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성(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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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때 사자머리 휘날리던 시절. 오오! 사자머리! 오오! 원조 야생마

이름김주성 (金鑄城 / Kim Joo-Sung)
생년월일1966년 1월 17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강원도 양양군
포지션윙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센터백, 스위퍼
신장175cm
유스팀조선대학교 (1983~1986)
소속팀대우 로얄즈(1987~1992)
VfL 보훔(1992~1994)
부산 대우 로얄즈(1994~1999)
국가대표76경기 14골
스태프부산 아이콘스(2000 / 코치)
부산 아이파크 영구결번
No.16 김주성
1987년 K리그 신인상
함현기(현대 호랑이)김주성(대우 로얄즈)황보관(유공 코끼리)
1997년 K리그 MVP
김현석(울산 현대 호랑이)김주성(부산 대우 로얄즈)고종수(수원 삼성 블루윙즈)
1989~1991년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
아흐메드 라드히(알 라시드)김주성(대우 로얄즈)미우라 카즈요시(베르디 가와사키)
198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최상국
FW
정해원
FW
김주성
MF
김삼수
MF
노수진
MF
이흥실
DF
구상범
DF
최기봉
DF
정용환
DF
박경훈
GK
김풍주
1991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이기근
FW
고정운
MF
김현석
MF
이영진
MF
김주성
MF
최강희
MF
이상윤
DF
정용환
DF
박현용
DF
테드
GK
김풍주
1996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라데
FW
세르게이
MF
신태용
MF
바데아
MF
홍명보
MF
하석주
MF
김현석
DF
윤성효
DF
김주성
DF
허기태
GK
김병지
199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마니치
FW
스카첸코
MF
김현석
MF
신진원
MF
김인완
MF
이진행
MF
정재권
DF
김주성
DF
마시엘
DF
안익수
GK
신범철
199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안정환
FW
샤샤
MF
서정원
MF
고종수
MF
데니스
MF
고정운
DF
강철
DF
김주성
DF
마시엘
DF
신홍기
GK
이운재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FW
황선홍
FW
최순호
MF
김주성
MF
신태용
MF
유상철
MF
서정원
DF
최강희
DF
김태영
DF
홍명보
DF
박경훈
GK
신의손

1 소개

중앙고등학교-조선대학교 출신. 삼손, 야생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키는 작았지만 폭발적인 스피드와 현란한 개인기가 돋보인 선수였으며 오른발잡이였지만 왼발을 능숙하게 쓸 수 있었다.

2 선수시절

선수시절엔 3회 연속으로 아시아 올해의 선수에 선정될 만큼 대단한 실력의 선수였다. 워낙 출중했기 때문에 서울지역의 유수의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으나, 다른 축구부 동료 4명을 같이 받아주는 조건으로 조선대학교를 선택한 의리파.[1]

부산 대우 로얄스의 레전드이자 K리그 최초로 구단 영구결번(16번)이 지정된 선수였다. 1986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별명이 아시아의 삼손. 야생마 다만 이런 별명은 주로 아시아팀과의 활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에는 태국인도네시아 같은, 한국에서는 C급으로 치는 팀과 한국 국대가 막상막하의 경기를 펼칠 정도로 한국축구의 실력이 안습이었으니.

사실 동남아시아 축구가 본격 막장화된건 2000년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이 시기의 차이는 좀 있지만 한때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이나 바레인같이 아시아 내 8강에는 들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봤자 전통 최강 자리는 이란,(아시아에서 쫒겨나기 이전의) 이스라엘과 한국이 경쟁했지만. 그 바로 밑에서 후세인 정권 하에서 막장되기 이전까지 이라크가 최강 다크호스로 평가[2]받고 있었고, 일본사우디아라비아가 80년대부터 치고 올라오기 이전[3]까지 그 밑 자리는 그야말로 동남아시아와 중동간의 카오스였다. 그게 90년대 후반부터 정치, 경제적 문제로 차차 중동이 앞서고 동남아는 서서히 몰락했다.[4][5]
그러나 많은 기대를 모았던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서, 망했어요. 이래서 국내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후 도하의 기적도 겪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도 출전했다. 개인적으로 86-90-94 세번째 월드컵 출전. 팬들은 전성기 머리를 휘날리며 필드를 달리던 '야생마' 김주성을 기대했지만 전성기 때 공격적인 롤이 아닌 수비적인 롤의 미드필더로 주로 뛰었다. 참고로 이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머리도 잘랐다. 이시기에 즉,1992년-1994년의 초반에는, 독일 VfL 보훔에서 뛰기도 했다. 차범근-허정무 이래로 거의 없었던 유럽진출이었으나, 위에서 보듯이 당시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수위권이었으나 세계 축구레벨에서는 한참 못미쳤었기 때문에, 김주성이 아무리 한국에서 난다고 해도 유럽에서는 .. 그래서 보훔에서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34경기 출전 4골)

