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에서 1999년까지 대한민국의 대한축구협회에서 개최한 국제축구대회.
1 개요
대회명칭이 자주 바뀌었는데, 변경된 순서는 다음과 같다. "박스컵"이라는 별명도 있는데, Box cup이 아니라 Park's cup이다. 본래 이름이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라서 이런 별명이 붙은 것.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 1971-1975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 1976-1978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 1979-1993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 1995-1999
70년대에는 아시아 3대 국제 축구대회라고 불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한국에서 부르던 이름이다. 다른 2개는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태국의 킹스컵이다. 일본은 코리아컵 대신 자국 주최대회인 기린컵을 넣어 3대 대회라고 불렀다. 당연히 일본은 코리아컵을 개무시했고, 한국 역시 기린컵을 개무시했다. 한국은 1978년 제1회 기린컵에 딱 한 번 참가해 3위를 거둔 바 있다. 기린컵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브라질과 독일 클럽팀에겐 졌으나, 일본 대표팀은 3-0으로 뭉개버렸다. 일본은 1981년 코리아컵에 역시 딱 한 번 출전했다.
2010년대 와서 코리아컵은 사라지고, 다른 대회들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 대회도 2010년 이후로는 아시아 축구의 성장과 맞물려 상황이 썩 좋지 않다. 메르데카컵도 오랫동안 열리지 않다가 가끔씩 열리고 있고, 그마저도 폐지 수순을 밟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킹스컵은 2년에 1번씩 꾸준히 열리지만, 이젠 정예 A대표팀이 아닌 청소년 대표팀이나 2진급이 나가는 대회가 되었다. 기린컵도 2013년~ 2015년에는 열리지 않다가, 2016년에 열리게 되었지만 이마저도 월드컵 최종예선을 앞둔 정비작업 수준일 뿐 옛날옛적 그 모습은 아니다.
2 의의
요즘에야 세계 대회에서도 괜찮은 성과를 올리고 있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월드컵 예선 통과도 어려운 축구 약소국이었다. 때문에 이 축구대회는 대한민국이 나갈 수 있는 몇 안되는 국제대회 가운데 하나였다. 지국 주최이니 당연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 한국이 월드컵 본선 진출을 거의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무용론이 확산되었고,[1] 결국 1999년 대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이제는 대회 기록조차 쉽게 찾기 어렵도록 묻힌 상태.
미래에도 이 대회가 부활할 가능성이 회의적이라고 보여지는데, FIFA의 정책과 각 대륙별 축구협회의 경향상 이 같은 소규모 국제축구대회는 사장되는 추세에 놓여 있다. 일단 월드컵 위상이 상승하면서 '월드컵 예선'위상도 그 만큼 강해졌고, 각 대륙별 축구대회와 그에 연계되는 컨페더레이션스컵의 체계가 정비되면서 대륙별 축구대회의 위상도 상승. 이에 따라서 일개국 축구협회에서 진행하는 소소한 국제대회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2003년 동아시아 축구 연맹의 창설과 함께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가 2년 간격으로 개최되어, 한국과 일본으로서도 축구 후진국 시절 아웅다웅하던 대회까지 굳이 존속시켜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현재로선 각국 축구협회는 더 이상 이런 '집안 잔치' 대회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정확히는 이득이 안 나온다. 집안 잔치를 해봤자 어차피 대륙별 대회, 공인된 국제대회만큼 권위가 없다는걸 FIFA에서도 확인사살[2]을 해버리니 축구팬들로부터 '쓸데없는 짓'이라는 비판만 받을 뿐이다. 일단 메르데카컵이나 킹스컵, 기린컵은 명맥은 유지하고 있으나 앞서 설명된 듯 당장 내년에 폐지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수 년만에 개최된 기린컵 역시 다음 개최는 또 언제가 될 지 아무도 모른다. 메르데카컵이나 킹스컵은 항목만 봐도 알겠지만 참가팀들이 대학팀이나 각나라 올림픽팀, 2진들이 주로 참가하기에 A매치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간혹 A대표팀이 참가해도 축구 약체들이나 주로 나오는 수준이다. 결국 왕년의 아시아 3대 국제대회가 이제는 존속조차 불투명한 셈이다.
