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성 지도. [1])
(아차산성 복원도.[1])
阿且山城/峨嵯山城
현재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구의동에 걸쳐있다. 아차산성이 축성되어있는 산 이름이 아차산이다.
아단성(阿旦城)을 아차산성과 동일시 할 수 있다면 아차산성이 새워진 시기는 백제 책계왕 1년(286년)으로, 당시 고구려의 침공에 어려움에 있던 대방군을 백제가 구원하자, 고구려의 서천왕이 분노하여 백제의 북쪽 변경을 위협하였고, 이에 책계왕은 수도인 위례성 북방을 수호하는 요새인 아차산성과 주변의 사성(蛇城)을 축성, 보수하였다.[2]
이후 5세기에 광개토대왕이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수군력으로 서해를 통하여 위례성의 서쪽을 옥죄고, 육상군은 아차산성(아단성)을 점령, 위례성 공략 거점으로 삼아 서쪽과 북쪽에서 백제를 압박하여 결국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차산성이 고구려의 손에 떨어진 것은 백제에게는 수도의 북부 방어거점이 무너짐과 동시에 한강만 건너면 바로 수도가 적의 공격에 노출되는, 그야말로 수도가 최전방이 되어버린 순망치한과 같은 상황이었다.어째 오늘날 서울과 비슷하다? 그래도 서울은 휴전선에서부터 고양시, 파주시 등 방어 완충지대라도 있지 여긴 뭐 강만 건너면 곧바로 수도니... 결국 장수왕이 한성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위례성)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개로왕이 이 곳에서 백제의 신하였다가 고구려에 투항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살해당했다. 안습. 그 뒤 아차산성은 고구려의 남진 기지가 되어 남방의 백제, 신라를 압박하게 된다.
그러다가 6세기에 이르러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손에 넣으면서 아차산성도 신라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고, 이에 590년(영양왕 시기) 고구려에서 온달이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 땅을 되찾기 전엔 돌아오지 않겠다!" 선언하고 아차산성[3]을 공격하였으나 결국 이 곳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4]
고고학 발굴조사 결과 해발 203m언덕을 감싸고 축조된 둘레 1,038m의 포곡식 대성으로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는 6~9세기 신라계 유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과거에 생각한 것처럼 백제나 고구려에 의해 축조된 것이 아니라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한 이후에 신라가 축조한 성으로 보인다. 근처에 20여개가 넘는 고구려계 보루가 존재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아차산이 중요한 지역임은 분명하나 삼국이 서로 다른 지형을 선호해서 서로 다른 방어시설을 축조하고 이름만 물려받아 사용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 1.0 1.1 #
- ↑ 단, 이 기록은 백제본기 책계왕대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해 고구려본기 서천왕대에는 이 기록이 없다. 그 해는 서천왕 17년으로 일우와 소발의 모반하였으므로 그런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 경우 이병도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이 개재(介在)하였으므로 이는 불가능하다고 하였고 미천왕 15년에 대방군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 비류왕 11년의 일이 옳은 이치라 보았다. 그 외에 타국의 군사를 고구려의 군사로 착각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 ↑ 해당 삼국사기 기록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기록됨.
- ↑ 단, 온달이 죽은 아단성을 두고 위의 아차산성 설과 충북 단양군의 온달산성 설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