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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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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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 이후 현장검증을 하는 모습.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군인·정치가이다. 본관은 김녕 김씨. 경상북도 구미시 출신[1].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재임했으며, 10.26 사건 당시 박정희를 암살하고,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로 사형을 언도받아 교수되었다. 김재규의 육성이나 말투를 들어보고 싶으면 [본 육성녹음을 참고]. 이것은 1979년 12월 8일의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 녹음 중 하나이다.

2 생애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2]를 졸업한 후, 그 해,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3]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4] 1945년 일본 해군 예과 연습생[5]에 선발되어 해군 항공소위 임관을 준비하던 중, 광복으로 인해 임관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다. 그러나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1952년에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과는 악연이 좀 있었다. 윤필용이 1.21사태김신조의 모가지 발언을 여과없이 보내는 바람에 윤필용이 방첩부대(현 국군기무사령부)장에서 경질되고 김재규가 후임 방첩부대장이 되었다. 이후 김재규는 방첩부대를 육군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자신은 육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육군보안사령관이던 1971년 8월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의 전화를 도청하다가 발각되어 제3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군단장 시절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했으며, 이 때문에 한계령에 건설 중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현재 위령비에는 그 부분이 삭제당했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안동댐 건축 기념탑에도 원래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10.26 사건 직후 그 이름 부분이 뜯겨나가 있다. 여담이지만 인트라넷 3군단 역대 군단장과 그가 복무했던 모든 부대에도 김재규 장군은 삭제되어 있다. 한편 이 때 그의 전속부관이었던 박흥주 포병대령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재규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고, 10.26 사건 당시에도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자리에 있었고, 결국 박정희 암살에도 가담한다. 정말로 장래가 촉망받는 엘리트 장교였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우려해서 정말 유능하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육군 장군은 사단장, 군단장 수준에서 전역시키고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에는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만 앉혔다고 한다.[6] 김재규도 이런 케이스로, 월남전의 영웅인 채명신 장군 또한 대장을 못 달고 중장에서 전역해야 했다. 이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12월에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로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다가 5.16 쿠데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감금 당했다가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났다. 김재규는 군인은 정치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종찬 장군 계열이었다.

▲ 육군중장 김재규

1973년 초 3군단장으로 전역 후 박정희의 강권에 의해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다. 이 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육군 법무소령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외의외 사실인데 박정희에게 1977년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고,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박정희는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서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주기도 했다. 당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정국을 순리대로 풀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한 것. (물론 결과적으로는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박정희에게는 소귀의 경읽기였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를 살해하였고, 재판에서 내란목적 살인,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형 집행 장면] 자세한 사항은 10.26 사건 항목 참조.


3 10.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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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5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2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3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4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5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5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그러나...

당시 최후진술의 녹음본이 있다. 들어보자. 무려 40년 가까이 된 녹음본임에도 의외로 들을 만 하다.[유튜브]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인맥의 영향력이 더 컸다. 박정희와 고향 후배이며 육사 동기라는 2중의 인맥인 김재규는 그야말로 심복이었다. 하지만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차지철발터 PPK 권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했다. 이것이 이른바 10.26 사건이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장에 동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할 줄 생각 못한 경호팀은 무력했고 그들 모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경호실 요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 당시 경호계장이던 박상범이고, 그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에서, 민간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게 된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다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했으나 박상범은 기적적으로 총알이 치명적 부위를 피해간 데다 부상입고 쓰러지면서 머리를 찧어 기절해 죽은 것처럼 보였고, 식사하던 경호원들을 중정 요원들이 습격하는 과정에서 경호원들과 같이 식사하던 중정 직원들[7]인 운전수와 요리사가 자신들의 총에 다치는 바람에 확인사살에 소극적이어서 죽음을 면했다.

어쨌든 거사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김재규가 이동한 곳은, 엉뚱하게도 중정이 아닌 육군본부였다. 만약 김재규가 거사 후 중앙정보부로 향했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도 중론이다. 암살장소인 안가는 중앙정보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부장인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박정희를 죽인 사실을 은폐하고 불순세력의 소행으로 몰아가 국무위원과 장성들을 깨끗하게 속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사태 수습을 빌미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시나리오를 써갈 수도 있었다.