이후 돌아와 다시 친정팀인 부산 아이파크(당시 대우 로얄즈)에서 뛰었다. 공격수였던 그가 복귀해서는 스위퍼로 뛰었는데 국가대표로 다시 뽑힐 정도로[6][7] 완벽하게 포지션 변화에 성공하며 역시 김주성이란 소리를 들었다. K리그 역사상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위치에서 베스트 일레븐을 수상한 선수는 그와 유상철 단 둘뿐이다. 다만 이건 97년까지의 이야기고 은퇴 직전인 98년부턴 그냥 짬밥 앞세워 위험한 파울을 쏟아내고 심판에게 항의 많이하는 선수였다. 골수 부산팬들이 성토하는 데니스 락티오노프의 목밟기 사건도 따지고보면 김주성의 '내가 선배인데 꼽냐? XX야'식 더티 플레이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후에 열린 중국과의 평가전(3:0 승)이다. 하지만 이 경기는 K리그 대표 선발과 C리그 대표 선발의 경기였기 때문에 정식 A매치는 아니고 기록에도 남지 않았다.

또한, 아시아 올해의 선수를 3연속 수상한 유일한 선수.(89' 90' 91' IFFHS 선정 ) [8]

선수로는 이회택-차범근-최순호를 잇는 한국축구의 에이스이자 전설적인 선수.

3 은퇴 이후

은퇴 후 2000년부산 아이콘스에서 유소년 코치를 맡았으나 단 1년 만에 그만두었으며, 그 이후로는 현장에 나서지 않고 있다. 2001년 초부터 MBC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해설가로서의 인지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MBC에서 해설을 하기 시작한 차범근에게 묻혔기 때문. 그래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경기를 중계했었고 차범근수원 삼성의 감독으로 부임한 200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메인 해설위원으로 활약했다. 단, 처음부터 해설 자체는 매우 좋았는데 스타 플레이어 출신답게 경기의 맥을 상당히 잘 짚었고 상황분석이 뛰어났다.[9] 해설위원 시절의 어록은 "A에 대한 B"라는 특유의 말버릇 정도.(이를테면 슈팅에 대한 세기, 패스에 대한 정확성, 수비수에 대한 몸싸움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연결사를 에 대한으로 대체하는 버릇이 있었다.)

2005년대한축구협회의 국제부장을 맡게 되면서 해설 활동은 2006 FIFA 월드컵 독일부터 중단된 상태.

2011년 3월에는 동아시아 축구 연맹(EAFF)의 사무총장으로 내정됐다.

2012 런던 올림픽 때에는 사무총장을 맡은 상태였는데 일본과의 준결승전 당시 발생한 독도 세리모니 문제 때 일본에 굴욕적인 사과 문서를 보낸 당사자로 지목 받았다. 국회에서 조중연 회장까지 책임이 올라가지 않기 위해서인지 먼저 보내고 후에 보고했다는 식으로 증언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 병크라 축협과 함께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독도 세레머니 사과 문제를 조금 설명하자면 물론 대한민국 정서상 사과문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건 맞다.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땅이고 그걸 수십년씩 망언과 도발을 해대는 일본에게 세레머니한 것을 사과했다는게 국민들이 분노할 만도 하다. 그러나 좀더 현실적인 안목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 국제 간의 문제가 어디 우리나라 하나의 정서만으로 해결될 일인가. 수많은 스포츠 협회를 보면 전혀 관련 없는 분들이, 대신 돈줄을 두둑한 양반들이 회장이나 부회장 혹은 다른 중임을 맡고 있는 것을 흔히 볼수있다. 이는 스포츠 자체가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금맥이므로, 그러한 재력가, 권력가들이 앞다투어 자리싸움을 하고 암흑속의 힘겨루기와 비리 등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더구나 그전에 IOC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김운용 위원장도 위원장 자리를 상실하여 IOC내에 파워게임에서 거의 힘이 없다시피한 한국이 눈치를 보며 다소 맥아리를 못추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더 보태자면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는 대한빙상협회가 오심으로 뺏긴 김연아의 금메달을 되찾으려는 의욕조차 없었던 것은, 물론 욕 먹어야 마땅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당시 아폴로 안톤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분노한 대한민국 선수단이 올림픽을 보이콧하려 한 것도 다 든든한 빽이 있어서 가능했던것.

