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련 인물 : 카를 게프하르트
Karl Brandt
1904년 1월 8일 생 ~ 1948년 6월 2일
1 개요
그리고 T-4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감독한 반인륜 범죄자이며 자국민을 살해한 죄로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인물이기도 한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자체가 단순히 전쟁 행위에 대한 처벌을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반인륜 행위를 저지른 범죄집단을 국제적으로 단죄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2 출생과 성장
독일 제국 직할주였던 엘자스 로트링겐에 속한 알사스 지방의 뮐하우젠(현재는 프랑스령)에서 태어난 카를 브란트는 드레스덴 대학, 예너 대학, 프라이부르크 대학, 뮌헨 대학, 베를린 대학 등 여러 대학들을 전전하면서 의학을 공부해 베를린 대학에 재학중이던 1928년에 의사시험에 합격해 면허취득 후 1929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2년 3월 1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브란트는 처음엔 돌격대에 입대했다. 1933년 8월 15일에 아돌프 히틀러의 부관이던 빌헬름 브뤼크너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 브란트가 그를 수술하여 그를 회복시켰다. 이 사실이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 히틀러는 그를 개인 주치의로 임명하려고 했다.
결혼식 당시의 카를 브란트
1934년 3월 1일에 친위대로 이적한 브란트는 총통부 의사로 임명되어 히틀러의 측근이 되었다. 1934년 7월 29일에 정식으로 친위대 요원이 된 브란트는 1940년까지 친위대 본부에서 근무했다.[1] 1934년 3월 17일에는 독일의 수영 선수(ANNI Rehborn)와 결혼했고 1935년 10월 4일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따서 카를 아돌프 브란트(karl adolf brandt)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 이후에 히틀러의 의사가 된 브란트는 히틀러의 주치의로써 활동하면서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이나 히틀러의 주변 인물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며 히틀러와는 굉장히 신뢰하는 관계여서 히틀러는 그를 가족 같이 여겼다고 한다. 그렇게 히틀러의 측근이 된 그는 하인리히 힘러, 마르틴 보어만, 헤르만 괴링, 알베르트 슈페어와 같은 히틀러의 핵심 측근들과도 매우 많이 아는 사이가 되었고, 히틀러가 자주 가는 오버잘츠베르크 별장에서 오버잘츠베르크 서클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갈 정도로 나치당에서 가장 위치가 높은 의사였다.
카를 브란트와 에바 브라운 | 카를 브란트와 아돌프 히틀러 |
여기까지만 요약하면 평범한 의사의 출세 이야기겠지만... 그 이후 악마가 본격적으로 각성했다.
3 본격적인 만행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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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0월에 T-4 프로그램의 감독관으로 임명된 브란트는 유대인 및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안락사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이런 불운한 생명체들에게는 자비로운 죽음을 부여한다는 목적으로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에게 안락사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자신이 이들에게 있어 구원자라고 생각했고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편안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정의였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스를 이용한 살해를 "가장 인도적인 방법이다"라면서 적극적으로 가스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지지했으며, 카를 브란트는 실험자들에게 강제로 살균하는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요제프 멩겔레의 샴쌍둥이 실험도 이 놈이 도와줬으며, 게다가 요제프 멩겔레가 생체실험 대상을 고민하고 있을 때에도 상관인 이놈에게 조언을 듣기도 했다. 이놈은 맨 처음에는 장애인들이나 노인들을 그냥 가스실에 밀어넣고서 막 죽여댔으나, 나중에는 더욱 악질적이게도 생체 실험을 하고 실험 성과를 얻은 다음에 죽이기도 했다. 살인마가 그냥 사람만 죽이다가 사람 죽이고 지갑도 털어가는 꼴
그러다가 히틀러의 명령으로 t-4프로그램이 중지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T-4프로그램에 관여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고 안락사 프로그램이 중지된 이후 라벤스뷔크와 아우슈비츠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와 나츠바일러(Natzweiler) 수용소를 비롯한 수많은 강제수용소에서 직접적 간접적으로 나치독일의 생체실험을 지원하고 참여하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 이놈이 관여한 생체실험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치의 과학자들은 공군 조종사와 해군 선원들이 얼마나 차가운 바다에서 버틸 수 있고,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빠른지를 연구하기 위해 냉동 실험을 실시했는데 카를 브란트는 이 실험을 지원했다. 실험을 한다는 목적으로 얼음물이 든 탱크에다가 피해자들을 옷을 강제로 다 벗긴 다음에 탱크에 집어 넣었고, 얼마만에 사람이 얼어죽는지를 알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얼음물에 넣어두었고 결국 피해자들은 온몸이 얼어죽고 말았다.