특히 박정희를 암살한 장본인이 차지철이었다고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평소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미명으로 온갖 월권행위와 경거망동을 서슴치 않았고, 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주동자 1순위는 단연 차지철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실제로 사건이 터진 후 청와대로 들어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들은 김치열 당시 법무장관은 "그 새끼가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하고 호통을 쳤는데, 그 새끼는 물론 차지철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체포되면서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김재규가 육군본부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 ① 대통령의 그늘 밑에서만 권력을 휘두를 뿐 대통령 사망 후에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비상계엄 상황에서 특권을 휘두르는 군부의 협조가 절실하므로 이를 얻기 위해 육군본부로 갔을 거라는 설.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재규와 원만한 관계였으므로, 그에게 자신의 박정희 저격을 알리고도 그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 오판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박정희 암살자에게 협조하여 그의 정권 획득을 도울 장성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당시 군에 자기 인맥이라고 볼 수 있는 장군을 거의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 ② 김재규가 박정희를 순전히 우발적으로 저격했으므로 거사 후 사태장악에 대한 아무 계획이 없었다는 설. 사건 수사결과에 의하면 거사 후 김재규는 정승화와 승용차에 동행하여 사건현장을 떠나 이동하던 중,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정보부와 육본 중 어디로 가는게 좋겠느냐고 묻자 정승화가 말을 가로채어 육군본부로 가는게 좋겠다고 제의하였고, 김재규는 아무 생각 없이 운전기사에게 육군본부 행을 지시했다. 이 때 정승화는 안가 본관(연회장은 나동)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사건을 저지른 김재규와 차에 동승한 것이었는데 그땐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가 육본으로 갈 때 신발도 신지 못하고 박흥주 대령의 구두를 빌려 신을 정도로 우왕좌왕했던 행동을 볼 때 이 견해도 설득력은 있다.
  • 이 추측들에 대해서는 10.26 사건에 보다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알려진 바와 같이 12.12 군사반란 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긴급체포하여 군을 장악하게 되었고,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으며 기각 4일 만인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대법관들 사이에서는 소수의견으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내란목적이 아니라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단순살인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내란 목적이라기에는 암살후 김재규의 움직임이 너무나 어설펐기 때문에 내란을 목적하고 박정희를 죽인게 아니고 그저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본 것. 이러한 해석을 막기 위해 신군부 측에서 대법원을 강하게 압박했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17일 쿠데타 당시 전차가 대법원 주차장에까지 밀고 들어갔으며 대법관 1명을 하룻밤 동안 모셔(?)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탄압을 받았다는 견해가 있다. 결과적으로 판결문이 비공개 처리되어 묻혀버렸다.[8] 이러한 주장은 훗날 판결문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한홍구,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참조].

10.26과 관련한 김재규의 보다 자세한 입장표명은 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에 되어있다.

3.1 민주화 운동층

민주화 운동 층에서는 평이 서로 상반되게 갈라지는 편이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유신독재라는 암흑기 속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용어로 요즘 인터넷에 빈번히 보이는 단어가 김재규 열사.[9] 이렇게 영웅으로 치켜 세우진 않더라도 10.26 사건이 독재를 몰아내는데 일정부분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경우도 많다. 유야무야 하면서 유신이 장기화 되었다면 최악의 경우 북한처럼 반대세력이 모두 숙청되거나 정도는 덜해도 독재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김재규를 긍정하는 사람들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신옥, 장호권, 이해학 등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주로 교계 사람들로, 민주혁신계 중에서도 약간 보수적인 사람들 쪽이다. [함세웅 신부는 김재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효림 스님은 "여러가지 정황 근거로 봤을때 재평가할 가치는 충분하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더 시일을 요구할 뿐 명예 회복은 희망적"이라고 보고 김재규의 행적과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반면 상대적으로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또한 과거 유신정권하에서 한자리를 해먹던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박정희를 암살해 결과적으로는 박정희를 국민의 손으로 정당하게 심판할 기회를 빼앗았음을 지적한다.[10] 실제로 그동안 갖은 압제와 고문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노력해오던 자신들보다, 단순히 박정희 한 명 암살했다고 김재규가 포커스를 더 받는건 몇십 년을 민주화 투쟁한 사람들 입장에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이럴줄 알았으면 데모하지 말고 저격수 연습이나 할걸[11] 다른 한편으로는 김재규를 비판하는 재야/민주운동가들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동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한 기여도 및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시도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12] 진보적 사회운동가 백기완도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출처]

3.2 그게 최선이었을까?

