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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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기원전 206 ~ 220한(漢)
초한전쟁(楚漢戰爭)
전한(前漢)
신(新)
현한(玄漢)
후한(後漢)
220 ~ 265삼국(三國)위(魏)촉한(蜀漢)오(吳)
265 ~ 436진(晉)서진(西晉)
동진(東晉)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439 ~ 589남북조(南北朝)송(宋)북위(北魏)
제(齊)
양(梁)
한(漢)
후량(後梁)
서위(西魏)동위(東魏)
진(陳)북주(北周)북제(北齊)
581 ~ 619수(隋)
618 ~ 907당(唐)
무주(武周)
중국의 역사
후한(동한)위진남북조시대/육조시대
삼국시대서진

三國時代
(220~280)

1 개요

중화 오천년의 역사 중에서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때문에 가장 잘 알려진 시대.[1]

2 시기에 대한 견해

중국의 삼국시대 시기에 대한 견해는 두개가 있다.

  • 1 : 후한이 헌제의 선양으로 공식적으로 멸망한 헌제 선양 ~ 서진의 삼국 통일까지의 시기.

약 400년간 중국을 통치했던 통일제국 한나라(漢)가 무너지고 위나라의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시점부터 진나라(晉)가 일시적으로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60년 동안의 분열시대. 단 이는 한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220년부터를 난세의 시작으로 잡았을 때의 구분이다.

실제로는 황건의 난(184년), 좀 더 앞 당겨서 보면 당고의 금(166년) 때 이미 후한은 국가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동탁이 정권을 장악한데 반발하여 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나면서부터는 이미 군웅할거 시대가 막을 연 만큼 실질적인 난세는 약 100년.

유비의 입촉, 한중왕 즉위 또는 조조의 위왕 즉위에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적긴 하지만 있다.[2]

이 문서는 1번의 시기만을 다루고 2번의 확장된 시기에 관한 내용은 삼국지 문서 참조.

3 삼국

삼국시대의 삼국은 다음의 세 왕조를 가리킨다.

  • 위(魏)(220~265) : 중원을 장악.
  • 촉한(蜀漢)(221~263) : 파천(사천) 일대에 할거. 정식 국호는 한(漢). 통칭 촉(蜀).
  • 오(吳)(229~280) : 강남 일대에 할거.

유비가 세운 나라의 정식 국호는 흔히 부르는 촉이 아니라 한이다. 유비가 한나라의 후계자를 표방했기 때문. 당장 조선시대의 적벽가만 해도 첫머리가 "한나라 말엽 위한오 삼국시절"로 시작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의 중국사 연구나 대중매체에서는 촉한(蜀漢)이라고 언급한다. 전한(前漢)후한(後漢)은 보통 하나의 한나라의 역사로 다루는 편이 많으나, 촉한의 경우엔, 삼국시대 자체가 혼란의 시대였으며, 그 정통성에 있어도 논란이 있기에 사학적으로 따로 분류하여 연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중국 삼국시대 역사의 정사인 정사 삼국지와 삼국시대를 가장 널리 알린 소설 삼국지연의의 판본 및 번역물들 역시, 촉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 촉한정통론자들의 경우, 당연히 "촉" 보다는 "한"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으나, 해당문서 및 역사에서는 통일제국 한왕조랑 혼란을 막기 위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촉한"이란 명칭으로 표현한다.

이 시대가 이토록 혼란스러워진 것은 아래와 같은 여러가지 내/외부적인 모순들이 수백년간 (상당수는 한무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한 결과였다.

- 호족 소유 토지의 증가에 따른 자작농 계급의 붕괴와 빈부격차의 확대
- 일부 명문 호족들의 관직 나눠먹기로 인한 국가기능의 저하
- 왕망 이후 가속화된 유교의 형식화 및 윤리 수준의 저하
- 소빙기 도래로 인한 토지 생산력의 감소
- 국가역량을 넘어선 영토확대로 인한 국방비 지출의 증가 및 국경 병력의 이민족화/사병화
- 유능한 군주의 부재 및 환관세력의 득세

이릉대전과 같은 대참사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적으로 국력이 열세였던 촉한과 오가 힘을 합해 강대국 위를 견제하는 1강 2약의 구도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위나라는 후한말 득세한 군벌의 대부분을 제거하고 중원을 장악한 나라였다. 이 당시 중원이란 중국 문명이 탄생한 황하 유역을 일컫는 표현이었으며,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실질적인 면적으로는 약 1/3 수준에 불과했으나 당시 중국인구와 총 생산력에서 약 7 ~ 8할을 차지했다.

