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게이트

(코리아 게이트에서 넘어옴)

<a href="/w/SBS">SBS</a>의 전 <a href="/w/주말 드라마">주말 특별기획 드라마</a>에 대해서는 코리아게이트(드라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Koreagate

박정희 정권 말엽과 지미 카터 행정부 때의 한미관계 악화에 일조한 사건.

1976년 재미 한국인 실업가인 박동선이 미국 의회에 로비를 했다는 사실이 워싱턴 포스트지를 통해 보도되어 이로 인해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일어난 사건. '박동선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이 사건 이전에도 중앙정보부가 미국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1975년 미 하원의회의 청문회에서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이재현이 "한국 중앙정보부가 단지 미국 내에서의 반한파에 대한 인권탄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내에서 반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 회유, 매수 공작을 벌인다"는 요지의 사실을 폭로한 것. 이를 계기로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은 한국의 불법적인 로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두 달 후인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는 무려 10면에 걸쳐서 "대통령의 지시로 박동선과 한국의 중앙정보부 등이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들에게 의회 내에 친한(親韓)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1970년대 들어 매년 50만 달러에서 1백만 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포함한 뇌물을 뿌렸다"고 보도했다. 게다가 미국 대선에서 '인권대통령'이자 독재자 킬러인 지미 카터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CIA, FBI, NSA와 미국 국무부, 미국 법무부 등이 총동원되어 한국의 비리를 수사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하원에서도 국제관계소위원회, 다른 말로 '프레이저 위원회'가 구성돼서 청문회를 열기 시작했다.

미 의회와 국무부는 당연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핵심인물인 로비스트 박동선의 송환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이에 미국이 식량차관을 삭감한다, 미군 철수시켜버린다 하면서 압박하자 1977년 말에 박동선이 미국으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미국의 송환에 응했다. 그리고 박동선은 미국 상하원 윤리위원회에서 32명의 의원에게 85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박동선은 검사가 제시하는 증거들을 모르쇠로 일관했고 미국 또한 동북아 외교에 중요한 한국과 완전히 척을 질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흐지부지하게 마무리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에게 3선 개헌 당시 토사구팽 당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 미 의회에서 박정희 유신정권을 고발하기에 이렀다.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토사구팽 당한 후 박정희에게 원망이 많은 상황이였는데 코리아게이트가 터지면서 한국의 불법적인 로비현황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정권의 반인권적인 행태들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1977년 6월 2일, 김형욱은 뉴욕타임즈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를 까기 시작 그 길로 청문회까지 나가서 자기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했던 걸 다 까발리기 시작했었다, 심지어 아예 회고록까지 써서 정리를 했는데 그 내용은 1963년 대선에 여론조작으로 야권단일화를 막았으며, 한일기본조약 당시에 반대하는 국민들 빨갱이로 몰아 사형시킬려 했다는 것, 그리고 대대적인 부정선거로 치러진 1967년 총선과 그를 무마하기 위해 죄없는 사람들 고문해서 간첩 사건들을 만들고, 3선 개헌을 하기 위해서 국회의원들 협박하고 매수했던 일들을 폭로했다.

당황한 박정희는[1] 몇번이나 사람을 보내서 김형욱의 폭로를 막아보다가, 1979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을 만나기 위해서 파리로 떠난 김형욱은 실종되어버렸다. 그리고 백악관 태스크포스팀은 이러한 김형욱의 폭로를 바탕으로 프레이저 보고서를 만들기에 이른다[2].

아무튼 이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이 드러나자 지미 카터는 끊임없이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 비판했고, 결정적으로 박정희가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드러나면서 한미관계는 대단히 나쁘게 된다. 이에 지미 카터는 이러한 경색된 한미관계를 해결해보겠다고 정상회담을 했으나, 박정희는 카터의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 45분동안 연설을 해버렸다. 이에 카터는 화가 날 대로 나버렸고, 당시 CIA 한국지부장 그레이그 보고서를 보면 "박정희가 계속해서 이런 정치를 한다면 살아서 정권을 이양하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말이 적혀있을 정도여서, 이러한 나쁜 한미관계는 훗날 10.26 사건 당시 김재규가 미국이 시켜서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음모론을 낳게 된다.

또한 박정희식 개발의 효과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2차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한국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 김형욱의 배신에 크게 분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 대략 수순이 코리아게이트, 미국 첩보원의 청와대 도청 발각, 김형욱의 미국 의회 출석, 박동선의 미국 의회 출석 순으로 이어진다. 김형욱의 미국 의회 출석 목적인 청와대 도청사건으로 인해서 약화된 미국 정부의 입지를 만회하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게 먹혀서 협상이 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