4 여담


현역시절엔 긴 머리 때문에 아시아의 삼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행정가가 된 지금은 당연히 머리를 깎았다. 40대가 된지 오래여서 그런지 머리숱도 적어졌다.

세이부 컵 축구[10]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김주성은 사용을 허락하는 대가로 많지는 않지만 계약금을 받았다고 한다.

현역 시절 말년에 중앙수비수로 보직변경하고 나서 뛰던 시절에 이성남에게 축구화로 머리를 구타당한 적이 있다. 하필이면 그 머리를 밟는 장면이 KBS로 전국 중계가 되고 있었기에 데니스는 빼도박도 못하고 중징계 크리 당첨. 이성남 항목 참조.

90년대부터 축구를 봐왔던 사람들에겐 농구선수 김주성보다 이 항목의 김주성이 보다 친숙할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김주성 부장님은 지금까지 열성팬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안정환과 연관이 많은 선수이다. 안정환은 어릴 적 자신의 우상이자 롤모델이었던 선수로 김주성을 꼽았으며, 안정환이 프로 데뷔 초기에 머리를 길렀던 이유도 김주성을 닮고 싶었던 마음에 긴 머리 헤어스타일을 따라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안정환이 같은 대우에 입단을 해서 몇 시즌동안 같이 뛰게 되었고, 당시 신인 선수였던 안정환에게 팀의 레전드 선수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김주성은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을 듯.

그런데 안정환은 김주성이 자신의 롤모델이기도 하지만, 가장 무서웠던 선배로 꼽기도 했다. 안정환은 자신이 부산 대우의 에이스가 되었던 시절, 당시 여자친구[11]와 서울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멋대로 팀 훈련을 빠지고 다음날 복귀했는데, 이 일에 대해 선배들에게 호된 질책을 받을 때 누구보다도 김주성이 가장 크게 혼을 냈다고 한다.[12] 또한 안정환이 마리텔에 출연하여 했던 이야기에 따르면, 훈련 중 무심결에 뒤쪽으로 을 뱉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바람이 불어서 그 침이 옆에 있던 김주성의 얼굴에 맞는 바람에 그에게 죽빵을 맞은 적이 있다.[13] 게다가 김주성은 당시 후배들이 뭔가 잘못하면 상의 탈의를 하게 한 다음 벽에 팔을 벌린 채 붙어 있게 시킨 뒤 등에다 다트를 던져 꽂아넣는 똥군기를 과시했는데, 안정환 역시 본인도 많이 당했으며 아직도 등에 다트를 맞았던 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14][15] 지금 들으면 꽤 충격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시절은 선수들간의 똥군기가 일상화되어있던 시기였고, 서로 친분도 있기에 웃으면서 디스할 수 있었던 이야기.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자행되어서는 안 될 똥군기 행동이다.