반면에 오의 경우에는 이러한 난세를 피해 변방으로 이주한 세력들이 당시만 해도 아직 개발이 덜 된 남중국 지방의 토착세력들과 타협하면서 세운 나라였다. 때문에 영토 면적은 중원에 크게 뒤지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주요 거점 부근을 제외하고는 개발이 되지 않아 사람이 살기 어려웠고 영토의 상당 부분이 이민족들의 영향 아래 있었던 까닭에[3]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촉한의 경우는 사천 자체는 진 시절부터 집중적으로 관리되었고 개발된 땅이고, 토착 호족들도 유비 이전 통치하던 유언이 대부분 밞아놓았던 상태라 비교적 중앙 집권이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운남지역은 남만과 같은 이민족들이 장악하고있었고 무엇보다 사천의 힘으로는 중원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간 힘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1) 중원이 전란에 빠지면서 인구와 생산력이 일시적으로 크게 저하되었고,
(2) 두 나라의 주도 하에 변방의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3) 기본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4) 위가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두 나라를 동시에 제압하기에는 전선이 넓을 뿐더러, 강족과 저족, 선비, 흉노, 동이 등 여타 이민족 세력도 동시에 상대해야 했고,
(5) 위나라 자체도 건국 과정에서의 한계로 인해 지방 호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
인구4,932,000명
인구1,080,000명
인구2,562,000명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사람도 많이 죽고, 유랑민도 대폭 증가하면서 엄청난 인구 감소가 이루어졌다. 삼국지연의만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떼로 죽어나간 막장 시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도 거의 5천만에 육박하던 후한 시절의 인구가 고작 수십 년 만에 777만으로 쪼그라들었으니. 흠좀무.[4] 실제로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만한 인구 손실은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으로 서기 2세기의 중국 인구는 본토만 5~6천만명을 육박했고 3세기 삼국시대에도 4~5천만명으로 추정된다. 고대에는 폭정, 기아, 전염병, 전쟁이 거의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계속 증가하려는 인구가 그나마 계속 죽어줘서(...) 수백년간 인구가 큰 증가없이 정체가 지속된 것이다. 다른 시대에도 널린 것을 삼국시대에만 갑자기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 게 다른 시대에도(전한 말, 5호16국시대 등등)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는 상투적으로 등장하며 그만큼 시대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강조한 기록일 뿐이다. 국가 자체는 그나마 온전한 듯이 보여도 폭정이나 심지어 자연 조건에 따라서도 인구 변동은 있어왔다.[5]

일단 등록된 인구는 이렇지만 이걸 그대로 믿으면 안되는 것이 혼란기였기에 유랑민이나 지방호족에게 위탁한 소작농 인구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조세를 확실하게 거두고 개인 경제력 유지가 가능한 인구, 그 중에서도 노동력이 되는 성인 남자 위주로만 등록을 했기 때문에 저런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을 통일하자마자 777만이 갑자기 1,600만으로 불어나는 것. 심지어는 이 숫자도 실제 인구보다는 크게 적었을 것이다.

물론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전쟁, 기아,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엄청난 인구 감소가 이루어졌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실제 인구는 최소 배 이상은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후한말 6000만에 육박했던 인구가 불과 수십 년 만에 777만 (등록상 인구라고는 하지만!)으로 급감한 것. 삼국지연의 덕분에 이 시대에 대하여 낭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실제로는 엄청나게 살기 어려웠던 시대다.

