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

MBC의 프로그램인 우리들의 일밤 2부 코너에 해당되는 것의 줄임말로 해당 항목은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 참고.
수은의 화합물로 된 광물은 주사 참고.

1 정의

진사(進士)는 과거 제도에서 해당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조선중국에서 모두 사용된 단어지만 의미는 다르다.

1.1 조선의 진사

과거 시험 중에서 초시 중에 진사시에 합격 한 사람으로 벼슬은 아니나 합격을 하면 성균관에 입학 하거나 하급관리로 임용될수 있는 자격이 있다. 당연히 대과에 응시 할 자격도 주어진다.

조선 사대의 신분제도는 3대내에 아주 작은 벼슬이라도 한 적이 없으면 양반으로서의 위치가 소멸하는데,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군역과 요역이 나온다[1]. 이 때문에 지방 듣보잡 가문이라도 집안에 진사를 내기 위해서 집안 기둥뿌리를 뽑을 각오를 해야 했다. 산림으로 자처하며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던 학자들도 체면치레상 진사나 생원은 따놓고 공부했다.

실제로 조선 중기 이후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지방 양반들은 진사시험에 합격한걸로 고장에서 수령을 제외하고는 상당한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사실 수령도 든든한 백이 없으면 향반들이 떼로 몰려서 위세부리는거에 꼬리를 마는 수 밖에 없었다. 수틀리면 상소하고 관에 협조 안하고 그랬던지라...

1.2 중국의 진사

조선의 진사와는 신분이 전혀 다르다

중국 명나라 청나라 왕조 시절에 끝판 엘리트. 보통 3년마다 한번 볼때 단지 400명 정도만을 뽑았다고 하니 가히 그 어마어마한 난이도를 짐작할수 있다. 참고로 건륭제 연간 중국의 인구가 무려 3억명이었다.

조선의 진사와 달리 중국의 진사는 과거시험 최종합격자를 의미한다.

중국은 남쪽 특히 절강 강소 강서성 출신들이 경제력이 부유하고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서 싹쓸이 하자 남과 북에서 관할을 나누고 지역별로 쿼터를 두어서 반씩 뽑았다. 이렇게 일종의 할당제로 남경과 북경에서 나눠서 열리는 '회시'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는데 이후 몇 달 후 북경에서 황제 앞에서 등수만 가리는 시험인 '전시'를 볼 자격이 있는 신분을 의미한다.

전시에서 1등 합격자를 장원(壯元),2등 합격자는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 라고 지칭하며 특히 더 우대했다. 이들은 등수는 관례적으로 황제가 뽑으나 전시과가 끝나고 나서 잔치에서 1,2,3등 합격자는 친히 황제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친왕(親王)이라도 할지라도 받지 못하는 대접이었다. 진사출신을 이만큼 나라에서 예우한다는 의미이며 당연히 술잔을 받은 합격자는 평생 잊을수 없는 자랑거리이고 몇대에 걸칠 가문의 영광이다. 을(乙) 1갑(一甲)과 수십명의 2갑 상위권 중에서 상위권은 한림원으로 천거되고 2갑 나머지는 육부(이호예병형공)에 배치, 대부분의 3갑은 보통 지방 수령직부터 시작하는데 한림원에서 황제의 칙서나 외교문서 같은 공문서를 작성하다 연차가 쌓이면 지방급 향시 시험감독관으로 인맥을 쌓고 이후 요직에 등용되는 것이 전형적인 출세 테크였다.

1.2.1 진사 출신의 폐해

1.2.1.1 붕당(朋黨)

여기서 진사를 뽑는 즉 중국 과거시험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생기는데 중국의 선비들은 조선과 달리 자신에게 어릴 때 글을 가르쳐 주거나 서당에서 가르쳐준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돈을 받고 가르쳤으니 지식을 사고 판 것이고 장사꾼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스승은 아무 대가 없이 글 하나만 보고서 자신을 과거에서 뽑아 준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딱히 틀린 논리도 아닌 것이 인원 수를 워낙 적게 뽑으니 글만 보고 자신을 진가를 알아주고 발탁 한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평생 스승으로 여기며 떠받들다 보니 자연히 이들을 중심으로 한 파당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몇 년도 북경시험 감독관이 뽑은 200명의 진사는 평생 그사람의 문하생이 되는것이고 몇 년도 남경시험에서 뽑은 진사들은 역시 그 사람의 제자가 되는것... 이러한 사제관계 문화는 지방시험인 향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동문 스승의 스승, 제자의 제자 까지 헤쳐모여서 서로 끌어 당겨주고 반대파는 막고하는등의 붕당질 병크를 일으키는데 오랜 과거시험을 위해 몇 십년동안 책을 몇 수레씩 읽은 사람들이 하는짓이 이런 짓이라는것....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명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중 하나로 꼽힌다.

