)제오데케 경성중앙방송국 (ゼ・オ・デ・ケ 京城中央放送局)
경성방송국 전경. 네모진 방송국 건물에 비해 그 앞의 구세군 본부가 좀 더 고풍스럽게 생겼기에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개국 당시의 어수룩한 방송환경 때문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은데, 자세한 것은 류승범 주연의 영화 '라듸오 데이즈', 혹은 이 각본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다른 책으로도 잘 나와 있다.
- 방송국 건물은 경희궁 인근의 언덕배기(현 덕수초등학교 터)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꼬불꼬불한 골목을 헤메다 출연자가 방송에 지각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방송은 전문 아나운서 외에도 경성 시내 유명한 기방의 창기를 불러다 노래 리사이틀을 하는 식으로 컨텐츠를 때웠기 때문.
- 가장 유명한 방송사고는 일명 '닭 사건.' 새해 첫 날 장닭이 우는 소리를 방송하고자 했는데 당최 이 닭이 울어야 말이지요(...).
- 개국 2~3년차에는 아나운서와 성우들이 방송 라디오 단막극을 진행했는데 이것이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연속극으로 전향했다. 영화에서는 김뢰하가 대본 작가로 나온다. 당연히 모든 방송이 생방송이었으므로 F.I~F.O에 깔리는 시그널음악을 제외한 모든 음향효과는 실제로 배우들이 열연한 것이었다고(...) 스폰서로 들어간 냉면 먹는 장면에서는 실제로 한일관에서 냉면대접을 한 그릇 시켜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그 스폰서는 '아지노모토'(...)
- 영화에서는 독립운동 단체의 어수룩한 행동으로 나오지만, 사실 개국 초기 전파 잭(jack) 사건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공학도 학생들의 장난기였다.
카이스트 너드 클럽의 조상격전파재킹 자체도 별 내용이 없어서, 그저 "아, 아, 흠, 에, 이 방송은 JODK보다 더 좋은 방송이올시다..." 이걸로 끝이었다고(...).
4 라디오의 정착과 관영방송의 한계
JODK 개국 후에는 일본방송협회(NHK) 소속에서 떨어져 나와, 일제 총독부 유관기관인 '조선방송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구 일본제국 체제 하에서 언론이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기는 힘든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ODK는 1933년에 들어 출력 10Kw의 연희 송신소[1]를 신설하여 일본어 채널(제1방송)뿐만 아니라 조선어 채널(제2방송)까지 두 개의 라디오 채널을 제공했다. (위에서 서술한 개국 3년차의 연속극도 조선어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연속극이나 명사의 리사이틀 등 점차 대중으로부터 조선어 방송의 반향이 오자, JODK도 조선어 방송 비중을 늘려나가게 된다. 1933년에는 3천 대에 불과하던 라디오 수상기의 보급대수도 불과 3년만에 22,751대까지 늘어났던 것. 예나 지금이나 막장쪽대본드라마는 시청률은 잘나온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은 중국 상하이에 50KW의 고출력 송신소를 세워 방송을 개시한다. 아무래도 아시아판 릴리 마를렌을 노렸던 건지 그러자 일제도 이에 반응, 1937년에 연희송신소의 송신출력을 10Kw에서 50Kw로 증강했다. 이 연희송신소는 6.25 중에 인천상륙작전 후 이를 되찾으려는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연희송신소가 세워지고 출력증강이 이루어지던 이 시기에 전국방송망이 구축되기 시작했는데, 1935년에 부산방송국이 개국한 것을 필두로 평양, 청진, 이리, 함흥에 1차로 지방방송국이 개국했다. 이어 2차로 대구, 광주, 강릉, 목포, 마산, 대전, 원산, 해주, 신의주, 성진, 춘천, 청주에도 차례로 지방방송국이 개국했다. 이들 지방방송국은 청진의 10Kw 송신출력을 제외하면 모두 50w~500w의 저출력으로 방송이 송신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어 방송인 제2방송은 1940년의 조선언론 탄압정책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의 개전으로 인해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던 중 제2방송은 1942년 12월 발생한 단파 방송 감청 사건(위키백과 링크)으로 한국어 방송 실무자들이 줄줄이 연행되는 등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결국 1943년 6월 제2방송은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이후에는 일본어로 된 방송만 실시하였고 그 내용도 태평양전쟁 전황보도[2]나 히로히토의 연설 등 태평양 전쟁에 관련된 것들 뿐. 당연히 청취율이 좋을 리 없었고, 쌀 한 말 값에 육박했던 청취료 때문에라도 더더욱 라디오를 안 듣게 되자 나중에 일제 당국은 각 관공서와 동네 부잣집 등에 강제로 라디오 수상기를 떠안기고 수신료를 받아가는 형식으로 방송을 듣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