이처럼 삶이 어려워지면서 사회의 윤리도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되는데... 하극상이야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고 심지어는 인육이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식을 팔거나 부모를 내다 버렸다는 기록이 대단히 많이 남아 있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단, 난세라면 언제나 그렇듯이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업적도 많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후한 시대라면 절대 출세하지 못했을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일단 삼국의 창업주들만 보더라도 난세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명성을 남기기 어려운 출신들이다. 더불어 후한말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개혁의 노력이 있었다. 특히 이 시대의 둔전제는 후대 왕조들에게 여러모로 좋은 참고사례가 되어 남았다. 유학 일색이었던 중국사상에 법가 및 도가에 대한 재고찰이 이루어진 것도 중세 중국문화가 풍부해지는 계기가 됐다.

4 사회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지방 자작농이 전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이로서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비대해진 관료제와 유교의 사상독재 하에서 세력을 키워온 호족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이 시대에 호족을 무시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군벌은 '아무도' 없었다 고 봐도 좋다.이 당시 호족들은 중국의 유일한 지식인 계층으로 (극히 일부의 예외가 있긴 했지만) 중국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여론을 좌우했으며, 중국의 대부분을 사유하고 있는 지주였으며, 오랜 세월 관직을 독점하며 사실상 주거니 받거니 하며 관직을 대대로 독점하였다. 개중에는 이런 호족을 무시하고 뭔가를 해보려는 군벌들도 있었지만 (뭘 몰라서 무식했던 케이스도 있었고 계획적으로 호족을 찍어누르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케이스도 있었다)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로 끝났다.

삼국의 군주 중 가장 호족들에게 엄격했던 조조 조차도 기본적으로는 연주 지역의 호족들과의 연대를 기반으로 세력을 쌓은 인물이다. 실제로는 긴장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삼국의 군주 (조조, 유비, 손권)은 모두 기본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축해 호족연합체를 넘어서는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각기 달랐지만 셋 다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고, 위나라에서는 호족들 가운데 문벌이 높은 몇몇 가문이 중앙 관직을 장악하여 호족을 뛰어넘는 귀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귀족 사회가 형성된다. 이것이 중국사의 문벌귀족의 시작이다. 오나라에서는 호족들이 강한 독립성을 가지면서, '호족연합체' 적인 정권이 만들어진다. 오나라 계통 호족은 오나라의 붕괴 이후에도 서진에 등용되면서 귀족적인 지위를 유지한다. 촉나라에서는 영토가 작았던 덕분에 상대적으로 중앙 정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호족 사회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국을 통일했던 것은 호족에 의해 세워진 친 호족국가, 진나라였다. 삼국이 진나라에게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삼국이 모두 호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이 호족세력들이 자기 나라를 내 팽개치고 진나라의 패권을 인정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크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후한을 멸망시킨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며...결국 호족들이 모여서 '우리끼리 다 해먹으며 천년만년 누려보자'며 세운 진나라는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 가장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강남으로 쫓겨나게 되고 중원은 이민족들의 차지가 되어 중국은 장장 4백여년간에 걸쳐 남북으로 갈린 기나긴 분열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밀려나서도 호족들끼리 잔치 벌이는 수준을 못 벗어나고 헛지거리만 하다가 망한다

짧게 보면 남북조시대, 길게 보면 당나라, 오대십국시대까지 이어지는 문벌귀족 지배의 시작이다.

5 경제

후한의 멸망으로 농업이 붕괴 상태에 놓였으며 화폐경제가 몰락했다. 동한조정이 붕괴한 탓에 대량의 사사로이 만든 돈이 출현했다. 3국이 정립한 뒤에 새로 발행된 동전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지 못하여 포, 비단, 곡식, 등 주요화폐로 실물을 부득히하게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위, 오, 촉 모두 동전을 재발행 하려고 노력했으나, 현대시대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모두 다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그나마 나았다는 촉한의 경우도 촉의 화폐가 본국외 강남 일부 지역, 농서 일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정도의 한계점을 가진다.

강북 지방 쇠퇴의 조짐이 처음으로 보인 시대였다. 삼국시대 이후엔 인구 급감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전란으로 인한 민호의 도주와 관개시설 및 농경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 등의 이유로 버려진 농경지가 대량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황하 중상류 지역의 황폐화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발생하였고 삼국시대의 뒤를 이은 남북조 시대로 인해 이 흐름이 더욱 가속화된다.