3.2.1 부정론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결국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벌인것 이라는 해석이 있다. 2004년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김재규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출처]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에 대해서 격분했다는 증언이 주변 인물들로부터 흘러나온 바 있다.[13] [출처]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김재규가 민주화 운운하는 것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차지철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비해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온건성향으로 비쳐질 따름이지, 그 이전까지 과연 민주주의와 민주세력과 친화적인 행보를 보인 적도 없으며, 그 역시도 결국 독재정권에 부역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출처]

유신정권의 크게 3개의 권력 축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국군보안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차지철, 김재규,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치열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출처]바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파장이 일어난 것이 10.26이라는 것. [출처]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 등 공화국시리즈 등에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시절에도 이들은 사이가 몹시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는 주장이 있다.[출처]

다른 한편으로 그가 쿠데타 당시 보여주었던 일련의 치밀하지 못했던 행동 역시도 결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당시 김재규는 차지철과 박정희를 암살한 후, 자신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이동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수 시간만에 체포되었다. 이는 김재규가 단순히 차지철, 혹은 박정희를 암살한다는 계획만 세웠을 뿐, 그 후 신정부 수립이나 정국 주도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계획이나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준다.

국가원수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서 급진적 권력 교체를 시도한다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치밀한 계획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10.26이 역사에 긍정적 영향을 주려고 한 계획이었다면, 단순히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박정희를 암살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이와 관계된 사람들과 철저하게 입을 맞추었어야 했다. 그리고 난 이후 정권교체 및 민주화까지 질서있고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으로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저지르는 입장에서 그는 너무나도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다 보니 10.26으로 박정희의 장기 철권 통치는 끝났을지 몰라도, 이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질서가 안정적, 민주적으로 등장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전두환의 신군부 등장과 12.12, 5.18, 그리고 8년 동안의 또 다른 군부 독재였다. 만약 김재규가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동조자를 늘리는 동시에[14] 신정부 수립에서 정권 이양까지의 과정을 안정적으로, 질서 있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면, 신군부의 폭주를 막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단하게 거사 직후 육군본부로 가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신군부의 폭주를 간단히 막을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 쟁취한 권력획득 과정 속에서 김재규 역시도 흑화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김재규 역시도 10.26사태 직후 전국으로 비상계엄령확대를 서둘렀다는 것이다.[출처1], [출처2] 1980년 초 서울의 봄 당시 민주세력들이 "계엄령 해제"를 강력히 요구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김재규가 서둘렀던 계엄령 또한 마찬가지로 저항에 직면했을 공산이 크다. 1980년 신군부가 추진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5.18 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던 것처럼, 전국으로의 계엄령 확대는 도리어 전국적인 거센 저항과 항쟁에 부딪쳤을 공산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15] 더욱이 민주공화당 조차도 이러한 주장에 동의했을지 의문으로 남는다. 10.26 직후 김종필민주공화당의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되었는데, JP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과 협박까지 당한터라 김재규에게 호의적이기도 어려웠다. [#] 거기다 10.26 이후 JPYS, DJ과 함께 개헌과 민주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 역시도 김재규의 구상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1], [#2]

또한 체포되기 전까지 김재규는 박정희 암살 사실을 숨기려고 했고, 과연 이런 방식의 권력장악이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을지 또한 의문이다. 어쨋거나 박정희 사망 이후 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동정과 추모 분위기 등을 감안해본다면 김재규가 암살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지 않는 한 저항에 직면했을 공산이 크다.

또 김재규는 10.26이후 전국비상계엄령 확대 조치를 취하고, 군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유신의 잔재를 제거하겠다는 방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출처1], [출처2] 대법원 판결에서는 김재규가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제압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장악한 이후 대통령 출마까지 계획했다고 판결하였는데, 김재규 본인은 대통령 출마 의사는 없었다고 부인하였다.[16] 하지만 상술하였다시피 이러한 김재규의 계획들은 유신 정권의 일원들은 물론 신민당과 민주화 세력들 또한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했을지도 의문이다. 김영삼이나 김대중 등 야당이 과연 김재규의 계획대로 고분고분 따라주었을지는 대단히 의문점이 크다. 당시 민주계 인사들이나 야당 인사들 역시도 김재규를 비호하거나 두둔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3.2.2 긍정론

