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브라운

Eva Braun, 1912.2.6~1945.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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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풀네임은 에바 아나 파울라 브라운(Eva Anna Paula Braun)[1]. 아돌프 히틀러의 오랜 동거녀이자 유일했던 부인이다.

1 생애

바이에른의 주도 뮌헨 태생으로 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재봉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는 대체로 평범한 학생으로 여겨졌지만 체육 과목에서 만큼은 다른 학생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았다. 이후 1차대전의 패전과 뒤이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17살 때 어느 사진관에서 조수 겸 점원으로 고용되어 일하게 되었는데 그 사진관의 운영자가 바로 나치 공식 사진사였던 하인리히 호프만이었다.

호프만은 브라운을 좋게 봤는지 사진 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또 자연스레 사진관에 드나들던 초기 나치 고위 간부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브라운이 히틀러와 처음 만난 것은 23살 때인 1929년이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브라운은 일편단심 히틀러를 사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당시 자신과 외종조카딸 관계였던 겔리 라우발과 동거하고 있었고 브라운과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동거하기 시작한 것은 라우발이 권총으로 자살한 1931년 9월 이후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히틀러는 정권을 잡기 위한 선거 유세 활동 등으로 바빠서 브라운과 자주 만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상심한 브라운은 1932년 8월에 라우발처럼 아버지의 권총을 몰래 훔쳐와 자살을 기도했다. 총상이 그리 심한 편은 아니라 빨리 회복되었지만 라우발과 같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에 멘붕한 히틀러가 브라운과 더 적극적인 관계가 되는 플러스 효과를 얻었다.

그녀가 남긴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나는 단 한가지 소원뿐이다. 심하게 병이 나서 적어도 8일 동안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으면 싶다. 어째서 내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날까, 어째서 나는 이 모든 것을 견디어내야만 하는 걸까? 차라리 그를 몰랐더라면. 나는 절망상태다. 다시 수면제를 산다. 그러면 비몽사몽에 빠져서 그렇게 많은 생각을 안 하게 되겠지. 어째서 악마는 나를 데려가지 않는지. 악마 곁에 있는 것이 여기 있는 것보다 낫겠다. 세 시간 동안이나 칼튼 앞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온드라에게 꽃을 사주고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그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만 나를 필요로 한다. 다른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면 바로 이런 순간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한 번도 지키지 않은 약속들과 꼭 같다. 어째서 그는 나를 이토록 괴롭히면서 곧장 끝내지 않는 걸까?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공식적인 정권을 잡게 되자 브라운은 호프만과 함께 나치 공식 사진사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위신 관리를 위해 브라운과 결혼할 계획은 커녕 그녀를 어떠한 공식 행사에도 초대하지 않았다. 결국 브라운은 1935년 5월에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이 자살 시도도 실패로 끝났고 히틀러는 다시 브라운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자신이 주로 머물던 뮌헨과 베르히테스가덴 근교의 베르크호프에 아파트와 별장을 마련해 달랬다. 또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베를린에 새로 짓던 총리 관저(이후 총통 관저)에 브라운을 위한 주거 시설을 추가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히틀러는 '남자는 강인하고 명민한 지도자여야 하고 여자는 그에게 순종하는 주부여야 한다' 는 남존여비식 사고를 버리지 않았고 브라운은 호프만의 조수로 히틀러의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평생동안 브라운과 함께 있는 모습을 절대 공식 석상에서 연출하지 않았고 심지어 사적인 자리에서도 브라운과 손잡는 것 외에는 일체의 애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슈페어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이 동침한 적은 언제 어디에서도 단 한 차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금욕적인 모습이었다는데 덕분에 히틀러의 최측근들을 제외한 모든 독일인들은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히틀러와 브라운의 관계는커녕 브라운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육체적인 관계의 일괄적인 부정 외에도 히틀러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하는 연설을 제외하고는 브라운이 있는 자리에서는 가능한한 정치나 사회, 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으려고 했다. 실제로 베를린 총통 관저에서든 베르크호프의 별장에서든 브라운의 거처는 히틀러가 정치/군사 관련 회의를 갖는 공간과 이격되어 있었다.

대신 브라운은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 없이 히틀러(가 부정축재로 모은) 사재와 국가 예산을 마음껏 자신의 사치에 퍼붓기 시작했다. 히틀러도 자신의 육체적인 애정은 주지 못해도 물적으로는 만족시켜주고 싶었는지 1934년부터 기존 베르크호프 별장을 대폭 확장하는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면서 당시로서는 최고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하는 대규모 리조트급 휴양지로 바꾸었다.