중원의 경우 역대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전란을 거치며 철저히 파괴되었다가...조조가 패권을 구축하면서 부터 회복의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토지개혁과 전후재건에서 다른 군벌들을 크게 앞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도 자체는 기존에도 있었던 제도였지만, 조조가 대단했던 점은 이를 전 중국규모로 장기간에 걸쳐 추진한 조직력과 추진력이었다. 실제 기존의 둔전제는 일부 국경지대에 한해 한시적으로 실행된 제도였음으로 조조와는 규모/기간에서 비교가 안된다.

촉한과 오나라는 세력확대를 위해 각각 운남과 강남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간다. 특히 오나라의 강남개발의 경우 한족이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착수한 시작으로써 중국 경제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6] 이후 송나라 시대 즈음에 이르면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절정에 이름으로써 강남의 경제력이 중원을 압도하게 된다. 더불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각지에 명맥을 유지하던 소수민족들 (무릉만, 산월족 등)이 완전히 중국에 복속하게 되었다.[7] 우리가 흔히 고대중국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영토를 한족이 사실상 독점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대인 것이다.#

6 문화

이 무렵의 중국은 좌식(座式) 생활을 했다. 즉, 돗자리만 깔아놓고 그 위에 무릎꿇고 앉아서 지냈다.

삼국시대에는 비록 주류는 아니긴 했지만 양한(전한,후한) 시대에 이미 흔했던 유제품 관련 식문화가 아직 건재해있었다. 유제품 관련 식문화는 이후 유목 민족의 발호가 계속된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고 개간으로 인한 목초지의 상대적 감소 등의 이유로 북송 무렵 중국 내에서 자취를 감춘다.

참고로 이 시대에는 이름은 대부분 외자 이름이었다. 이름이 모두 한글자고 두글자 이름이 없다는 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고 곳곳에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신을 세운 왕망 이래로 두글자의 이름을 쓰게 하는 것은 죄인에게 모욕을 가하기 위한 조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돌아다니지만 이건 '혹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고 어림잡아 내놓은 가설일 뿐이다. 후한 시대의 이름이 실제 대부분 외자이기 때문에 두자 이름이 없다는 설은 상당히 예전부터 있었지만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盧弼)은 후한시대에 두글자 이름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후한 시대에 이름이 전부 외자라는 건 깊이 살피지 않은 잘못된 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일제가 대표적인 두자 이름이고 남성이 아닌 여성이지만 장춘화, 왕원희 등도 두자 이름이다. 다만 남성보다 여성측에서 두 글자 이름이 비교적 많이 보인다.

상기한 것처럼 유교가 독점하던 지적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법가, 문화적으로는 도가를 재조명하는 시도가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도교의 경우 이 시대에 사실상 제2의 탄생을 맞아했고 해도 좋을 정도.

7 군사

향촌 사회의 붕괴와 함께 후한의 모병제도 붕괴한다. 군사 제도는 둔전과 결합된 세병제로 변화한다.

전란의 시대니까 당연한 소리지만, 군벌의 난립 등의 이유로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다. 이는 훗날 서진의 중국 통일 이후 팔왕의 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족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알더스 고원의 통제권을 최종적으로 상실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 통일 이후 서진이 그 대가를 영가의 난으로 치른다. 물론 영가의 난이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일어난 건 결코 아니지만.

8 역사학의 비중

일단 이 분열 시기가 그리 길지 않고, 이 시기가 후대에 남긴 영향도 구품중정제 등 몇가지를 언급하고 넘어가고 끝낼 정도로 매우 제한적이다. 오호십육국 시대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이후에는 화이잡거(華夷雜居)의 시작점으로서 다뤄지거나 후한말부터 축적되어 서진대에 터진 각종 사회모순들을 설명하면서 언급되는 정도다. 인터넷에서 하듯이 이 시대와 인물 하나하나에 주목해서 다루진 않는다.

도교의 역사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주목을 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태평도오두미도가 나타나면서, 기존의 도가철학이 도교라는 종교 집단으로 변화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세계사에선 이 부분에서 위나라의 구품 중정제와 서진이 통일했다는 결과만 딱 한두 줄 정도 쓰여있고, 바로 오호십육국과 남북조시대로 넘어가기 때문에 고딩 삼덕들이 많은 좌절을 한다.(...)

