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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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대 국왕
9대 책계왕 부여책계10대 분서왕 부여분서11대 비류왕 부여비류
시호분서왕(汾西王)
부여(扶餘)
분서(汾西)
생몰년도음력? ~ 304년 10월 (미상)
재위기간음력298년 9월 ∼ 304년 10월 (7년)

백제의 제10대 국왕/건길지

1 업적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표(儀表)가 뛰어나 부왕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한군현(漢郡縣) 세력의 침입을 막다가 부왕인 책계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304년에 낙랑군(樂浪郡)의 서쪽 현(西縣)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2 죽음

아들인 분서왕도 아버지인 책계왕과 마찬가지로 낙랑 등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폈던 것으로 보이나...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에 대해선 다음으로 왕위에 오르는 비류왕이 분서왕을 죽이도록 낙랑에 사주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알 수 없다.

또 다른 설로는 책계왕에 이어 분서왕까지 한군현의 세력에 살해당할 정도면 백제의 위용이 한군현에 크게 압박을 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근데 왕이 암살당할 정도면 막장인데

그리고 '황창랑(黃昌郞)'이란 이름의 신라 출신 소년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창랑이 바로 삼국사기에 언급되는 '낙랑에서 보낸' 분서왕을 죽인 자객이라고 서술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황창랑이란 인물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조선시대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름.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되는 인물이다.

황창랑은 신라 어느 대의 사람인지 모르나,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그가 여덟 살 난 어린애로써 신라왕과 꾀하여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자에 가서 검춤을 추니 저자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라 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한다. -<동문선>
도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효종대왕께서도 후원(後苑)에서 기예를 시험하셨는데, 그때에 이상진(李尙眞)이 백제(百濟) 황창랑(黃昌郞)의 검무(劍舞)의 일을 끌어대기까지 하면서 간쟁하였습니다.”-<현종개수실록> 현종 5년(1661년) 6월 11일

조선시대에도 황창랑이라는 소년 검객이 백제왕을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모양인데, 어느 기록에서도 황창랑이 찔러 죽인 왕이 분서왕이라고 콕 찍어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래도 유명하긴 했는지 황창랑의 이름을 딴 '황창랑무'라는 검무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라전대 피스메이커에 나오는 무영신풍류는 이 황창랑무가 원형이라는 설정이다. 그래서 일본에 넘어간 계승자들도 황씨를 잇고 있고. 무영신풍류의 설정에 따르면 아마 오라능력자였을거다.

3 기타

확실한 것은 비류왕분서왕은 다른 지파라는 것. 분서왕은 고이왕계열인데 반해 비류왕은 초고왕 계열이라고 한다. 그런고로 백제의 두 왕이 연속 피살당함으로써 고이왕 세력이 몰락하고 초고왕 세력이 다시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12대 어라하 계왕은 고이왕 세력으로 추정되나, 결국 고이왕계의 몰락을 막지는 못하였다.

책계왕과 맞먹을 정도로 기록이 적다. 조선왕조실록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뻐하자. 백제의 왕들은 기록이 너무나도 없다. 분서왕에 대한 책들이 말 그대로 모두 분서당했나?

4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九月 분서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죄수를 사면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五年夏四月 낮에 혜성이 나타나다
七年春二月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점령하다
七年冬十月 분서왕이 살해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