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김형욱(화제인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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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천 대만 징발해서 그놈들(대학생들) 싹 다 무인도에다 격리시켜 버리면 되잖아!"
- 6.3 항쟁[1]을 보고받고 -[2]
그래도 캄보디아처럼 전차로 100만명 쯤 밀어버리자고 주장한 차지철보단 낫다

1 개요

金炯旭 (1925년 1월 16일 ~ 1979년 10월 7일?)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체구가 커서 별명은 "나는 멧돼지"[3], "남산돈까스". 돈까스가 아니라 닭모이가 되었다고 한다.

제3공화국 시절 중앙정보부장을 맡은 인물. 역대 부장/원장들 중 가장 오래 재임한 중앙정보부장이기도 하다. 자그마치 6년 8개월.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공작을 벌였지만, 후에 박정희에게 버림받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된다. 이후 미국에서 박정희를 디스하는 회고록을 집필하고, 미 의회 청문회에 나가서 박정희에 불리한 증언을 하는 등 반정부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에 갔다가 실종되었다. 생사불명으로 처리되었다가 1991년 법원의 실종선고를 받아 법적으로 사망처리 되었다.[김형욱 미스터리, 누구 말이 맞나]


2 생애

2.1 5.16 군사정변 이전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이었으나, 해방 이후 혼란기에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사실 이 기수는 한국전쟁 당시 초급장교였기 때문에[4], 많은 수가 전사했지만 김형욱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뚜렷한 전공보다는 1951년 이후 동부전선(강원도)에서 활약했다는게 주목할 정도. 이러한 경험 때문에 회고록에서도 늘 자신은 박정희보다 진짜 애국자를 강조했다.


2.2 5.16 군사정변과 군정 시절

5.16 군사정변 당시엔 중령으로 쿠데타에 참가하였으며, 36세의 나이로 국가재건회의 최고위원이 된다.


2.3 중앙정보부

1963년 김종필, 김재춘에 뒤이어 제4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생긴지 얼마 안되어 조직이 덜 갖춰졌고, 김종필이나 김용순, 김재춘은 재임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조직에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사실상 후임자 이후락과 함께 국내 정치 개입을 비롯한 여러가지 악습을 중앙정보부(이후 국가안전기획부까지)에 심은 사람이다.

김형욱은 박정희의 베리야 격으로 온갖 정치공작을 맡아하였고,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원성을 사게 되었다. 사실 미움을 받아서 버림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베리야보다는 예조프가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의 재임시에 선거 때만 되면 간첩 사건이나 용공분자 사건이 빠짐없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가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그리고 국제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동백림 사건[이 있다].[5] 1969년에는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여당 국회의원 김용태 등을 중앙정보부에서 체포하여 고문, 회유하여 3선 개헌에도 일조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도 일으켰다. 또한 3선 개헌에 찬성하되 선행 조건으로 자신과 이후락의 경질을 요구한 이만섭도 테러하려 하였다.

이 사람이 소위 중앙정보부의 폭력적 성향을 확실히 만든 인물이라 한다. 나중에 박정희가 김계원으로 중앙정보부장을 갈면서 "김형욱이처럼 팰 필요는 없다"(…)고 할 정도로 그는 폭력정치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충성을 바쳤으나, 1969년 3선 개헌이 성공하자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버림을 받게 되었다. 박정희는 스탈린 못지 않게 자신의 부하의 권력이 필요 이상으로 커진다 싶으면 가차없이 쳐버렸으며, 이는 김형욱도 예외가 아니었다. 박정희의 이 원칙은 자신의 인척(조카사위)이자 제1책사였던 김종필에게도 예외없이 해당하였다.

김형욱은 이후락이나 그밖의 다른 5.16 주체와 마찬가지로 부정축재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는데, 버림받고 망명 생활을 할때 큰 도움이 되었다.


2.4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이후 김형욱은 쥐약 격인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거치기도 했으나, 10월 유신으로 국회의원직을 잃어버렸다.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그는 이미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난지 오래였고, 중앙정보부 시절 원한을 품은 이들에게 보복을 당할까봐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실제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 시절 야당 의원들 뿐만 아니라 공화당 의원들도 감시하고 고문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공화당 의원들도 김형욱을 기피하고 멀리했다고 한다.

공화당 실세인 김성곤[6], 길재호 의원 등 그에게 원한을 품은 인물이 한둘이 아닌데 실각하자 권력에 대한 금단현상이나 배신감은 둘째치고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거의 반쯤 미쳤다 한다. 당시 일기장에 "대통령이 난데없이 날더러 쉬라고 했다. 지난 6년간 악역을 다 도맡아 했는데 미칠 것만 같다."라고 쓰여있다. 거기에 박정희에 대한 배신감까지 겹쳐 해외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2.5 망명 이후

1973년 먼저 중화민국으로 출국했고, 거기에서 귀국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갔다.