그 외에도 거의 얼어죽기 직전까지 실험을 했다가 그들을 탱크에서 꺼낸 다음 몸을 녹이는 실험을 했는데 온갖 미친 방법들을 동원했다. 대표적인 것이 여자들이 몸을 녹이는 방법 중에는 강간을 이용한 해동 방법도 실험하여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을 당했다.[2][3][4] 그 외에도 말라리아에 대한 위험성과 치료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요제프 멩겔레를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이 약 천명이 넘는 희생자들을 실험했고 희생자들은 사망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죽을 때까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외에도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겨자 가스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전쟁 당시에 겨자 가스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와 나츠바일러(Natzweiler) 수용소에서 피해자들을 겨자 가스에 노출시킨 후에 상태를 보았다. 피해자들은 처음에는 멀쩡했으나 가스에 노출된 후 24시간 안에 심한 가려움증과 피부 자극 증세가 나타나고, 노란색 액체로 가득찬 거대한 수포가 노출된 부위에 생겼다. 겨자 가스 기체는 면이나 모 같은 일반적인 천을 간단하게 통과하기 때문에 노출 당시에 옷으로 가리고 있던 부위라도 수포가 생겼으며 안구에 노출되었을 시에는 처음에는 따갑다가 결막염을 일으키고, 눈꺼풀이 부어올라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고농도의 가스를 흡입한 경우 호흡기의 출혈과 수포를 일으켜 점막에 손상을 주고 폐수종을 일으켰으며 겨자 가스에 노출되어 입는 환부 부상은 화학물질로 인한 화상으로, 노출된 가스 농도에 따라 1도에서 2도 화상, 심한 경우에는 3도 화상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심한 화상(신체 면적의 50%를 넘는 화상)은 치명적이며 환자가 며칠이나 몇 달 후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겨자 가스에 노출되었다가 생존한 자는 겨자 가스의 돌연변이 유발과 발암성 때문에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졌다고 한다.
그 다음 독극물 실험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다양한 독극물에 대한 효능을 알기 위해 실험했는데 실험자들에게 엄청난 양의 독이 투입되어 많은 이들이 사망했으며 음식에 독을 타서 실험자들에게 몰래 먹이기도 했다 또한 독을 이용해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지가지 방법으로 실험했는데,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독을 바른 총알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질산염을 첨가한 총알을 개발했고 이 총알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사격 실험을 자행하여 수많은 포로들을 죽게 만들었고 그들은 독으로 인해 온몸이 마비되거나 고통을 겪다가 사망했으며,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백신이랍시고 괴상한 물질들을 환자에게 투입해서 환자들이 사망했다.
