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계왕

" />?width=50
백제의 역대 국왕
8대 고이왕 부여고이9대 책계왕 부여책계10대 분서왕 부여분서
시호책계왕(責稽王) / 청계왕(靑稽王) / 책찬왕(責贊王)
부여(扶餘)
책계(責稽) / 청계(靑稽)
생몰년도음력228년[1] ∼ 298년 음력 9월 (70세)
재위기간음력286년 11월 ∼ 298년 9월 (13년)

기록이 적은 백제의 왕들 중에서도 특히 기록이 적은 왕들 중 한명. 캐안습그래도 사반왕보단 낫다

백제의 제9대 국왕/건길지

일명 청계(靑稽) 또는 책체(責替)라고도 한다.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1 군사

286년(책계왕 1년)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 지금의 서울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였다.[2]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薨

13년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그러나 298년 한군(漢軍: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동예로 추정됨.)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2 내정

286년(책계왕 1년)에 허물어진 위례성을 수리했다.
287년 음력 1월에 동명묘에 참배했다.

3 그 외

재위 기간이 13년이나 되지만, 기록이 대단히 짧다. 또한 책계왕은 대방태수의 딸인 보과와 언제 결혼했는지조차 모른다. 대방태수의 딸과 결혼한건 낙랑을 섣불리 공격한 대가로 대방태수와 정략결혼하여 화근을 덜어보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중국에서 삼국시대가 끝나고 나라가 등장, 이후 한군현 세력이 다시 부활해 반격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책계왕이 목숨을 잃은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추정된다.

한, 중, 일 삼국의 모든 역사책을 뒤져봐도 책계왕의 기록은 저게 전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다만, 풍납토성의 최초 개축 시점이 바로 이 임금의 재위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고고학적 분석이 있다.

분석과학 제25권 제5호 2012.10 "OSL 연대측정을 통한 풍납토성 축조연대 산출이란 자료"는 풍납토성의 축조연대 편년을 위해 각 토기 시료의 OSL 연대와 고고학적 맥락, 14C 연대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여, 풍납토성의 초축시점을 294±52 yrs AD (1σ SE),제 III 단계 증축을 328±30 yrs AD (1σ SE), 최종성벽의 완성을 400±76 yrs AD (1σ SE)로 비정한 바 있다.

294년이란 연대에서 오차가 앞뒤 52년이니 고이왕 대에 개축했을 가능성도, 혹은 그 이후 임금대[3]에서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문헌 자료와 비교해볼 때 적어도 고이왕 대에 고대 국가다운 꼴이 갖춰져 풍납 토성이 개축되었거나, 혹은 고이왕 대에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책계왕 때에는 개축이 완료되었을 개연성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一月 책계왕이 즉위하다
一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다
一年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三年秋九月 책계왕이 죽다

재위 13년인데 기록이 고작 5줄이다.

  1. 위키백과에만 기재. 정확한 출처 있으면 기재해주세요.
  2. 단, 이 기록은 백제본기 책계왕대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해 고구려본기 서천왕대에는 이 기록이 없다. 그 해는 서천왕 17년으로 일우와 소발의 모반하였으므로 그런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 경우 이병도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이 개재(介在)하였으므로 이는 불가능하다고 하였고 미천왕 15년에 대방군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 비류왕 11년의 일이 옳은 이치라 보았다. 그 외에 타국의 군사를 고구려의 군사로 착각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3. 최대 하한으로 미뤄보면 근초고왕 재위 초반까지 내려가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