개축된 베르크호프 별장의 히틀러 방과 브라운 방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육체적 관계를 가진 적은 상술한 대로 한 차례도 없었다. 대신 브라운은 자신의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초대해 베르크호프와 그 주변에서 호화로운 파티와 하이킹, 수상스키, 체조, 여행 등의 여가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고 아직 전황이 그리 어둡지는 않았던 1940년대 초반에는 호화 유람선과 비행기를 대절해 북유럽과 남유럽을 여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2년 이래로 전쟁이 점차 독일에 불리해지기 시작하고 1943년에는 괴벨스에 의해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지면서 모든 사치품의 생산이 금지되었다. 이는 물론 브라운이 애용하던 수많은 화장품향수, 모피 코트, 드레스, 장신구 등에도 해당되었지만 히틀러는 군수 장관이었던 슈페어에게 비밀리에 브라운이 사용하는 이들 사치품의 생산을 계속하도록 지시했다.[2]

이렇게 브라운은 대다수 독일인들이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더없는 유복함을 누리고 있었지만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터지면서 현실을 직시하는 듯 했다. 뮌헨에 있었던 브라운은 히틀러에게 자신의 애정은 죽을 때까지 변함 없을 것이라는 충성 맹세식 편지를 보냈고 이때부터 히틀러와 브라운의 관계는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현실 직시가 아니라 완벽한 현실 부정

물론 이들 사이의 관계 진전과는 별도로 독일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막장이었고 베를린이 소련군에 의해 함락 위기에 놓인 1945년 4월 초순에 브라운은 안전한 베르크호프에 머물러 있으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베를린의 총통 벙커로 들어왔다. 히틀러나 그의 광신적인 측근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통 벙커의 사람들은 브라운이 히틀러와 같이 죽기 위해 들어온 것으로 생각했다.

브라운은 벙커에서도 뮌헨과 베르크호프에서 그랬던 것처럼 값비싼 옷과 화장품, 샴페인을 소비하면서 태연하게 지냈지만 벙커 내에서도 느껴지던 격렬한 시가전의 전황과 날이 갈수록 폐인이 돼가고 있던 히틀러의 모습에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히틀러는 자신이 소련군에 잡혀 온갖 복수와 조롱의 노리개가 되느니 자살하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브라운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힘러의 부관이면서, 자신의 여동생 그레틀과 결혼해서 제부가 되는 SS 장교 헤르만 페겔라인이 반역죄로 즉결처분될 위기에 몰리자, 브라운은 히틀러에게 페겔라인을 살려줄 것을 탄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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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히틀러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따라준 브라운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고 4월 28일(또는 29일) 밤에 국민돌격대의 일원으로 베를린 전투에 참가하고 있던 발터 바그너라는 공무원을 공증인으로 데려와 결혼 증서에 서명했다[3]. 브라운은 증서에 자신이 뉘른베르크 인종법에 위배되지 않는 순수 아리아인이라고 증언했고 서명란에는 에바 B... 라고 적으려다가 지우고 에바 히틀러, 혼전성 브라운(Eva Hitler, née Braun)이라고 적었다.

물론 이렇게 결혼하기는 했지만 꿀맛 같은 허니문이고 뭐고 그런 거 없었다. 히틀러는 죽기 직전 마지막 식사를 아내 브라운이 아닌 여비서들인 트라우들 융에, 게르다 크리스티안과 요리사 콘스탄체 만치아를리와 나누었고 그동안 브라운은 자신이 쓰던 나머지 사치품들을 총통 벙커에 남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30일 낮 1시가 좀 넘은 뒤 히틀러와 브라운은 총통 벙커의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히틀러의 거실로 들어가 동반 자살했다.

오후 3시 반쯤 되자 총통 벙커 사람들은 히틀러 거실에서 뭔가 폭음이 난 것을 들었고[4] 결국 히틀러의 집사 하인츠 링에와 SS 부관이었던 오토 귄셰가 문을 열고 들어가 둘의 죽음을 확인했다. 이들의 시체는 벙커의 환풍구 계단을 통해 바깥으로 운반되었고 총통 관저의 정원에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서 휘발유로 화장 처리되었다.

2 평가

상술한 대로 대다수 독일인들 뿐 아니라 연합군 관계자들도 히틀러와 브라운 사이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이들이 자살한 뒤 바실리 추이코프가 소련군 사령부에 협상을 하러 온 OKW 참모장 한스 크렙스에게 히틀러 부부가 벙커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브라운의 존재를 알았을 정도였다.

히틀러가 죽기 전에 자신과 관련된 기밀 문서를 모두 파기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브라운과의 관계는 그 뒤로도 별로 화젯거리가 되지 않다가 총통 벙커 생존자들의 증언들이 나오면서 확실한 사실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연합군 군정 당국과 독일 정부가 브라운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또 그 과정에서 브라운이 사적으로 찍은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공론화 되었다.