3 방식
해외의 팀들을 초청해와서 열렸는데, 출전팀의 숫자는 매회마다 바뀌어서 일정하지 않다. 최저 4에서 최대 16까지 오락가락. 개최도 2년 간격이거나 1년 간격이거나 한다.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국가대표팀과 클럽팀 간의 경기가 빈번했었다.[3] 따라서 국가대표팀만이 아니라 클럽팀이나 선발팀도 참가했다. 참가팀 가운데는 "브라질 상파울루 주 프로리그 21세이하 선발팀"도 있었다. 그리고 이 팀이 76년, 77년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 외에 한국 선수가 활약하던 PSV 아인트호벤이나 레버쿠젠, 심지어는 1988년에 QPR(!!!)이 초청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클럽팀이 출전한 것은 95년 (스코틀랜드 킬마녹 등) 이며, 마지막 2회인 97, 99년 대회는 4개국 대표팀 초청경기로 열렸다.
76년에서 86년까지 대한민국은 A팀을 화랑, B팀을 충무로 나눠서 2개 팀이 출전했다. 85년 대회에서는 국가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이 따로 출전했다.
3.1 대회 목록
- 특별히 표시되지 않는 한 국가명은 성인국가대표 (한국대표 A/B팀 분할 참가시 A팀인 '화랑').
회차 | 연도 | 우승 | 준우승 | 비고 |
1 | 1971 | 한국, 미얀마 공동우승 | ||
2 | 1972 | 미얀마 | 인도네시아 | 한국 3위 |
3 | 1973 | 미얀마, 크메르 공동우승 | 한국 3위 | |
4 | 1974 | 한국 | PSMS 메단 (인도네시아) | |
5 | 1975 | 한국 | 미얀마 | |
6 | 1976 | 한국, 브라질 상파울루주 U-21선발 공동우승 | 충무 3위 | |
7 | 1977 | 상파울루주 U-21선발 | 한국 | 충무 조예선 탈락 |
8 | 1978 | 한국 | 워싱턴 디플로매츠 (미국 NASL) | 충무 3위 |
9 | 1979 | 비토리아FC (브라질) | 한국 | 충무 4위 |
10 | 1980 | 한국 | 인도네시아 | 충무 3위 |
11 | 1981 | 한국, 라싱 코르도바 (아르헨티나) 공동우승 | ||
12 | 1982 | 한국, 오페라리우FC (브라질) 공동우승 | 한국 클럽 첫 참가 (할렐루야, 3위) | |
13 | 1983 | PSV 아인트호벤 (네덜란드) | 한국 | |
14 | 1984 | 방구AC (브라질) | 할렐루야 | 한국 3위 |
15 | 1985 | 한국 | 한국 88올림픽팀[4] | |
16 | 1987 | 한국 | 오스트레일리아 | 충무 마지막 대회 (공동 3위) |
17 | 1988 | 체코슬로바키아[5] | 소련 B대표 | 한국 3위 |
18 | 1989 | 체코슬로바키아 | 브뢴비IF (덴마크) | 한국 3위 |
19 | 1991 | 한국 | 이집트 | |
20 | 1993 | 이집트 | 한국 | |
21 | 1995 | 에콰도르 | 잠비아 | 한국 3위 |
22 | 1997 | 한국 | 유고슬라비아[6] | 4개국 그룹리그 방식 |
23 | 1999 | 크로아티아 | 멕시코 | 한국 3위 |
4 에피소드
차범근의 전설적인 6분 해트트릭이 1976년 대회에서 나왔다.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후반 종료 7분전까지 1-4로 탈탈 털리고 있었으나, 차범근이 후반 38분, 42분, 44분에 한 골씩을 넣어 동점을 만들었다. 차범근은 이후로도 조별리그 전경기 득점을 기록하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고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스타임을 입증했다.대회가 끝난 후 국방부 퀘스트로 끌려간 건 안자랑
특이하게도 몰수무(!!!) 경기가 있기도 했다. 몰수패, 몰수승이 아니다. 정확히는 주최측에 의한 경기중단 및 무승부 처리. 1987년 6월 10일 경남 마산에서 열린 한국 대 이집트전이다. 경기 날짜를 보자. 87년 6월 항쟁의 바로 그 시기다. 마산은 4.19 이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의 중심도시 중 하나였던 터, 6월 항쟁 와중에 시위대가 거리를 점령할 지경에 이르자 경찰병력이 미친듯이 최루탄을 쏴제꼈고, 최루가스가 바람에 날려 바로 옆 축구장까지 덮치는 바람에 경기가 중단된 것(...).#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이 경기를 하던 1988년 대회 준결승전에선 체코슬로바키아와 승부차기까지 갔으나 아쉽게 패했다.