한국사에서도 비중을 가지고 있는데 부여와 고구려의 기록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외의 기록은 전해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사 연구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수능엔 잠깐 언급되는 수준에서 못벗어났다. 가끔 한문제씩 보기로 등장하기는 하니 한번 쭉 훑어만 보는 정도로 넘어가면 된다.

9 삼국시대와 삼국지 연의

워낙 삼국지연의가 유명한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실제 역사와 삼국지 연의를 혼동해 역사를 판타지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삼국지 연의는 기본적으로 역사를 재밌게 풀어서 쓴 소설이다. 기본적인 이야기의 틀은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만 세세한 내용에서는 영웅쟁패를 다루어 극의 재미를 위해 내용을 변개하거나, 촉한을 정통성을 가진 왕조로 간주한 촉한정통론 적인 시각이 많다. 따라서 실제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삼국지 정사 등 관련 역사서를 읽어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연의는 군담소설이고 삼국시대의 각종야사와 민담이 종합된 소설인 만큼 당시의 시대적 배경 및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문관의 경우 정치적 리더십과 비전, 행정적 업적은 거의 묻어 버리다시피 하고 오로지 현란한 권모술수 위주로 다룬다. 조조가 패권을 잡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둔전제에 대해서도 '유랑민을 모아서 농사를 시켰다 - 끝 - ' 수준의 설명에 그친다. 또한 행정가로써 큰 공을 세운 유복, 양습, 한호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도 지나가는 엑스트라 1 수준의 대접만 해줄 뿐이다. 지못미

무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극적 재미'를 위해 장수들의 개인적 무용을 설명하는데 집중하며 통솔력이나 전술적 재능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빈약하다. 사실 나관중이 복잡다기한 전쟁에 대해서 얼마나 작중 묘사를 하기 어렵겠는가? 덕분에 삼국지 연의는 혼자서 수천명을 상대하는 초능력자들의 능력자 배틀물이 되어 버렸다...그리고 그런 기록을 맹신해 '중국 군대는 우루루 모였다 우루루 흩어지는 오합지졸' 이라는 나름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당연한 일이지만 수천, 수만명의 병사들이 엄청난 물자를 소모하며 벌이는 전쟁이 그렇게 대장전 한판에 승부가 결정났을리 만무하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전국시대에 이미 총력전 개념이 생겨났을 정도로 고대에 이미 고도로 작전술의 개념이 발달한 나라였다. 물론 냉병기 시대였던 만큼 무장들의 개인적 무용은 전쟁의 중요한 요소였고 실제로도 용맹을 떨친 맹장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돌격대를 이끌고 선봉을 선다든지 성벽에 앞장서 먼저 오른다든지 하는 형태로 승리에 기여한 것이지 혼자 나가서 수만명을 싹 베어버리다든지 적장과 1vs1 해서 진 쪽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조리 후퇴하는 횡스크롤 액션오락같은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삼국시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시대가 아닌데 삼국지 연의가 워낙 널리 읽힌 덕분에 과대평가가 됐다고 하기도 한다. 중국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제갈량과 관우는 알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단 삼국시대가 오로지 삼국지 연의 때문에 유명해진 거품 가득찬 시대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왜냐면 삼국시대는 삼국지 연의가 집필되기 전부터 이미 중국인들에게 영국의 아더왕 전설이 그렇듯이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나관중이 연의에 끼워맞춘 가상의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돌고 있던 이야기들이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삼국시대가 워낙 유명해서 삼국지 연의가 대박을 쳤다고도 볼 수 있는 것.