그 외에도 이른바 전염병 황달 실험도 실시했는데, 이 실험은 여러가지 질병들에 대한 치료와 관찰을 위해 시작되었고 카를 브란트는 라벤스뷔크에서 피해자에게 질병과 황달액을 강제로 투입했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바닷물을 주입하는 이른바 바닷물 주사 실험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공군의 조종사와 해군의 선원들이 바닷물을 마실 수 있는 가를 실험하기 위해 피해자들은 음식과 물을 먹지 못하도록 강제로 막았으며 오로지 화학약품으로 처리된 바닷물만 마시게 했다, 결국 장기가 엄청나게 손상되었으며 엄청난 고통 끝에 피해자들은 사망했다. 그 외에도 근육과 신경 재생 뼈 이식 실험까지 실시했는데 실험의 목적은 외과 시술의 발전이라는 목적으로 행해졌는데 육군의 부상병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행되었다. 이 실험은 피해자들에게 근육과 뼈 그리고 피부나 팔 다리와 같은 부분들을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마취도 하지 않고 잘라낸 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잘라낸 부위를 이식하는 미치광이 실험이였다. 희생자들은 서로 다른 혈액형 때문에 사망했으며 과다출혈로 사망하거나 아주 운이 좋으면 몸의 일부가 절단되는 정도였고 심한 사람들은 사지가 갈갈이 찢기기 까지 했으며 평생동안 몸의 일부가 잘린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나중에 T-4 프로그램이 시민들의 항의로 중단되자 장애인들이 자연사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일부러 병균을 주입하거나 일부러 며칠이 넘는 시간 동안 굶겨서 죽게 만들어서 처참하게 사망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에 인간 말종 카를 게프하르트가 실험했던 술폰아미드 실험도 카를 브란트가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 실험은 술폰아미드라는 특별한 화학 물질이 인체에 어떠한 효과를 미치는지 실험하기 위해서 실시되었다. 술폰아미드를 사용한 실험자들은 희생자들에게 우선 다양한 종류의 박테리아를 예를 들어서 연쇄상구균, 가스 괴저균 또는 파상풍균 등과 같은 물질들을 투입하였고, 실험의 현실성을 높힌다는 목적으로 유리조각이나 철 조각, 나무 조각으로 실험 대상자들이 상처가 날 때까지 비비다가 상처가 나면 그 상처에 술폰아미드를 투입하여 그 효과를 본 것이였다. 물론 이 술폰아미드를 상처에 투입하자 그 부위가 썩어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또한 발데마어 호펜이 주도적으로 실시함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황열병, 천연두, 파라티푸스, 콜레라 등을 비롯한 여러가지 바이러스의 위험성과 치료법, 백신 개발법을 개발하기 위해 온갖 약물을 투여하는 실험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 실험 보고서에 따르면 실험자의 90% 이상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안다고 죽을 때까지 환자를 방치하거나 바이러스를 위한 백신 개발에서 온갖 괴상한 물질을 투입해서 피해자들이 처참하게 사망했다.
근데 실제 술폰아미드는 설폰아마이드라고도 하는데, 항균 작용이 있는 물질이다. 여담으로 테오도어 모렐이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물중 하나이기도 하다. 딱히 해로운 물질은 아니다만... 아마 이 새끼들이 술폰산의 다른 화합물을 써서 실험한듯 하다.
게다가 더욱 악질적인 일화로는 아이와 노인들도 대상으로 하여 가스나 약물을 주입시켰고 그는 실험대상들을 독일을 위하지 못하는 쓸모 없는 식충이들로 비유했으며 실험 당시에 심지어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울부짖기도 했는데도 냉정하게 무시했다. 게다가 어떤 포로가 "그냥 총살형으로 죽여 달라. 무엇 하려고 가스실에 집어넣고 구차하게 죽이려고 하느냐”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놈은 포로들을 실험 성과도 없이 그냥 죽이기 싫어서 저렇게 죽였다고 한다. 카를 브란트는 포로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없게 만들어서 그들에게 더욱 절망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가스실에는 각종 이상한 약물이 넘쳐났고, 얼굴이 흉측하게 된 사람, 몸이 썩어들어 가는 사람, 몸이 녹아가는 사람 등 등의 각종 기괴한 모습의 사람들이 또는 시신이 가스실에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의 내용은 아마도 극히 일부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놈들이 전후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게 되면 무슨 일이 있을지를 뻔히 알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료들을 파기해 버렸고 생존자들을 죽여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실들이 묻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죄들이 전부 묻힐 수는 없는 노릇이였고 이러한 나치독일의 생체실험이 하나하나 해외에도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악질적인 생체실험은 나치의 전쟁범죄로 분류되어 전후 생체실험 혐의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된 23명의 의사에 대한 재판의 명칭이 Karl Brandt et al.(카를 브란트 등.)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4 몰락