대표팀 내 사조직 열하나회의 존재가 알려진 계기도 이 대회에서 나왔다. 95년 대회에서 잠비아를 상대로 무기력하게 패한 후 박종환 감독이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 전날 숙소를 무단이탈해서 음주행각을 벌였다고 폭로했고 그 중심에 열하나회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 큰 홍역을 겪은 열하나회는 현재 열린 단체로 전환하고 자선, 봉사 활동에 힘쓰고 있다.
그러자 열하나회에선 이를 두고 박종환에게 앙심을 품어, 1996년 AFC 아시안컵 이란전에서 고의로 2:6 대패를 벌여 박종환 감독이 비난을 받게했다는 음모론도 나왔다. 실제로 한국 대표팀이 전반까지 앞서다가, 후반들어 이유없이 와장창 무너져내렸기 때문.
수단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다 점수차 패배 기록이 1979년 대회에서 나왔다. 9월 8일 치러진 조별 예선 첫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0:8로 패배한 것. 그리고 수단은 2승 2패, 조 3위를 거두며 4강 진출에 실패한다. 한편, 이 대회에서 세운 수단의 점수차 패배 기록은 수단 축구 역사상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앞서 설명된 것처럼, QPR도 1988년 오프시즌 중 영국 대표로 나간 사실이 있었다. 당시 소련과 유고, 체코, 헝가리, 나이지리아 등 만만치 않은 대표팀을 대거 초청한 조직위원회는 당시로써는 많은 금액인 7천 4백만원을 주고 QPR을 데려온 것이다. 당시 QPR은 4개 조로 이루어진 조별 리그에서 미국, 소련, 그리고 나이지리아 올림픽 대표팀과 같은 조에 속했다. 이때 미국과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둘 다 동점을 이루었지만 소련에게 3-0으로 패배하였다. 당시 관중 수 5만명.
대한민국의 전설적 풀백 이영표가 마지막 대회로 기록된 1999년 대회 멕시코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뤘다. 당시 대표팀 감독은 허정무였다.
5 기타
2년 간격으로 열리는 이 대회는 2001년 컨페더레션스 컵이 한국과 일본에서 열리면서 사실상 폐지되었다. 월드컵 이후에는 어영부영 사라졌는데, 국가대표가 아닌 클럽팀 대회 개념으로 피스컵이 대타로 출범하게 되었다.[7] 하지만 이 피스컵도 통일교 재단의 재정 악화로 취소되었고, 이제 코리아컵의 명맥을 잇는 대회는 없다.
- ↑ 특히 홀수해에 개최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월드컵 최종예선과 일정이 겹치게 되는데, 1997년에는 아예 최종예선이 홈&어웨이 방식으로 바뀌면서 아예 일정을 내는 게 불가능해졌다.
- ↑ 피파랭킹 정비와 함께 기린컵은 물론이고, 동아시안컵조차 대회명 기재없이 그저 친선경기로 기록된다. 랭킹 가산 포인트는 당연히 없다.
- ↑ 프랑스 월드컵을 몇 해 앞두고, AC밀란이나 유벤투스 같은 해외 유수팀이 한국에서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갖기도 했다.
- ↑ 현재와 달리 1984/88 올림픽의 축구는 23세 이하 규정이 없이 국가대표가 출장했다. (유럽/남미는 2진 선수로 제한) 단 본선 전까지의 88팀은 사실상 국가대표 2진. 해당 경기 출전 선수는 A팀이 오연교(GK), 정용환, 정종수, 유병옥, 김평석, 강신우, 조광래, 박창선, 최순호, 변병주, 이태호 (백종철), 88팀은 이문영(GK), 김판근, 강태식, 최윤겸, 남기영, 구상범, 정동복, 김삼수, 김주성, 조민국, 김종부였다.
- ↑ 88년 참가한 체코슬로바키아는 KFA의 경기 기록에는 대표팀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감독을 보면 선발팀으로 추정된다. 단 89년 참가팀은 엄연한 A대표팀.
- ↑ 이후의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동일.
- ↑ 물론 명확하게 코리아컵을 계승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동아시안컵을 보며 옛 다이너스티컵의 계승을 연상했지만, 동아시아축구연맹 측에선 다이너스티컵의 계승에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