김재규는 정권 내에서 온건파였고, 당시 부마항쟁이 격화되고 있는 와중이였는데 박정희차지철의 주장에 동조하여 점점 강경진압으로 기울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박정희가 먼저 이승만과 곽영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지시했고 차지철의 캄보디아 발언은 박정희의 총기발언에 덧붙인 아부성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대통령이 직접 유혈진압을 지시한 이상, 김재규가 10.26 사건으로 박정희를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부마항쟁때 5.18 민주화운동처럼 사격명령이 동반된 학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 실제로 항쟁 당시 부산과 마산 내의 시민들이 대거 경찰서로 끌려가거나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또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 외에도 김대중, 이철승 등 호남인사가 신민당에 있었고 여촌야도 현상이 강하여 수도권 민심이 야당에 있었으므로 단순히 부마에만 그치지 않고 호남, 수도권까지 퍼져 전국적으로 경찰, 군인들과 시민들의 대규모 충돌이 생겨 엄청난 희생자가 났을 것이다.

또한 당시 한국과 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박정희가 미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경진압을 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서울에도 계엄을 내리고 군을 투입할 계획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유혈사태로 번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김재규 역시 박정희 사망 이후 비상계엄령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5개월 한정이라는 전재를 달았으며 부마사태때도 유혈 진압을 비판했던 입장이기 때문에 강경한 방식으로 막가파 운영을 했을거라는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군부의 시각을 돌리기 위해 그럴싸한 핑계를 대려고 했다가 뽀록이 났다는 견해다.

유신정부가 1980년대를 넘겨서 계속 통치하였을 경우 그 후에 오는 것이 바로 3저 호황이다. 만약 10.26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유신정부는 3저 호황을 활용해 경제 위기를 극복해낸 뒤 싱가폴처럼 장기집권을 기정사실로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하지만 김재규가 대통령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의 결과는 신군부가 무력을 통해서 집권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차지철과의 갈등 이전에도 유신의 방향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자주 내비쳤고, 장준하 등의 민주화 운동 인물들을 비밀리에 도우면서 관련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도 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박정희를 '환자'로 비유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이며 사형 선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자세를 보았을때 단순히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인한 우발적인 권력 싸움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결정적으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결단했던건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책 방향이었는데,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압적인 진압을 요구했으나 김재규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결국 이것이 10.26이라는 도화선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이밖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의 구속을 반대하는 동시에 김대중의 가택 연금을 일시적으로 해제시키고 김영삼과 만나게 승인했으며, 차지철과의 갈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승진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다가 발생한 갈등이 아니라 국정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조갑제조차도 김재규가 사욕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칼럼을 개시했을 정도였다.

1970, 80년대에도 국정 방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박정희에게 실망했다는 의사를 자주 표명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으며, 7대 대선에서 마지막만 하고 다시는 안하시겠다는 약조를 김재규가 청원했다는 증언과 더불어 한때 진지하게 하야를 권고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결국 10.26은 박정희에게 오랫동안 직언을 통해 온건한 설득을 하려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지철을 중용하며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동안 쌓였던 실망감과 울분이 폭발하여 강경한 수를 두었다는 주장이다.

[윗 내용들이 복합적으로 담긴 관련 출처]

그동안 김재규를 썩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한홍구도 2013년에는 주장이 달라졌다. [#]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두 개의 10·26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덧붙여 한홍구는 "김재규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야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4 성격 및 여담

박흥주 전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의 말에 따르면 김재규의 인간성은 좋았다고 전해진다. 중앙정보부장에 부임하고 난 뒤 남산의 고문실을 없애고 강압수사 금지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비대해진 기구를 축소하거나 해외정보업무 중심으로 중정을 개편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장 판공비 8억 원을 내놓아 직원들의 퇴직기금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그를 부마항쟁에서 만났던 이는, 최루가스에 고통스러워하는 어린아이를 그가 구하려고 애썼다고도 말한다. [#] 장준하 의문사 이후 그의 식솔들에게 조그만 전세를 얻을 수 있도록 손써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평상시에는 온화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따뜻한 성격이었으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는 욱하는 성격이 발동해서 바로 반격을 가했기 때문에 지위를 막론하고 말릴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김재규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할 때 중앙정보부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놓았다. 의전과장 예비역 해군 보병대령[17] 박선호는 그가 대륜중학교 체육교사로 잠시 재직할 때 가르친 제자이며,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박흥주는 사단장 시절 그의 전속부관이었다.

