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rt Eisner(1867년 5월 14일 ~ 1919년 2월 21일)
1 개요
독일 제국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활동한 언론인이자 마르크스주의자. 독일 11월 혁명 와중에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왕국을 붕괴시키고 바이에른 자유국을 수립한 인물이다.
2 생애
1867년 베를린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1] 철학을 전공한 이후 프랑프푸르터 차이퉁[2]의 기자로 활동했으며 사민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임을 숨기지 않았던 아이스너는 '당연히' 빌헬름 2세를 신명나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고 그 덕에 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한다.
이후에도 뉘른베르크의 일간지 프랭키셰 타게스포스트(Fränkische Tagespost)에서 편집장으로 활동하는가하면, 프리랜서로 각종 언론에 자유로이 기고활동을 하면서 활발한 언론인으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던 아이스너는 1차대전이 발발하자 반전운동에 힘을 쏟는다. 그리고 전쟁이 끝물에 다다른 1918년 후방의 군수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반역죄로 기소된 아이스너는 다시 한 번 9달 동안 감방살이를 하게 된다. 출옥한 이후로 아이스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조직을 몰두하는데 골몰하고, 독일 혁명이 한창이던 1918년 11월 23일 봉기를 일으킨다. 봉기 자체는 비교적 성공적이어서, 아이스너는 비텔스바흐 왕실의 바이에른 왕국을 붕괴시키고 바이에른 자유국을 세운뒤 스스로 대통령직에 오른다. 하지만 아이스너 본인이 옛 동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주축으로 하는 사민당 온건세력과의 타협을 거부했던데다가[3], 종전 직후 개판오분직전이었던 당시 독일의 사정상 기본적인 정부 운영을 하는 것 조차 불가능해 민심을 얻지도 못해서 1919년 1월에 있었던 선거에서 참패를 당하고 만다.
선거에서 참패한 이후, 아이스너는 바이에른 의회의 의원직마저 사퇴할 것을 결정했으나 1919년 2월 21일 사퇴서를 제출하기 위해 의회로 향하던 도중 우익세력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3 여담
- 로자 룩셈부르크와 절친한 사이였다. 한 때 룩셈부르크의 별명이 '아이스너의 사람'이었을 정도.
그리고 둘 다 유태인이었던 덕분에 독일 우익은 신나게 유대인의 음모를 들먹일 수 있었다. - 프로이센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고 있던 것으로 유명하다.[5] 바이에른 공화국을 선포한 것도 이런 강한 반 프로이센 감정 탓이 상당 지분을 차지한다.
- 1920년 공산주의자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생애를 다룬 연극을 상영하려했는데, 바이마르 공화국은 정규군, 심지어 그것도 포병(...)까지 동원하여 상영을 원천봉쇄해버렸다.
연극을 상영하려다 고자가 된 그 분이 떠오르는 건 기분탓이다.님은 바로 사회주의 낙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곧 연극을 상영하겠습니다
- ↑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본인은 자신의 유대계 혈통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물론 우익들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갖고 배후중상설을 미친듯이 유포했지만 - ↑ 오늘날 세계적인 독일 언론 프랑푸르터 알게마니어 차이퉁의 전신격되는 신문사이다.
- ↑ 정확히는 사민당 온건파 역시 프로이센 군부와 함께 독일을 파멸로 이끈 전범이라고 씹었다.
- ↑ 아이스너가 저격당한 위치를 쓰러진 모습과 동시에 표시한 동판.
- ↑ '프로이센의 군부가 바이에른을 비롯한 독일 전체를 멋대로 파멸로 이끌었다'고 공공연히 주장했고 1918년 종전 당시 바이에른 대중들 역시 이런 주장에 동의를 했기 때문에 아이스너가 주도한 혁명이 처음에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 다만 바이에른 외부지역에서는 '저 유태인 놈이 우리 신성한 독일을 또 1871년 이전으로 갈가리 찢어놓으려 하네!'라는 반응이 대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