또한 CF에 출연하여 '스피드가 기술입니다'라는 광고카피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1. 당시 조선대 학생들 사이에서 김주성은 교내에 있는 돌계단을 공을 차면서 하루에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하던 미친놈(…)으로 유명했다. 축구부 학생인건 알았지만 누군지는 몰랐던 무명시절의 이야기. 결국 김주성이 스타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야 학생들은 그제서야 그 때 그 학생인걸 알았다고.
  2. 이유는 도하의 기적 참고
  3. 일본은 1986년 월드컵 최종예선까지 진출한 이후 93년에 나타난 J리그의 개막과 함께 성장세를 갖추었고 이후 브라질에서 축구 유학하던 선수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실력을 뽐내었고 비슷한 시기 사우디도 성장세를 갖추었다가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사상 첫 16강에 진출하며 절정기를 구사하게 된다.
  4. 동남아 축구가 급 추락하게 된 요인들은 많이 있지만 대표적인 요인으로 거론하자면 바로 승부조작 사건들 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축구 팬들은 못믿겠지만 과거 대표팀은 말레이시아(당시엔 말련 이라고 불리웠음)등의 동남아 국가들에게 패할 정도로 무기력하였고 이러한 영향 탓에 대표팀은 동남아 국가들을 다크호스를 넘어 완전히 피하고 싶은 팀 이라는 인식으로 느낄 정도로 그들을 완전히 무서워 하였다. 또한 7~80년대에는 동남아 국가들이 아시아 무대를 제집 안방마냥 호령하는 시기여서 그 위상은 계속해서 이어가는듯 보였다. 하지만 80년대에 성장세를 보였던 동남아 국가들은 잇따른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려 성장세를 갖추지 못하였고 그에따른 정체성까지 흔들리며 동남아 축구 뿌리가 훼손되는 상황까지 처하게 되었다. 여기에 유럽 축구 중계에서 나타난 해외 축구 인기 열풍까지 오면서 동남아 축구는 현재까지도 회복 불가능 상황을 이어가며 망테크를 유지하고 있다.
  5.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외국 축구 문물을 받아들이며 자국 축구에 이식하듯이 나타나는 일부 동남아 국가들이 성장세를 갖추며 나타나고 있는 점이 위안거리라 할 수 있다. 베트남과 태국의 경우, 유럽 축구 유학이나 교육을 적극적으로 권장해 유소년 선수들을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그 결과, 자국 대표팀의 근간이 되는 역할까지 이어가며 성장세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유소년 선수들이 성인대표로 발돋움 하며 전성기를 누리는 시간이 10년 내지 15년 이상 되는 것을 감안 한다면 성장세는 더 나타날 가능성이 커서 안그래도 승점 자판기 신세를 못 떨친 동남아 국가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이 되어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경쟁력에서는 한 수 아래인 점은 아쉬운 대목 이라 할 수 있다.
  6. 다만 이시기에 이란에게 2:6 대패 참사를 겪었던 적도 있다. 심지어 이 경기는 미드필더로 뛰었는데, 그마저도 전반전만 뛰고 교체되었는데 2:1로 이기고 있었다. 김주성이 나간 후반전에 5골을 쳐먹은 것(...) 물론 김주성 한 명이 빠졌다고 저런 대패를 한 것은 아니지만 소위 식스투 참패에서 김주성의 지분이 큰 것은 분명히 아니다.
  7. 당시 소속팀인 포항에서 박성화 감독에 의해 중앙미드필더로 활약하던 홍명보와 대우에서 스위퍼로 포지션체인지에 성공한 김주성이 둘 다 아까웠던 박종환은 리그에서처럼 홍명보를 미드필더로 올리고 김주성을 스위퍼로 썼다. 하지만 예선에서의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고 결국 박종환은 이란과의 8강전에서 홍명보를 스위퍼로 김주성을 미드필더로 원상복귀 시켰다. 그리고 김주성의 어시스트로 신태용이 두번째 골을 넣는 등 전반에만 2:1로 앞서나가며 성공하는 듯 했지만 결국 결과는 6:2로 대패. 사실 팀전체의 컨디션이 하향세였고 공격의 핵인 황선홍마저 바로 전 경기인 쿠웨이트전에서 상대의 악랄한 반칙으로 인한 부상으로 결장해서 대책이 없긴 했다.
  8. 단, 이때 수상은 AFC 올해의 선수로 바뀌기 직전의 일이다.
  9. 일례로 2002 월드컵 16강전 일본-터키전에서는 터키의 결승골이 거의 전광석화급으로 터졌는데 이걸 정확하게 캐치해냈다.
  10. 8,90년대 동네마다 있던 오락실 대부분의 게임제목으로 김주성과 붉은악마라는 타이틀이 쓰였다. 나이지긋하신 형님,삼촌들에게 물어보라. 이 게임에서 김주성이 나온 것은 한국-일본 버전이고, 다른 국제 버전에서는 한국과 일본, 미국 대신 스페인프랑스, 네덜란드가 들어간다.
  11. 지금의 아내인 이혜원 씨.
  12. 다만 이러한 행동은 명백히 안정환의 잘못이었으므로 혼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아마 자신을 동경하여 긴 머리 헤어스타일까지 따라할 정도로 자신을 닮고 싶어했던 기특한 후배에게 더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13. 그러나 안정환은 김주성을 너무나 존경했기에 맞아도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고 오히려 영광스러웠다고(...) 밝혔다.
  14. 안정환의 말로는 크게 다치지 않도록 위에서 아래로 던지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던지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근데 그렇게 아래에서 위로 던져도 꽂힌다고는 했다.
  15. 여담으로 97년 도쿄대첩의 결승골 주인공으로 유명한 이민성도 당시 부산 대우 소속이었는데, 이민성은 숙소에서 안정환과 같은 방을 쓰던 당시 안정환이 잘 때 심하게 코를 곤다는 이유로 두들겨 패서 눈 근처에 멍이 들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