김재규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최초로 명예면관[18]을 당한 장교이기도 하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6월, 군경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자기 부하를 강제로 연행하려는 미 육군 장교와 대립각을 세우며 칼로 위협하다 면관을 당한 적이 있다. 이후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내려와 대륜중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쳤는데 이 때의 제자 중 유명한 사람들이 꽤 있다. 위에서 말한 박선호와 전 국회의장 이만섭 등이 그 예다. 그러나 면관 1년 4개월만에 군에 복귀하였다. 건국 초기 군과 경찰은 서로 총질까지 하는 등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아서 취직을 포함해 아무 것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드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면서, 이런 방식으로 생긴 '자생적 빨갱이'가 북한에서 넘어오는 '진짜 빨갱이'보다 무서운 존재라며 박정희에게 정책의 시정을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평소에 유능한 인재들이 빨갱이란 이유로 탄압받는 일에 안타까워 하며, 인재들이 잘못된 이념에 빠지도록 몰아가는 사회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

이 사람이 세운 학교도 있다. 지금은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중경고등학교가 그 학교로, 원래는 서빙고동 지금의 한강중학교 위치가 학교 위치였다. 중경고등학교는 설립 당시에는 군 간부 자녀 전용학교였던 걸로 유명했는데 최초의 특수목적고등학교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 덕분에 박정희 정권 당시 후덜덜한 빽을 지닌 자녀들의 총집합소(?) 비슷한 곳이 되었던 과거가 있다. 그 시절에 학교 스쿨버스가 청계고가차도[19] 위를 휙휙 날아다녔다는 도시전설이 있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비슷한 스타일의 교복폭풍간지였다고. 그런데 10.26 사건 후 학교 부지가 몰수크리. 마침 중경고 근방에는 오산고등학교가 있었고, 한강중 근처에는 용강중학교[20]이 있었기 때문에 두 학교 위치를 바꿔버린 것.[21] 그 와중에 교훈이며 교표며 싸그리 갈렸다가 1999년에 와서야 교훈은 원래대로 환원됐다.

['사나이 결심']이라는 노래를 무척 좋아해서 애창곡으로 삼았다고 한다.

[국가정보원 홈페이지]에서는 그래도 역대 원장들 중 한 명으로 기록해주고 있다. 하지만 육군에선 대우가 전혀 다른데, 이 사람이 사단장을 지냈던 6사단의 역대 사단장, 연대장으로 지냈던 5사단 독수리연대 역대 연대장 목록에는 삭제당한 상태이다(...).

어른들과 술자리를 할 때, 제 때 술을 따르지 않으면 간혹 "박정희가 왜 죽었는지 아냐? 차지철만 술 따라주고 김재규는 술 안 따라 줘서 죽은 거다!"라고 고인드립 농담을 하기도 한다. 위의 분노설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뼈있는 농담이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원로이자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대표인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2012년 8월 인터뷰에서 "33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민과 역사가 김재규 부장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기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목록에 자신의 조상인 김문기의 이름을 넣도록 하기 위해 학계에 압력을 가한 적이 있다. 사육신 항목 참고. 사육신만 알고 삼중신을 몰라서 벌인 촌극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인드립용으로 인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칸코레 갤러리로 인해 모에선을 [맞기도 했다.]

어느 주갤러가 김재규 묘에 성묘를 간 것을 인증하기도 했다. [성묘 인증] 무려 2,000개가 넘는 추천수를 받았다. 2013년 초부터 야갤에서 김재규를 언급하면서 이미 디시에서는 재평가의 기운이 일고 있었기에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1950년대 말 대령 시절에 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에게 브리핑을 하다가 실수를 하여 송요찬 장군이 그를 크게 질책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욱한 김재규 대령이 욕을 퍼부으면서 "옷 벗으면 그만 아니냐!!"고 문을 걷어차서 나가버리는(!) 행패를 부린 사건이 있었다. 송요찬 장군은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선 화도 못 내고 김재규 대령을 영창으로 보내버리려 했는데, 이를 이종찬이 말려서 육군대학 부총장 자리를 제의함으로 처벌을 피했다 한다. 다만 이때는 송요찬 장군 본인의 무리한 요구도 문제였다. 김재규 대령의 사단은 당시 사단장이 다른 업무로 부재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전 통보없이 갑자기 불시에 방문해서 김재규 대령에게 부재중인 사단장의 업무보고까지 요구하며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는데, 선술했듯 평소엔 온화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폭발하는 성격이 발동(?)된 것이다.

