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근·현대 작곡가. 홀로 미국 모더니즘 음악을 개척한 선구자로 말년에 재평가되어 미국 현대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1 생애
찰스 아이브스는 1874년 미국 코네티컷 주 댄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지 아이브스는 전직 군악대장으로 지역에서 밴드를 이끌다가 말년에 생계 문제때문에 음악을 포기하고 은행에 취직한 인물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그가 음악에 대해 덕업일치를 포기하고 아마추어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와는 관계없이, 아이브스는 일찍이 음악에 대한 능력을 드러내었다. 12살에 밴드의 드럼 주자로 데뷔, 13살에는 교회에서 전속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될 정도였다. 주로 지역 아마추어 악단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정통 클래식 음악보다는 대중 음악, 행진곡 등을 연주하는 일이 잦았고, 당연하게도 단원들이 삑사리를 내서 불협화음을 내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에게 불협화음에 대해 관대하도록 만들어 주었고, 후에 그의 무조 음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1894년에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아이브스는 당시 미국의 대표 음악가 중 한 명인 호레이쇼 파커에게 작곡을 사사한다. 이당시부터 아이브스는 불협화음을 자신의 음악에 활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로 인해 보수적인 그의 스승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당시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당시 발표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1번'(1898)이 있는데, 이 작품은 50년이 넘은 후 1953년에 가서야 초연이 된다.(…) 대학을 졸업한 후 아이브스는 보험 영업사원으로 뉴욕 뮤추얼 생명보험사(AXA생명보험의 전신)에 입사, 사회에 발을 내딛는다. 업무 능력도 출중했는지, 아이브스는 1907년에 동료 미릭과 자신의 이름을 딴 보험사를 설립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자산 관리면에서는 책을 쓸 정도였다고. 직장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도, 아이브스는 꾸준히 작곡을 하면서 음악 활동에도 힘썼다. 사무실 금고에 악보를 쌓아놓고, 결혼 전까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할 정도였다고. 음악면에서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무조음악과 다양한 리듬을 실험하고, 미국의 전통 음악과 소재들을 음악에 활용하는 시도를 하면서 미국 현대 음악의 길을 홀로 열기 시작한다. 이 당시 작곡한 작품들로는 '교향곡 제2번'(1901), '어둠 속의 센트럴 파크'(1906), '대답 없는 질문'(1906)등이 있는데, 이 당시에도 작품들은 여전히 빛을 보지 못했다. 위의 세 작품이 초연되는 것은 각각 1951년, 1946년, 1946년. 거의 50년 가까이 걸렸다(…)
1907년, 갑작스런 심장 질환과 그 다음 해 결혼 이후 그의 인생도 달라진다. 좀 더 작품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건강 문제로 1918년 작품 활동을 줄일 때까지 많은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이 당시 그의 대표작들이 쏟아졌는데, '휴일 교향곡', '뉴 잉글랜드의 세 장소', '교향곡 제4번', 피아노 소나타 제2번 '콩코드' 뭐?, 바이올린 소나타 제1~4번 등이 있다. 이들 작품은 무조성과 다양한 리듬 등 아이브스의 특징이 잘 살아있고, 소재 면에서도 미국의 문화와 예술에 기반하고 있어 그의 작품 세계가 완성된 시기로 보여진다. 그러니까 이제 초연만 되면 되는데….
1927년, 그는 절필을 선언한다. '아무것도 맞게 울리지 않는다.(Nothing sounds right.)'라는 말과 함께 이루어진 1954년 사망 전까지 계속된 이 침묵은 장 시벨리우스의 침묵 다음으로 미스터리한 절필이다. 음악활동은 그만두지 않아 다른 작품을 수정하곤 한 점을 고려해 볼 때, 건강 문제로 절필을 선언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후 1930년 사업에서도 은퇴, 새로운 작품을 쓰지는 않고 기존 작품들을 손보는데에만 힘썼다.
그가 재평가된 것은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후였다. 1930년대 들어 몇몇 작품이 초연되기 시작하엿고, 1940년대 루 해리슨, 버나드 헤르만 등 지휘자들이 그의 교향곡을 초연하면서 재평가의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7년 퓰리처상 음악상이 그에게 수여되면서 본격적인 재평가와 관심이 쏟아졌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상은 애들이나 받는거지, 나는 다 컸다."라며 불평했다. 너무 늦었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평가받기를 거부한다는 뜻이었을까. 아이브스는 1954년 뉴욕에서 뇌졸중으로 숨진다.
2 음악의 특징
아이브스의 음악은 '실험성', '토속성' 두가지로 요약가능하다. 실험성 면에서 보았을 때 아이브스는 정말 튀는 존재이다. 쇤베르크가 1900년대 후기 낭만주의에 연속해서 12음 기법으로 무조성을 실험했을 때, 아이브스는 그러한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홀로 무조성, 다양한 리듬 등을 실험하면서 선구자의 길을 걸었다. 한편, 토착성 면에서 아이브스는 미국적인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미국, 특히 동부 뉴잉글랜드의 문화, 예술에 기반하여 작품을 써왔고, 행진곡 리듬 등을 활용하여 토속성을 높였다.
3 초연 수난사
위에서도 말했지만, 아이브스는 시대를 앞서가서인지 정말 운이 없었는지 자가 작품의 초연, 출판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의 작품 중 '114개의 가곡'은 자기 돈으로 출판을 해야 했고,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대다수의 작품들이 완성된지 수십년이 지난 후에야 초연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나마 생전에 자신의 작품들이 초연되는 것을 본것이 위안
아래는 그의 작품이 초연되는데 얽힌 에피소드들이다. 정말 안습 그 자체.
- 아이브스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초연해줄 연주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고, 가까스로 바이올리니스트 한 명을 찾았다. 그러나 그 연주자는 리허설을 하기 위해 첫 페이지를 보고서는 '맛없는 음식을 토하면 되는데, 이딴음악은 귓속에 계속 남아있을거다!'라며 연습실을 박차고 나갔다. 결국, 초연도 취소(...)
- 교향곡 제3번은 1911년에 초연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뉴욕 필하모닉에서 상임 지휘자로 재직하던 구스타프 말러가 이 작품을 혁신적이라고 극찬하면서 1911-1912시즌에 초연을 기획했다고. 말러가 뉴욕필에서 미국 작곡가들의 신작들을 많이 지휘해 무대에 올린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는데…. 말러가 1911년 죽었다. 결국 연주 계획도 백지로. 아….
4 작품 목록
4.1 교향곡
교향곡 제1번
교향곡 제2번
교향곡 제3번 '캠프 미팅'
휴일 교향곡(A symphony - New England Holidays)
교향곡 제4번
우주 교향곡(미완성)
4.2 실내악곡 및 독주곡
오르간을 위한 '미국' 주제에 의한 변주곡
현악 4중주 제1번 '구세군으로부터'
피아노 소나타 제1번
피아노 3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현악 4중주 제2번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바이올린 소나타 제4번
피아노 소나타 제2번 '콩코드'
4.3 관현악곡
서커스 밴드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어둠 속의 센트럴 파크'
로버트 브라우닝 서곡
뉴잉글랜드의 세 장소(관현악 모음곡 제1번)
관현악 모음곡 제2번
4.4 성악곡
시편 모음집
114개의 가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