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밀라

Carmilla

번역자에 따라 카르밀라 뿐만 아니라, 카밀라라고도 번역된 전례가 있지만, 작품의 배경이 오스트리아이며 독일식 인명이 많이 나온다는 점을 참고하면 카르밀라라고 번역함이 옳다.

아일랜드 작가인 조지프 셰리든 레 파뉴[1]가 1871년에 잡지 The Dark Blue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인 1872년에 단행본으로 출판한 고딕소설이다.

가장 유명한 흡혈귀 소재 소설 중 하나다. 140년 전 소설이라 이미 저작권이 소멸했거니와 내용도 길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원문을 구해 볼 수도 있다. 워낙 유명해서 이를 각색하여 연극 등으로도 많이 상영되었다. 흡혈귀가 등장하는 소설로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쪽이 더 유명하고 원조로 알려져 있지만, 카르밀라가 드라큘라보다 25년 먼저 출판됐다(드라큘라는 1897년 출판). 브람 스토커가 카르밀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영국인 로라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유모, 가정교사 등과 함께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주(州)에서 사는 십대 소녀[2]인데, 근처에 친구가 될 만한 또래가 드물어 늘 외로워했다. 로라는 아버지 친구인 슈필스도르프(Spielsdorf) 장군이 또래인 조카딸 베르타 라인펠트(Bertha Rheinfeldt)를 데리고 로라네 저택에 오기로 하자 베르타를 만날 생각에 정말 기대했지만, 장군으로부터 집안에 사정이 생겨 방문하지 못한다는 전갈을 받고는 몹시 실망한다.

어느 날 로라가 아버지와 같이 산책하던 중, 카르밀라라는 소녀가 탄 마차가 로라네 저택 근처를 지나다가 사고를 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로라 아버지는 카르밀라를 자기 집에서 한동안 쉬게 해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둘 소녀는 금방 친구가 되었으나 로라는 곧 카르밀라가 몽유병 증세가 있어서 밤에 돌아다니는 등 이상한 면이 많음을 알아차린다. 카르밀라는 로라에게 백합스러운 고백을 하면서 접근하고, 이따금 로라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려고만 해도 심하게 질투하는 등 날이 갈수록 이상하게 로라에게 집착한다. 더구나 둘이 함께 지내기 시작한 뒤로 로라는 점점 몸이 허약해지고, 목덜미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원인불명의 푸른 자국이 생기는 등 전에 없던 증상에 시달린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슈필스도르프 장군이 로라네를 방문한다. 장군은 로라 부녀와 함께 옛 카른슈타인가의 묘지를 찾아가는데, 거기에서 카르밀라와 맞닥트린다. 장군은 근처에 있던 도끼를 들어 카르밀라에게 휘둘렀지만, 카르밀라는 공격을 피하더니 엄청난 악력으로 장군의 손목을 움켜쥐어 도끼를 땅에 떨어트리고 종적을 감춘다.

카르밀라의 정체는 이미 150년 전에 죽은 카른슈타인(Karnstein) 백작 부인 미르칼라(Mircalla)로, 소녀들을 해치는 오래된 흡혈귀였다. 로라에게 밝힌 이름 카르밀라(Carmilla)는 미르칼라(Mircalla)의 아나그램을 이용한 가명. 오랜 세월 미르칼라라는 본명을 아나그램으로 바꾼 여러 가지 가명으로 숱한 소녀들에게 다가가 를 취하여 죽였으며, 로라와 만나기 전에도 장군의 조카 베르타에게 밀라르카(Millarca)라는 가명으로 접근해 죽였다. 자식이 없어서 조카딸을 친자식처럼 여기던 터라 장군은 매우 비통해하며 카르밀라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카르밀라는 로라를 포기하고 비밀장소에 숨겨진 자기 무덤으로 도피하지만, 집요하게 추적해온 장군 일행에게 끝내 죽음을 맞는다.[3]

로라가 카르밀라와 함께 지낸 이후로 목덜미에 푸른 이 생겼던 이유는, 밤마다 로라가 잠든 틈을 타 카르밀라가 몰래 그녀의 피를 빨아먹었기 때문이었다.

작가인 레 파뉴가 작중에서 정확한 시간 배경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어림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미르칼라 백작 부인의 초상화가 1698년에 그려졌다는 점, 그리고 카른슈타인 백작 가문이 초상화를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몇몇 시민 전쟁 때' 없어졌다고 하는 점, 그리고 미르칼라 백작 부인이 죽은 지 150년이 지나 비밀무덤이 파헤쳐졌다는 점 등이 추정해볼 만한 단서인데, 작품 속 시간대가 1848-9년쯤으로 보인다. 미르칼라 백작부인은 초상화를 그린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을 것이다.

소설 속 카르밀라의 생활 패턴은 정오에 일어나 초콜릿 한 잔을 마시고 산책하다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는 것. 한낮에는 금방 지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벤치에 앉아 쉬어야 한다. 또한 장송곡과 같은 노래를 심히 증오하며 로라가 부담스러워 할 정도로 끈적한 작업 멘트를 날린다. 아가씨의 상냥한 일면과 흡혈귀의 잔인한 면모를 모두 보여준다. 손아귀 힘은 성인 남자의 팔을 마비시킬 정도. 장미를 만지면 순식간에 시들어버린다.