1944년 10월 5일에 한스 카를 폰 하셀바흐(Hans Karl von Hasselbach)와 함께 테오도어 모렐 의학박사[5]가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내는 바람에 신망을 잃어 마르틴 보어만으로부터 총통부 의사직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게다가 전황이 아무리 봐도 불리해지는 상황에 이르자 그는 자신과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 소련군에게 체포될 것을 우려해서 우선 연합군이 있는 쪽으로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미군 쪽으로 보냈지만 이것이 히틀러에게 들통나버리고 말았다. 히틀러는 자신과 매우 가깝게 지냈던 카를 브란트의 배신에 매우 분노했고, 그래서 카를 브란트는 1945년 4월 16일에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음날 사형선고를 받았고 교도소로 들어갔지만 그와 친분이 있었던 알베르트 슈페어와[6] 하인리히 힘러가 그가 총살되지 않도록 도왔고 결국 히틀러가 자살하고 5월 2일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카를 되니츠가 이 쓰레기의 악행을 알고 매우 경악했고 나중에 연합군에게 넘겨 버렸다.[7] 결국 전후인 1945년 5월 23일에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 회부된 카를 브란트는 냉동실험, 말라리아 실험, 독가스 실험, 술폰아미드 실험, 근육 및 신경 재생과 뼈 이식 실험, 바닷물 주사 실험, 전염병 황달 실험, 살균 실험 및 발진티푸스 실험을 실행하고 계획하는 것으로 기소되었고, 나치 독일의 T-4 프로그램에서의 안락사 실험과 프로그램 계획 및 SS에서 침략전쟁에의 협력, 전쟁범죄 및 비인도적인 범죄혐의로 유죄를 판결받았고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재판에서도 자신은 잘못한 점이 조금도 없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실시했던 안락사 프로그램의 유용성(?)과 효율성(?)을 주장하며 재판관을 설득하려 했으며, 안락사 프로그램이 얼마나 인도적인 방법인지를 주장하는 미친 발언을 일삼았다. 심지어 나치의 의사들이 실시한 의사실험은 히믈러의 지휘 아래 있었으며 히믈러가 시켰으면 그 의사들은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과 나머지 의사들이 저지른 생체실험은 모두 하인리히 힘러가 명령해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하인리히 힘러가 당신 구해줬는데 저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하긴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결국 끝까지 정신 나간 생각을 주장하며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그로를 끌어버렸고, 그는 어그로를 끈 대가를 뼈져리게 치루게 되었다.
1947년 8월 20일 전범 재판장에서의 카를 브란트 저 오른쪽 문 뒤에서 이놈을 패고 싶어하는 헌병의 표정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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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인 카를 게프하르트와 사이좋게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끌려간 카를 브란트는 어그로를 잔뜩 끈 대가로 거기에서 연합군 헌병들과 동료수감자들에게 사형 집행날까지 무자비하게 얻어 터졌다. 심지어 구타가 너무 심하자 "아악! 목숨만 살려줘!!!"라고 애처롭게는 개뿔이 애처롭게냐 비명을 질렀다. 니가 실험한 사람들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는데 너는 살고 싶었니?[8] 그리고 다른 동료수감자에게도 맞은 이유는 다른 적군도 아닌 자국민들을 제멋대로 생체실험으로 학살했기 때문에 그를 인간취급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
결국 1948년 6월 2일, 얼마나 얻어 터졌는지 누워있는 채로 질질 끌려와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용케도 약 1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두들겨 맞았음에도 정신이 남아 있었는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발판에 서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이것은 정치 보복일 뿐이야... 나는 내 조국을 위해서 일했...다...."[9] [10] 라고 말했다. 웃긴 사실은 더 말하려고 했는데 저 이야기를 듣다가 교수형 집행하는 사람이 짜증났는지 중간에 말을 끊고 다시 개패듯이 두들긴 뒤[11] 그냥 교수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처형되는 카를 브란트
사진만 보면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는데 왜 저렇게 멀쩡한지 의문이 들 것이다. 저 인간의 얼굴이 저렇게 멀쩡한 이유는 병사들이 몸통과 뒤통수 위주로 두들겨 패서 그렇다. 원래는 얼굴도 두들기려고 했으나 헌병들이 "사진 찍어야하는데 얼굴을 때리면 티가 나잖소. 그러니 몸통이나 다른데를 치시죠?"라고 설득해서 저런 것(...). 심지어 저렇게 일으켜 세운 것도 억지로 일으켜 세운 거다. 흠좀무.
그가 죽기 이레 전에 라이벌(?)이던 테오도어 모렐은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의사로 무능하지만 브란트와 달리 생체실험은 반대하면서도 그 수괴를 대상으로 자행하고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여기며 이런 생체실험을 듣는 것만으로 구역질을 내던 모렐은 사람으로서는 개념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처벌 근거도 죄도 없어 석방되었고 집에서 편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모렐은 죽기 얼마전에 브란트나 게프하르트를 생각하면서 "그 둘은 안되었어. 적어도 난 침대에 누워 제명대로 살기라도 하는데..." 라고 말했다고 한다.