삼국시대가 이처럼 사랑받은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중화사상에 의거해 '강력한 중국'을 동경하는 중국인들의 심리가 가장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 시기는 분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족을 상대로 우위를 보여준 거의 유일한 시기였다. 당장 삼국지 시리즈에 나오는 이민족 장수들이 대부분 잉여임을 봐도 알 수 있다. 중화의 개념이 정립되는 중이었던 진나라 시기를 제외하면 중국의 역사는 이민족에게 정복 통치당하는 시기가 많았다. 한나라그랬고, 서진그랬으며 수나라이민족을 족치러 갔다가 발리고 나라의 기둥뿌리가 뽑혔으며, 당나라위구르토번에게 빌빌거렸고, 송나라 때는 말하면 입만 아프며, 명나라북방 이민족에게 시달리다 결국 이민족에게 나라를 내주게 되었고, 근대에도 비록 이민족이 세운 나라라지만 마찬가지로 말하면 입만 아프다.. 현대 중국에 이르러서는 신대륙 이민족에게 콩라인으로 밀리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었다. 때문에 한족이 이민족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보인 이 시대에 대한 동경과 미화도 커졌다는 것.

이를 두고 한나라에 대한 동경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는 한나라가 중국 혹은 중화의 상징적인 의미[8]이며 그 유산이 있던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한 초반은 흉노에게 밀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무제 이후 중국은 통일된 진정한 중화제국으로서 이민족들을 압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강성하던 흉노 및 기타 북방 민족은 사상 처음으로 역량을 결집한 중화제국의 역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고 한때 한나라를 깔보던 흉노의 선우는 한나라 황제의 조정에 입조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후한 말에 가면 이민족들은 지방 군벌들에게도 털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분명 이 시대는 한나라가 망해가는 시대였음에도 그 한나라의 분열된 역량으로도 외부 이민족을 제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왜 한나라가 중국인들에게 스스로를 한족이라 칭하게 만든 영광의 시대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삼국시대는 그 한나라의 마지막 영광을 직접적으로 받은 시대로서 그렇기에 초한전쟁기와 더불어 중국인들에게 항상 관심의 시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초한지로 시작해서 삼국지로 끝난 대작의 왕조라 할 수 있다

10 주요 인물

연의의 영향으로 이름이 대중에게 각인된 인물만 추려도 수백명은 되겠지만, 일단은 이하의 인물들이 대체적인 세계적으로 언급되는 인물들만 넣도록 하겠다.

  1. 그러나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서 역사학적으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2. 사실 삼국시대 자체만을 따지자면 2번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황건적의 난은 난세의 시작이지 삼국시대의 시작과는 큰 관련이 없다. 정사 삼국지에서 황건적의 난을 다루는 것은 그때 이미 인물들이 활약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것이다. 연의가 벌려놓은 것이 너무 컸을 뿐(...)
  3. 애초에 오나라에서도 남반부 지역은 한무제 이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동월, 민월, 남월같은 이민족 국가들이 지배했었고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이 아니었다.(남월은 국왕이 한족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위만조선과 비슷하게 중국계 유이민과 현지세력간의 연합으로 정권이 구성되었고, 민월과 동월은 한나라의 책봉을 받았기는 했지만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원과 크게 달랐다.)
  4. 단, 실제로 저렇게 죽었다기보다는 호적 유실 등의 원인이 크다.
  5. 뭐 진정한 중국사의 헬게이트인 송원교체기에 비하면 그저 그렇지만. 1200년 중국 인구 1억 1500만명에서 1300~1400년 7500만명~8500만명으로 급락하고 155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따라잡는다. 이 시대에는 인구가 감소할 조건은 모두 갖추어(...) 중국의 경쟁력을 폭락시킨 시기이기도 하다.금나라 5천만, 송나라 6천만의 중국 인구가, 몽골의 침입을 거치고 원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강북, 만주, 몽골, 티벳까지 다 합쳐도 7~8천만이 되어버린다.(...)
  6.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성과를 내기 시작한 건 빨라도 위진남북조 시대부터였고, 당송 무렵에야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훗날 송원교체기와 명청교체기로 강남 지방에 헬게이트가(...)
  7. 전 버전에는 소멸했다고 나왔지만 중국의 남방계 소수민족들( 대표적으로 묘족, 그리고 장족 투자족 등등)은 북방계와는 달리 소멸되지 않고 현재에도 상당히 남아 있다. 물론 문화 수준이 낮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한족에 거의 동화되었다.
  8. 당장 중화민족을 한족(漢族)이라고 하는 등 한나라는 중국의 정체성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9. 엄밀히 따지면 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