김재규의 이름인 '재규'에서 연상되는 동물인 재규어를 이용하여 김재규를 재규어로 돌려 말하는 사례가 많다.

5 매체에서

  • 욕망의 문
정한용정주영 회장이 연상되는 거대 재벌총수로 나오는 드라마. 여기서는 실명 대신 정보부 부장이라는 호칭 아래 백찬기가 열연했다. 사진상의 김재규와 상당히 비슷했고 원래 정치자금 문제로 박정희와 같이 회장님에게 충고하는 1회성 출연이었으나 의외로 인기를 끌어 고정 게스트화 되었다. 여기서 박정희로 나온 사람은 연극인 고 이진수. 박정희와 정보부 부장 2명은 실제 인물과 꽤 비슷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인기가 있었다.
  • 다큐멘터리 극장 - 12.12편
KBS에서 방영된 12.12 사건 세미 다큐 드라마. 여기서는 김재규라는 이름으로 초기부터 나온다. 역시 백찬기가 김재규를 맡았고, 드라마 진행상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에게 체포되면서 리타이어된다. 이 다큐 드라마에서 박정희이창환, 최규하김성겸, 전두환박용식으로 이후 정치드라마의 고정 배역의 시초가 된 작품.
  • 야망의 세월
유인촌이 주연을 맡은 당시 건설회사 대표였던 이명박의 전기 드라마. 이휘향에게 정치공작을 지시하는 부장님으로 백찬기가 나왔다. 김재규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나 몇 번의 출연 후 작중에서 대사로 각하를 저격했다는 언급이 나와 그가 김재규임이 확정되었다.
박근형이 극강의 김재규 포스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김재규로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차지철과의 말싸움과 그 싸움이 끝나고는 "이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10.26 사건을 일으키기 전 총을 겨누며 일본어로 '고로시마스(죽여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고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22] 박정희를 저격한 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더 이상 언급이 없다가 5.18 민주화운동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될 뻔 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
덧붙이자면 전작인 제3공화국의 김재규는 김동현이 맡았다. 6사단장 시절로 나왔는데 비중은 실로 미미했다.
사극에서 정도전 전문배우로 유명했던 故 김흥기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제4공화국과 같은 시기에 방영되어 드라마는 신통치 않았고 4공에 묻힌 감도 있다. 배우가 배우인지라 연기력은 훌륭했지만 워낙 4공에서의 박근형 포스가 막강했던지라 그에 비하면 살짝 역부족.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후반부에 착용한다. 이 드라마 19화와 마지막 화인 20화는 김재규의 일생이 중심이다.
백윤식이 열연했다. 김재규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수작이다. 다만 조롱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에 대한 묘사의 리얼리티는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어차피 비트는 게 목적인 영화인데요

이 또한 명품 역사 드라마. 여기서도 김재규가 포스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김재규 역을 맡은 김형일이 실제 김재규와 외모,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평소 외모가 그냥 김재규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김형일이 체구가 크고 목소리도 매우 저음의 굵고 패기있고 젊은 목소리인데, 실제 김재규는 체구가 큰 편이 아니고, 목소리도 하이톤에 말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때문에 이 점은 약간 괴리가 있다.

박용수가 연기하였다. 작중 묘사되는 10.26은 김재규가 술에 취해 갈지자 걸음으로 나와 부하한테 총을 빌리고 쐈다는 뉘앙스로 보여준다.


