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백제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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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고이왕(古爾王) | |
성 | 부여(扶餘) | |
휘 | 구이(久爾) / 구이(仇爾) / 고모(古慕) / 구태(仇台)? | |
생몰년도 | 음력 | ? ~ 286년 11월 |
재위기간 | 음력 | 234년 ~ 286년 11월 (53년) |
1 개요
백제의 기틀(율령과 관등, 공복 등)을 다진 왕이자 출신이 불확실한 인물. 누구냐 넌 묘호로 본다면 성종쯤 되려나
출신에 대해선 온조계 출신이 아니라 우태(優台)―비류(沸流)계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는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아무도 정확한 건 모른다. 심지어 구태=고이왕이라는 학설도 있다. 목지국에 밀리던 백제가 실질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고이왕 시기로 이 고이왕이 시조화 되었다는 이야기. 대략 '고구려'의 '소노부' 권력을 '계루부'의 '태조왕'이 잡으면서 계루부 고씨 중심으로 계통을 정리했다는 이야기가, '마한'의 '목지국' 권력을 '백제'의 '고이왕'이 잡으면서 백제 중심으로 계통을 정리했다는 식이 된다.
다만 이 해석의 경우는 비류가 건국 시조가 되어야 하고 중국측 사서도 존재하는데, 왜 김부식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온조왕 시조설을 주로 하고 비류백제를 추가설로 더했는지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여자인 소서노가 비중이 커지는 것이 마음에 안드는 것이 중국사에서 하악하악보다 더 크게 작용했나. 물론 백제 시조 우태를 부여의 위구태로 해석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웃기는 이야기이고, 이쪽은 정황 증거 밖에 없다. 가장 큰 근거가 구태와 고이의 음이 비슷하다였으니 말 다했지...[1]
좌우지간 이 고이왕의 후손들로 이어지는 계보를 '고이왕계'라고 부른다. 구체적으로는 고이왕-책계왕-분서왕-계왕으로 이어지는 왕통.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생의 후손이라고 하나 연령상 고이왕의 나이가 지나치게 많아져 삐꾸난다. 이 때문에 의제된 것으로 보는 편.
서기 260년,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하며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활로 쏘아 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무예가 뛰어나고 호방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성격도 그렇고 활솜씨가 뛰어났다고 기록된 것도 그렇고, 이거 어쩐지 1200여년 뒤의 어떤 후배와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조카들을 폐위.
2 업적
2.1 군사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냥을 갔다는 기록을 보아 사냥을 통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인재를 선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위엄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던것같다.
2.2 내정
율령반포와 내정을 크게 정비하였는데, 고이왕 때 정비된 체계가 백제의 패망 때까지 근 400년간 이어지게 된다.
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6좌평 제도를 두고, 관등을 16품계로 나눠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다른 옷을 입게하고 왕과 귀족에 대한 옷을 정하는 등 공복제도를 정했으며 이것이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다. 백제가 부족연맹체에서 고대국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더불어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물게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렸다.[2]
2.3 대외 팽창
고이왕은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더불어 직산(稷山)에 자리잡은 마한의 목지국(目支國) 세력을 압도하여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고 한강유역의 실질적인 영도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또한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동예가 자주 침범해오자 동예와 우호관계를 조성하기도 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하는 등 후덜덜한 대외정책을 펼쳤다.
246년 위[3]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4]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더불어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5]
그러나 고이왕은 재위 기간 내내 괴곡, 봉산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6] 최종 보스 신라
3 기타
이병도가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시기를 이 때로 잡기도 했다.
그리고 이 양반이 즉위할 때 저 멀고 먼 대륙에선 촉나라의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었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 고이왕이 즉위하다
三年冬十月 서해에서 사냥하다
五年春一月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五年春二月 부산에서 사냥하다[7]
五年夏四月 왕궁의 문기둥에 벼락이 치다
六年春一月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5월에 이르러 내리다
七年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七年夏四月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七年秋七月 석천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九年春二月 남쪽의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다
九年夏四月 숙부 질을 우보에 임명하다
九年秋七月 서문 밖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다
十年春一月 큰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다
十三年 여름에 가뭄이 심하여 보리가 죽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잡아오다
十四年春一月 남쪽 제단에서 제사지내다
十四年春二月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十五年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다
十五年 창고를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十六年春一月 태백성이 달을 덮다
二十二年秋九月 신라와 괴곡의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다
二十二年冬十月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春一月 큰 가뭄이 들다
二十五年 말갈의 추장 나갈이 말을 헌상하다
二十六年秋九月 상서러운 구름이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오르다
二十七年春一月 육좌평 등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어 보게 하다
二十七年春二月 품계에 따라 관복을 제정하다
二十七年春三月 왕의 동생 우수를 내신좌평에 임명하다
二十八年春一月一日 남당에 앉아 정무를 처리하다
二十八年春二月 진가를 내두좌평에 임명하고 다른 좌평도 함께 임명하다
二十八年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二十九年春一月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하는 관리를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三十三年秋八月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三十六年秋九月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나다
三十九年冬十一月 신라를 공격하다
四十五年冬十月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다
五十年秋九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五十三年春一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五十三年冬十一月 고이왕이 죽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삼국전투기에서는 비류 전투 설명에 앞서 한반도 정세를 소개할 때 잠시 등장. 고구려와 더불어 제대로 된 군복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참고로 백제군 군복 색은 적색+흰색 조합. 이후 의외로 타이틀 컷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 위구태 건국설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데, 문제는 건국과 엮인 중국측 인물이 공손도이고, 오기를 고려해도 공손탁인데, 공손도이건 공손탁이건 시기적으로 안 맞다. 요동의 공손일족은 한반도와 많이 접해있어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데, 문제는 등장시기가 뭘 어떻게 해도 계산이 안 나온다.
- ↑ 다만 고이왕의 업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왕대의 것이 고이왕 때로 앞당겨져 기록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6좌평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들은 같은 시대 중국의 제도보다 발전된 것이기 때문. 물론 지나친 확대해석은 피해야 하지만 백제가 중국에서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한 것이 사실인데, 그걸 감안하면 중국의 것보다도 앞선 통치체제를 운영했을 수는 없는 일이다.
- ↑ 조비의 위나라다.
- ↑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발리는 전쟁이다.
- ↑ 이 246년에 일어난 전투를 기리영 전투라고 하는데 아직 한사군에 맞서싸운 기리영 전투의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많다. 현재 가장 신빙성 있는 의견은 3가지로 목지국의 진왕, 고이왕, 신분고국의 신지다.
- ↑ 신라가 본격적으로 백제와 국경을 마주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인 지증왕, 법흥왕대다. 삼국사기에 신라로 기록되는 이 시기의 나라의 정체는 진한계통의 소왕국들일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고이왕 시기에 본격적으로 내치를 정비하면서 확장하기 시작해 한강유역을 벗어나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속에 마한세력을 흡수하면서 충청도 북부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해 이런 진한의 소왕국들과 마찰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 ↑ 지금의 부산광역시가 아니라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일대로 추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