1977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미국의 재미언론인 줄리 문(문명자)와 손잡고[7]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8]에 나가 박정희의 유신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고, 당시 유학생이었던 김경재[9]와 함께 "김형욱 회고록"(부제: 혁명과 우상)을 펴낸다. 이 김형욱 회고록의 존재를 알게 된 박정희는 회고록의 원고를 넘기는 조건으로 김형욱과 흥정을 벌이기도 했다. 원고는 김경재가 가지고 있었으나, 일부는 김형욱에 의해 일본으로 빼돌려졌고, 이는 일본에서 축약 평론판이 80년대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금서크리. 물론 지금은 정식으로 출판됐으니 맘놓고 봐도 된다.

그동한 여러 인사들에 의해 귀국종용을 받은 김형욱은 79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10]을 만나 회고록 원고료로 거액을 준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속아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파리에 도착한 뒤 그 곳에서 증발하였다. 여러 설이 있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확증된 바 없다.


3 최후에 관한 여러 설

1979년 이미 납치되어 곧바로 죽었다는 게 사실상의 결론이나, 누가 그리고 어떻게 죽었냐를 놓고 많은 설이 나왔다.

  • 1980년대에는 대한항공 특별기(화물기)편으로 청와대 지하실로 실려와 박정희가 직접 M1 카빈을 머리에 대고 쏴 처형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11]
  • 납치후 한국에 끌고 와서 기절시킨 후 폐차장 폐차기에 산 채로 넣어서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앞서 말한 문명자가 세 다리 건너 들었다는 이야기로서, 역시 신빙성은 없다. 메인 소스는 중앙정보부 요원이고, 이걸 정일권 국회의장이 들었으며, 문명자가 정일권에게 들었다. 폐차기에 넣었다는 이야기는 이병주의 르포에 나오기도 한다. 여기서는 파리에서 깡패들을 시킨 거라지만.
  • 김형욱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납치, 스위스에서 살해하였고, 그 시체를 한국으로 공수했다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들과는 다르게 이 설은 프랑스의 르몽드와 일본의 문예춘추에서만 보도가 된 외국발 설이다.
  • 카지노 마피아들에게 살해되었을 것 이라는 주장도 있다.[12]
  • 2005년 자신이 김형욱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이 모씨가 있었다.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1979년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 당일 김형욱을 마취시킨 뒤[13] 반쯤 의식불명이 된 김형욱을 산 채로 머리부터 양계장 대형 믹서(해머밀)에 넣어 갈아 죽였다고 한다. 즉, 시신은 모이가 된 것. 이 내용은 김경재가 쓴 혁명과 우상에도 나온다. 단, 여기서는 마취시킨게 아니라 목을 부러뜨리고 넣었다고 적혀있다. 어찌됐든 잔혹하게 죽은건 마찬가지지만. 온라인의 군사/정치 커뮤니티에서는 이 설에 수긍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3.1 공식적인 조사결과

2005년 5월 26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지시로 권총으로 암살 당했다는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이상열 주 프랑스 공사는 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을 겸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현지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던 A요원, B요원이 담당했다. 이들은 동유럽 출신 협력자 2명을 10만 달러에 고용했다. 김형욱 전 부장은 이상열 공사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공사는 전주를 소개시켜주겠다며 10월 7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A요원과 협력자 2명이 나타나 이 공사의 승용차를 이용해 김형욱을 납치해서 파리 근교로 끌고 갔다. 협력자가 소련제 소음권총 7발을 발사해 살해했다.

이 공사는 A요원에게 관저에서 결과를 보고받고, 김형욱 부장의 여권과 지갑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소지품을 철저히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다. A요원은 귀국 후 10월 13일 김재규 부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A요원과 B요원의 진술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사용한 총기는 분실했다고 주장하며,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두었다고 하는데 시신 처리방법이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이들의 입을 열 방법은 사실상 없다.

여담이지만 이 때 김재규가 김형욱의 이런 처참한 말로를 보고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이 없어진 것이 10.26 사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 이후락은 끝까지 잘 살아남아 천수를 누렸다. 물론 이후락은 거세된 후 아예 정치권과 인연을 끊고 거의 야인으로 초야에 묻혀지냈기 떄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4 기타

실제 인물은 사망이 아닌 실종이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 의한 정권모독죄[14]에 의해 궐석재판으로 영혼이 징역을 살았다.