6 기타
카를 브란트의 아내 아니 레본(Anni Rehborn)
(1907년 11월 20일 ~ 1987년 11월 30일)
- ↑ 최종계급은 친위대중장.
- ↑ '강간'이라는 부분에서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본문에도 언급되었다시피, 실험에 참여한 남성 피실험자들 역시 (주로 소련) 전쟁포로들로써 피해자의 입장이지 여성들을 '강간'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얼음물 속에서 의식을 잃었기 때문에 여성을 강간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도 않았다. 또한 피해여성들은 대부분 명목상으로는 '자원자'였는데, 이들이 자원한 이유는 그들이 원래 있던 수용소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기 때문에, 그 곳을 벗어나기 위해 실험에 자원한 것이었다. 즉 남성에 의한 강간이라기보다는 시스템에 의한 강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 사실 성행위를 통한 해동방법은 실험에 참가한 대다수 의사들도 반대했던 방법인데, 히믈러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실시되었다고 한다. 물론 실험결과 이 방법은 '비실용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 ↑ 참고로 감압과 냉동실험의 담당자는 '지그문트 라셔'라는 의사였으며, 이 인물은 부인이 48세의 나이로(라셔 자신은 30대 중반이었으므로 10살 이상 연상이었던 듯) 자식 3명을 낳은 일로 히믈러의 신임을 얻어 T-4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세 자식이 부인이 낳은 것이 아니라 고아원에서 빼돌린 것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결국 이들 부부는 슈츠슈타펠에 의해 수용소로 보내져 처형당했다.
- ↑ 히틀러를 마약 중독자로 만든 나치 입장에선 돌팔이 소리 들어도 할말이 없는 의사.
그 정체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요원이라 카더라히틀러의 주치의였긴 했지만 이 사람은 민족 학살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가담하지 않았고 생체 실험은 의사로서 할 짓이 아니라며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그럼에도 워낙 이 의사의 처방이 효과만큼은 쩔어주게 잘 들어서(장기적으로는 독약이었지만) 히틀러가 매우 신임했고 결정적으로 이 의사양반은 전후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 카를 브란트가 처형당하기 일주일 전에 침대에 누워 편히 세상을 떠났다. - ↑ 카를 브란트의 아내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아내와 굉장히 친했기 때문에 그리고 알베르트 슈페어도 카를 브란트와 꽤나 친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이였다.
- ↑ 사실 연합군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왜냐? 악행을 보고 경악한 카를 되니츠가 이 새끼를 손수 때려 죽이려고 했는데 에리히 레더가 말렸다고 한다.
- ↑ 이 당시 형무소에 파울 하우서(무장친위대 상급대장)가 있었는데 하도 패는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자 "오호라~ 누군지 진짜 찰지게 두들기네."라고 감탄했다(...). 그래서 하도 궁금한 파울 하우서의 주치의가 간수에게 물어보고 알려주길 "장군님, 지금 인간의 탈을 쓴 마귀들을 두들기는 중입니다. 장군님도 시간 나시면 같이 패시겠습니까?"라고 묻기까지 했단다.
하긴, 의사 입장에서는 패주고 싶었겠지생체실험에 참여한 인간말종들은 동료 수감자들에게조차 인간취급을 못받고 얻어터졌는데 이 때 처맞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짐승들 때문에 파울 하우서는 곤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주치의는 "저런 망할 놈들... 죽는 순간에도 민폐만 끼치는군." 라고 투덜댔을 정도. - ↑ 참고로 굉장히 작게 말했다고 한다. 그나마 옆의 간수가 귀가 밝아서 이렇게 후세에 전했지,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유언을 남겼어도 뭐라고 했는지 남겨지지도 못했을거다.
- ↑ 물론 조국을 위해서 일했다 운운하는 것도 이상한게 애초에 이 미친 실험으로 죽은 사람 대다수는 독일인이었다.
- ↑ 아래 사진 촬영후에 처맞았다.
- ↑ 이 점은 히틀러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