위 일러스트는 잡지 The Dark Blue에 연재할 때 실린 삽화이다. 어느 날 오후 카르밀라와 로라가 숲 속 벤치에 있는데, 장례행렬이 근처에 사는 숲지기네 어린 딸의 관을 매고 장송곡을 부르며 지나간다. 로라는 자기도 알고 지내던 꼬마아이의 관을 향해 예의를 표하지만, 카르밀라는 벤치에 앉은 채로 관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장례행렬과 사람들이 부르는 장송곡에 대해서 혐오감을 드러내는 부분을 표현했다. 로라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지만 카르밀라는 까만 드레스를 입고 벤치에 앉아 있어, 두 캐릭터가 서로 대비된다.

이 소설은 로라가 사건으로부터 십 년쯤 뒤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전적으로 로라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한다. 슈필스도르프 장군 일행이 카르밀라를 처치하는 장면은 내용상 로라가 참여할 수 없으므로 아버지가 쓴 보고서를 로라가 인용하는 방식으로 간략하게 처리했다. 소설 마지막에 이르면 로라는 글을 마치면서 '이미 시간이 흘러 카르밀라의 목소리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지만, 카르밀라가 고양이처럼 다가오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라고 묘사하여, 카르밀라의 백합질이 꽤나 인상 깊게 각인됐음을 암시한다. 사실 당시 영국이나 아일랜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처럼 노골적이고도 절묘하게 레즈비언 분위기를 암시하는 소설이 잘도 나왔구나 싶을 정도.

레즈비언 흡혈귀의 원조격인 캐릭터. 학자들은 동성애와 흡혈귀를 동일시한 최초의 시도 중 하나로 본다.

중간에 카르밀라의 부하인 듯한 나이 든 여인과 마부 등이 나오지만 이들의 정체는 불명. 아마 동료나 부하 흡혈귀일 것이다.

어린이가 보기에는 위험한 내용이지만 해괴하게도 1993년에 지경사에서 번역하여 아동용(!) 소설 문고로 출판된 적도 있다. 심지어 제목은 《사랑을 꿈꾸는 흡혈귀 카밀라》. 당시 제법 날리는 만화가였던 김숙이 그린 삽화가 상당히 아름다워서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곤 한다. 1996년에도 '흡혈귀 카르밀라'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린이교육연구원에서 초등학생용 소설책으로 출판했다. 어느 쪽 소설을 먼저 접했느냐에 따라 주인공 이름을 '카밀라'라고 기억하기도 하고 '카르밀라'라고 기억하기도 한다.

2006년 책세상에서 발간한 '뱀파이어 걸작선'에 '카르밀라'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또한 2015년에도 '카르밀라'라는 제목으로 '초록달'에서 발간하였다. 국내 번역본들은 대부분 작품의 배경이 되는 오스트리아의 독일어식 인명과 지명을 엉터리로 음역하였다.

1932년 칼 드레이어 감독이 찍은 영화 흡혈귀(Vampyr)가 이 작품을 영화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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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영화화된 해머의 "흡혈귀 연인들"(The Vampire Lovers) 은 아예 대놓고 카르밀라의 백합 하렘 행각을 보여준다. 유두 노출은 기본이요 키스에 성행위를 암시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카르밀라를 맡은 배우는 당시 33세인 잉그리드 피트로 설정상의 나이[4]보다는 많지만 워낙 배우가 섹시한지라 그 정도는 옥의 티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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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유리가면에도 극중극 형식으로 등장한다. 카르밀라로 분한 아유미의 명연을 볼 수 있다(마야의 로드 매니저-코디?-활동을 하다 마야를 함정에 빠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오도베 노리에개발살냈다). 다만 이 부분은 작가가 카르밀라를 제대로 안 읽었다고 책할 수밖에 없다. 원작 제목부터 카르밀라이다. 이 작품의 실제 주인공은 카르밀라이며, 로라는 다만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관찰자 입장이다. 카르밀라가 이야기의 중심인물임은 이미 원작자가 제목으로 공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유리가면에서는 마치 '원래는 로라가 중심적인 인물인데 아유미의 열연으로 카르밀라가 더 주목받았다'는 뉘앙스가 강한지라...
  1. Joseph Sheridan Le Fanu, 1814~1873.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로 현재는 아일랜드에서 그를 기리고 있다. 1980년대 어린이 중역판 소설집에선 그를 조너선 르 파뉴라는 이름으로도 소개한 바 있다. 주로 호러 소설을 썼는데 여러 번 영화화되었으며 지금 봐도 꽤 으스스한 수작 호러 소설로도 알아준다. 한국에서는 오래전 흰 고양이란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한 《드럼건니얼의 흰 고양이(The White Cat of Drumgunniol)》는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와 더불어 고양이를 소재로 한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소설로도 영국과 미국에서 선정된 바 있다. 그 밖에 《손에 대한 고찰》은 유령의 집을 다룬 소설에서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된다.
  2. 작중에서 로라의 나이는 카르밀라를 만난 무렵에 18세라고 나오는데, 영국 소설이므로 만나이일 것이다. 만18세라면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소녀라기보다는 아가씨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영국에서는 1970년 1월 1일 이전까지는 법적 성인연령을 만21세로 간주했으므로, 이 시기 기준을 따른다면 로라는 확실히 미성년자이다.
  3. 그녀의 무덤 속에서 관을 꺼낸 뒤 그녀의 심장에 말뚝을 박아서 죽였다.
  4. 카르밀라는 겉보기에는 22세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