하지만 브라운은 이후에도 여타 독재자의 아내나 내연녀들 중 가장 평판이 나쁜 인물에 속하고 있다. 물론 브라운의 죄는 히틀러를 사랑한 것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지만 그녀가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내핍 생활을 강요당하고 폭격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전혀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국가 예산을 펑펑 쓰면서 사치 행각을 벌였다는 것에는 실드 쳐줄 여지가 없다.[5] 심지어 국민 총동원령을 지시한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도 남편의 요구를 받아들여 군수공장에서 일했던 것에 비하면 골수 나치빠였던 마그다만도 못한 셈.

그녀의 이러한 사치는 히틀러의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이 관리하였다. 하지만 에바는 보어만을 진심으로 역겨워했으며 그와의 대화를 가능한 피하고 싶어하였다. 보어만 역시 에바 브라운을 현실감각 없는 여자라고 비웃었지만 어쨌든 둘 다 서로에게서 받을건 철저하게 다 받아냈다.[6]

그나마 실드쳐줄 것이 있다면 전범은 아니었다는 점인데, 유대인 수용소 등에서 일하던 여성들과 달리 전쟁범죄를 저지를 만한 권한이 없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종전 후 계속 진행된 브라운 관련 연구에 의하면 브라운도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의 전쟁 범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그러한 애인의 반인륜적 행각을 자신의 애정으로 덮어서 무시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녀가 나치 당원이 아니었음에도 권력자에 대한 그릇된 숭배심에 매달려 현실 감각을 저버렸다고 비난하는 쪽의 좋은 떡밥이 되고 있다.

3 매체에서의 묘사

  • 히틀러가 사망할 때까지 주변에 있던 지인들의 증언으로 만든 영화 몰락에서는, 전쟁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벙커 내부에서 댄스파티를 열거나 트라우들 융에에게 자신의 모피 코트를 선물해주는 등 사치스러운 그녀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재연되어 있다.
  • 울펜슈타인 3D에서 히틀러의 뼈와 살을 분리(진짜로)하면 히틀러가 유언으로 에바를 언급한다.
  • 펫숍 오브 호러즈에서도 그녀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D 백작 일족 중 하나가 2차대전 시대 때 에바 브라운에게 '기린' 이라는 환수를 거래했다고 한다. 기린은 자신이 선택한 주인에게 부와 명성을 주지만 그 댓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환수였고[7] 이리하여 에바 브라운의 출세를 댓가로 2차 세계대전 발발. 정확히는 에바는 히틀러가 자신만을 바라봐 줄 것을 원했는데, 히틀러가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가질때 질투를 부리곤 했다. 이때 기린의 인간 모습은 금발의 미소년으로, 히틀러는 기린을 보고 블론디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결국 역사대로 전쟁은 독일의 패망으로 이어졌고 베를린은 소련군에게 점령되었고 에바는 히틀러와 함께 자살을 했으며 기린은 불타는 베를린을 뒤로 하고 그대로 떠난다.
  • 그리고 달숙이에서는 히틀러와 함께 실비아라는 이름의 폭유녀로 환생했다 카더라
  • SBS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도 이들의 일화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극중 인물 태주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 설희에게 지하벙커까진 밀려나지 않을거라며 안심시킨다...
  1. 사실 독일어 V는 /v/가 아닌 /f/로 발음하며, Eva의 발음 역시 /eːfa/이다. 따라서 표기법상 에바가 아닌 에파가 정확하지만 이미 에바로 굳어진 상태.
  2. 물론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여성이 춤추는 것이나 담배 피우는 것, 짙은 화장을 하는 것을 싫어해서 베르크호프의 다른 여성들에게는 이를 엄격히 금지했지만 브라운은 예외여서 히틀러 눈앞에서 하지 않았을 뿐 이런 금기를 모두 즐길 수 있었다.
  3. 바그너는 결혼식 후 전선으로 복귀하던 중 죽는다.
  4. 다만 이 폭음은 실제로 권총 소리는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 대세다. 히틀러의 거실을 포함한 방에는 방음 장치가 되어있어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날 수 없었다고 한다.
  5. 히틀러의 마지막 여비서 중 한 사람이었던 트라우들 융에는 브라운이 같은 옷을 두 번 입은 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증언 외에도 브라운이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컬러 필름으로 찍은 자신의 여가 동영상을 보면 전쟁 당시 가난과 전화에 찌들었던 독일인들이 왜 그렇게 분노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유튜브에서 Eva Braun Home Movies로 검색하면 볼 수 있다).
  6. 다만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녀는 히틀러의 지시를 받은 보어만이 값비싼 보석들을 확보하여 전달했음에도 그것으로 치장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7. 굳이 전쟁만 일으키는건 아니고, 주인에게 파멸적인 결말을 불러온다. 에바의 경우는 2차대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