청나라 시절에는 만주인들이 한인들에게 요직을 맡기지 않았기에 오히려 덜 했다... 만주인들은 신분이 높으면 과거 안치거나 자기들끼리만 특별 시험을 쳐도 한인들보다 출세하기 쉬우니...

1.2.1.2 팔고문(八股文)

또 다른 폐해론 팔고문(八股文) 다리고문이 아니다 정작 股는 다리 '고' 을 들 수 있는데 송나라 시절부터 만들어진 문체인데 어릴적부터 과거시험을 준비하다보니 경전을 외우는것은 기본이요 모든 글을 팔고문식으로 연습하는 바보짓 벌어져서 경학은 당연히 뒷전이고 중국문학 발전에도 최대 걸림돌 이었다. 20세기 들어중국의 문호 루쉰이 신문화 운동 당시 척결 1순위로 꼽을정도... 명청 시대 당시도 나라 다스리는데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것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지만 과거제도를 유지하는데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하던대로 계속 썼다는게 문제..

팔고문은 본래 오늘날 논술학원에서 배포하는 좋은 글쓰기 모범사례에 가까운 것이었다. 8단계로 나누어서 글을 쓰는데 오늘날 글을 쓸 때 기-승-전-결, 서론-본론-결론으로 쓰라고 하는 것처럼 팔고문 역시 "과거 시험에서 답안을 작성할 때 이렇게 작성하면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는 하나의 틀이다. 먼저 1)시험 문제를 해석하고 2)문제에 담긴 출제자의 의도를 분석하며 3)출제자의 의도를 자신의 주장과 연결시키고 4)자신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극히 논리적인 글쓰기 방법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다음에 오는 5, 6, 7, 8 단계가 문제가 되는데 이걸 오늘날로 치면 권위있는 텍스트를 각주로 인용해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가 된다. 고전에서는 이를 두고 성인이 대신 말하게 한다고 하는데 과거시험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텍스트라고 하면 사서오경뿐이고 여기에서 시험문제와 관련이 있을만한 텍스트를 골라 뽑을 수 있는 양도 한정되어 있었다.[2] 게다가 오늘날 논술학원 등에서도 강조하는 것처럼 글의 전체 분량이 알맞게 배분되어 있어야 고득점을 받기 때문에 앞에 나온 1,2,3,4 단계와 5,6,7,8 단계를 적절한 분량으로 맞추는 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주장을 뒷받침하는 텍스트를 선정하기 보다는 알맞은 분량의 텍스트를 완성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졌고 결국 이 단계의 답안을 작성할 때는 서로 대구를 이루어 고정된 형식으로 고착되었다. 이게 마치 8개의 다리를 늘어세운 것 같다고 하여 팔고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결국 과거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해선 양질의 텍스트를 고르기 위한 책읽기<<<<<답안지의 분량을 맞출 수 있는 글쓰기 연습이 되어버렸다. 팔고문이 공부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시험공부로 변질시켜 버린 것이다.

2 기타

한국에서는 중국사에 왠만한 관심이 없는 이상 조선의 진사와 중국의 진사를 혼동하거나 동급으로 놓는 잘못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단순히 인터넷글 뿐만 아니라 출판물에서 조차...

참고로 중국에서 거인(擧人)이라는, 지방 성(省)급 시험에 합격하여 남경이나 북경에서 열리는 회시를 볼 수 있는 신분이 있었으며, 조선의 진사와 유사하다. 거인 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라서 거인이면 관원에게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있고 사대부 취급을 받았다. 낮은 관직으로 임용이 가능하고 합법적으로 '납연'이라고 불리는 매관매직을 통해서 조정관리로 임용이 가능했다.

명나라 시절엔 고위직까진 어려웠지만 청나라에선 납연관으로 옹정제시절 전문경이라는 거인 출신 납연관이 종1품 하남총독직에 임용되었는데 워커홀릭 옹정제에게 성실함으로 점수를 따서 가능했다. 옹정제는 한인 문인 관료들의 패거리 문화를 경멸했기 때문에 이들을 까는 용도로 전문경을 출세 시켰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거인신분도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뒷받침이 되어야 몇십년간 과거 공부를 할수가 있기에, 지방 향신층으로 분류되는 지배 계층이 독점했다. 지방 시험부터 동생-수재-거인 테크를 타는데도 보통 20년은 족히 걸렸다고..
  1. 이전 버젼에서는 시험을 칠 때 3대조의 이름을 쓰는 것을 언급했는데, 이것은 역적죄인의 후손이면 과거 응시불가, 서얼의 후손이면 문과응시 불가라는 것 때문이다. 조선후기에도 쌩평민들도 과거에 합격한 사례가 보인다. 물론 이 사람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정도로 고위관직까지 진출한 사례는 없지만.
  2.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경전에 대한 주자의 견해만이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