현재는 관련된 원문이 삭제되어 짤만 존재하는 상태. 여포동탁을 살해하는 장면이라는데이 어째 데저트 이글같은데 어딜 봐도 10.26 사건의 패러디. 하지만 박정희가 동탁보다는 조조에 훨씬 가까운 외형에 김재규 역시 복장만 여포 복장이지 실제로는 장료에 넘사벽으로 가까운게 함정. 이말년 시리즈 하차 이후 이말년 서유기를 연재하기 전 삼국지를 검토한 적이 있고 그 중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이말년 집 침대에 장식되어 있다 카더라. 이말년은 이것 말고도 전두환과 노태우로 패러디한 이각과 곽사가 김재규로 패러디한 여포를 낙양성에서 쫓아내는 그림도 그렸다. 실제 이들은 장안에서 싸웠다는 것은 잠깐 잊자


김병기가 연기한 김재욱 중정부장. 실존 인물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이는 그가 차지철을 참고한 역할인 장철환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 장철환이 그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려 하자 차수혁이 "김 부장은 각하와 동향(경북 선산)으로 특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고 진언한 점 등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1. 박정희의 고향 후배인 것이 이후의 진로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2. 해방 후 안동농림고등학교,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의 전신
  3. 이전 문서에 경북대학교 농과대학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이 당시에는 2년제 전문학교였다. 해방 후 대구농과대학을 거쳐 1951년 대구사범 등과 통합하여 경북대학교로 개교한다.
  4. 일제강점기 당시 중등교원의 수가 부족한데 반해, 조선 내에는 고등사범학교가 없었다. 문과의 경우 경성제국대학 졸업자 등으로 수요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이공계 쪽의 교사가 부족하여 일제는 각종 전문학교에 2년제 '교원양성소' 과정을 도입하여 교사인력을 충원했다.
  5. 단기에 해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
  6.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김종오, 박병권, 민기식, 김용배, 김계원 , 이세호, 임충식 등은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들이 아니다. 다만, 12.12 군사반란 때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노재현이 보여준 추태가 워낙 커서 앞의 인물들까지 도매금으로 같이 까이는 경우가 많다.
  7. 포섭해 두지 않아 내막을 몰랐던 이들
  8. 80도306 판결 참조. 내란죄에 있어서 목적에 대한 인식의 정도는 미필적 인식, 즉 자신의 행위가 범죄발생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만 되도 행위자가 그러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인해 구성요건이 충족된다. 즉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일 때 국헌문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목적은 없었으나, 대통령의 사망이 국헌문란을 가져올 것을 미필적이나마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으로도 국헌문란에 대한 목적의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소리다.
  9. 참고로 칭호를 붙인다면 무력을 사용했으므로 열사가 아닌 '의사(義士)'라고 해야 맞다. 열사는 보통 자신의 지조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을 의미하는 반면 의사는 무력을 통해 의거를 한 사람을 뜻하므로 '김재규 의사'가 의미에는 좀 더 부합한다.
  10. 다만, 소극적인 국민들의 성격과 견고한 기득권의 힘 때문인지 몰라도 근·현대사를 통틀어 당사자 개인에게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진 사례는 실제로 흔치 않다. 또한 박정희 본인은 이승만이나 전두환, 노태우와는 달리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해도 결코 자리에서 물러날 의사가 없었다.
  11. 실제로 장준하가 긴급조치로 구속되었을 당시 감방동기였던 이해학 목사는 당시 장준하가 이제 민중투쟁으로는 안 된다며 "양심적인 군인"을 포섭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수 말고는 박정희를 몰아낼 방법이 없다고 말했고, 본인은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절망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12. 그러나 한홍구는 2013년을 기점으로 김재규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다.
  13. 대표적으로 김재규는 그가 교사 시절 제자였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가까웠는데, 10.26이 터지기 전 이만섭과의 식사 자리에서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차지철이 때문에 골치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출처1]
  14. 물론 시간이 배로 걸린다는 전제가 붙는다. 실권을 쥐고 있는 핵심 요직원들과 군부쪽 인사들은 확고한 박정희 지지자이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렵다는 부분도 걸리긴 하다.
  15.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 내걸었던 요구들 가운데 하나도 "계엄령 해제"에 관한 것이었다. [#]
  16. 김재규 본인은 소위 설거지론을 얘기하며 5개월간 유신의 잔재를 처리하려 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자신이 담당하는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다만,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권력을 인수하겠다는 정도를 생각했다고 밝혔다.
  17. 해병대사령부 해체 후 해병대 인원들은 해군 상륙전 계열 병과 인원들로 서류상 변경되었다.
  18. 예편과 비슷
  19. 마이크로버스 이상은 통행금지이다.
  20. 당시에는 용산여중.
  21. 하필이면 한강중이 이전한 곳에도 근방에 남중인 오산중이 있다. 이것 때문에 현재 한강중에는 여학생이 훨씬 많다.
  22. 그런데 이것은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