10.26 이전에 잠시 월북설이 돌기도 했다. 80년대는 생존설로서 남미에 숨어산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나치냐? 하지만 결국 2002년 미국 뉴저지의 한 공동묘지에 가족에 의해 가묘가 세워졌다,

그에게는 아들인 김정한이 있었는데, 그는 10대 초반에 아버지인 김형욱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6.25 전쟁 당시에 숲속에 뿌려졌던 발목지뢰를 밟는 바람에 한 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는 한동안 치료를 위해 미국에 머물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게 되었고, 김형욱은 평생토록 이 일을 후회했다고 한다. 김정한은 아버지가 실종된지 약 20여년 후인 2002년에 지병인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의 가묘가 있는 공동묘지에 함께 묻혔다.

1995년 신상옥 감독은 그의 출세와 몰락을 <증발>이라는 영화로 만들었고 에 출품했다. 이 영화 때문에 오랫동안 국내에 못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있다.[15][16]

당연히(...)북한에서도 영화에 나오는데 민족과 운명 3편 홍영자편에서 박정희의 애첩이자 중정의 1급 요원 홍영자의 유일한 사랑으로 나온다. 미화쩌네요 홧김에 미국 망명을 했으나 미국에 망명중인 차홍기의 설득으로 반박정희 운동에 뛰어든다는 것. 홍영자의 활약으로 서울로 이송해서 박정희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충격으로 회의를 느낀 홍영자는 북한으로 망명한다는 스토리

드라마 끝없는 사랑에서는 미국으로 망명한 전 정보부장이라는 빅베어가 등장하는데 김형욱을 모티브로 한것으로 보인다. 다만 드라마상의 배경은 박정희 치하가 아닌 전두환 치하이지만.

김종필의 증언에 의하면 인간성에 문제가 있어서 육영수도 그것을 박정희에게 지적했다고 한다.

박순찬화백의 2016년 6월 3일자 경향신문 장도리 만평에서 박대통령 프랑스순방에 관한 만평 마지막 컷에 이분 실종사건도 언급한다. [#링크]


5 연기한 배우들

  1. 1964년 6월 한일협정에 반대해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 결국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서 진압했다.
  2. 출처는 남산의 부장들 다큐.
  3. flying이란 뜻의 "나는"이다. 흔히들 아는 표현으로 표현하자면 "날으는 멧돼지".
  4. 김형욱은 회고록에서"총알받이 소위"라고 표현했다.
  5. 베를린 사건을 한자로 적은 것. 천상병, 윤이상 등의 예술계 인사들이 꽤나 연루되어서 곤욕을 치렀다. 당시 독일(서독)쪽에서도 말이 많았던 듯.
  6. 박정희 퇴임를 거론하며 김종필을 밀어주다가 그의 심벌이던 콧수염이 뽑히는 등 참혹한 고문을 당했고 이들이 어찌나 심하게 고문당했는지 야당인 신민당에서 이들 네 사람은 정권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며 문제를 제기할 정도였다. 당시 향간에는 이들이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실신하여 생으로 변을 지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정황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이 사람 쌍용그룹 창업주이자 회장이었다. 그런 사람마저 고문당한 것.
  7. 나중에는 갈라섰다.
  8. 프레이저 하원의원이 주도했기에 프레이저 청문회
  9. 박사월이라는 필명을 썼으며, 후에 귀국하여 새정치국민회의(15대)와 새천년민주당(16대)에서 각각 국회의원을 역임한다. 웃긴건 18대 대선때 박근혜지지를 선언하면서 한화갑, 한광옥과 함께 새누리당에 입당한다.
  10. 훗날 중앙정보부장 직무대행을 역임.
  11. 신상옥 감독의 영화 <증발>은 이 설을 따랐다.
  12. 김진명의 소설 한반도에서는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13. 목을 꺾고 마취제를 입에 집어넣었다고 주장했다.
  14. 사실상 김형욱 때문에 만든 법으로, 이후 적용된 바 없이 10.26 사건 이후에 폐지되었다.
  15. 조지 타케이가 맡은 박정희(극중 이름은 한성태)는 색마 그 자체이고 일본에 몰래 요원을 보내서 야당 인사를 바다에 처넣는 일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다. 한국어를 못하는 조지 타케이의 목소리는 이강식이 맡았다. 이 영화에서 조지 타케이는 쿠데타 부분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지만 국정과 밤일에 전념하는(..) 부분에서는 맨얼굴이 그대로 나온다. 사실 영화가 워낙 마이너한지라 해외에서도 그가 여기 나왔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16. 신상옥 감독은 김형욱과 친분이 있었으며 홍콩에서 납북되기 며칠 전에 미국에 있었을때 이 때 김형욱의 집에서 김형욱과 같이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의 원고를 보여주며 거액의 인세를 받게 되었다고 자랑했었다고 한다.
  17. 23화를 보면, 작중, 국회의원을 암살 지시를 내릴때, 감칠맛 나는 욕설과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