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
루트비히 4세 | → | 카를 4세 | → | 벤체슬라스 |
1316년 5월 14일 ~ 1378년 11월 29일
재위 1347년 ~ 1378년
1 생애
1.1 전반기
카를 4세는 크레시 전투에서 사망한 보헤미아 왕, 룩셈부르크 백작인 보헤미아의 요한의 아들이다. 체코어로 카렐 4세로 부른다. 카를은 프랑스로 보내져 교육을 받았으며 5가지 외국어[1]를 읽고 쓸 줄 알았는데 그 실력이 매우 유창했다. 1331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가해 경험을 쌓았다. 1333년에 그는 아버지가 자주 자리를 비우고 시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보헤미아의 왕권을 관리하게 되었다. 1334년에는 모라비아의 변경백이 되었다. 모라비아의 변경백은 카를이 왕태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타이틀이었다. 2년 뒤에는 원래 모라비아의 변경백이었던 요한 하인리히를 대신하여 티롤의 통치권을 맡게 되었다. 곧 이 나라에 대한 소유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1.2 로마 왕과 통치
황제 루드비히 4세에 대항해 카를의 아버지와 교황 클레멘스 6세간에 맺어진 동맹으로 말미암아 1346년 카를은 렌스에서 선제후들에 의해 로마의 대립왕으로 선택되었다. 그는 1347년 사전에 클레멘스 6세에게 광대한 양보를 하겠다고 굴욕적인 약속을 했다. 넓은 영토를 소유하기 위해 교황의 지위를 확정하고, 클레멘스 6세에 대항하는 루드비히의 행동을 취소시키고 이탈리아의 일에 상관하지 않으며 교회를 방어하고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카를 4세는 처음에 독일에서 매우 약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선출권을 위해 갚아야 할 빚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에게 사제왕이라고 조소적으로 불렸다. 많은 주교들과 태반의 제국 도시들은 루드비히 4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설상가상으로 백년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자를 지지해서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많은 기사들을 잃고 카를 자신도 상처를 입은 채로 패주했다. 독일에서 내전을 방지했지만 루드비히 4세가 곰을 사냥하던 중에 뇌일혈로 쓰러져 1347년 10월에 죽었다. 1349년 1월 비텔스바흐의 일당들은 군터 폰 슈바르츠부르크를 안전하게 독일 왕에 선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군터는 지지자가 거의 없었으며 몇 달 뒤에 슬퍼하는 사람없이 쓸쓸하게 죽었다. 그후에 카를은 제위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지 않았다.
카를 4세는 처음에 세력 기반을 안전하게 다지려고 했다. 보헤미아는 전염병에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라하가 수도가 되었고 그는 프랑스 파리를 모델로 재건축하여 프라하 안에 신도시를 지었다. 1348년에 자신의 이름을 따 중부 유럽의 첫 대학교인 프라하의 카를 대학을 세웠다. 이곳은 관료들과 법률가들의 훈련장이 되었으며 곧 중부 유럽의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를은 반대자들의 어려움을 잘 활용해서 1349년 7월 아헨에서 다시 왕위에 올라 신성 로마 제국의 확실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라인 강 지방과 슈바비안 사람들의 마을에 선물을 주고 약속했으며 합스부르크 가와 친분을 다지기 위해 결혼 동맹을 맺었고 바이에른의 공작 루돌프 2세와는 1348년에 그의 딸 안나와 결혼해 결속을 다졌다.
1350년 카를 4세는 프라하에서 로마의 호민관 콜라 디 리엔조의 방문을 받았다. 콜라 디 리엔조는 카를에게 시인 페트라르카와 플랑드르의 시민들이 있는 이탈리아에 가도록 설득했다. 이 애원을 무시한 카를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죄수로서 취급해 아비뇽의 클레멘스 6세에게 보냈다. 프라하 밖에서 카를은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를 넓히려고 시도했다.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슐레지엔, 상 팔츠, 프랑켄의 영지를 손에 넣었다. 이 지역은 라인 지방에 있는 룩셈부르크 가의 영지, 그리고 보헤미아와 연결되어 뉴 보헤미아를 구성했다. 그러나 보헤미아는 이런 카를 4세의 모험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는 1355년 보헤미아의 법률을 성문화하려고 했을 때 급격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후 카를은 중앙 집권 정책을 축소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1.3 황제와 금인칙서
1354년에 카를 4세는 군대 없이 알프스를 통과해 1355년 1월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 대성당에서 롬바르디아 왕관을 받았으며, 4월에는 로마에서 황제로 등극했다. 카를의 유일한 목적은 황제의 자리를 평화롭게 받는 것이었으며, 교황 클레멘스 6세와 이전에 한 약속에 따라서 로마인들의 소원에도 단지 몇 개의 도시만을 가졌다. 사실상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제국의 것을 상실하고, 카를 4세는 많은 재산을 잔뜩 싵고 알프스를 건넜다. 이에 대해 페트라르카는 경멸하는 언어를 썼다. 카를은 돌아와서 제국의 내치에 신경썼으며, 페스트로 인한 피해를 복구했다. 그리고 1356년에 독일 왕을 선춢하는 방법을 규정한 금인칙서를 발표하게 된다.
모라비아를 형제인 요한 하인리히에게 주었으며, 룩셈부르크를 벤체슬라스에게 주었다. 카를 4세는 그의 영토를 안정시키는 데에 온 힘을 다했으며, 보헤미아 왕국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것을 위하여 1353년 라인의 상 팔츠 부분을 구입했으며, 1367년에 하 루시티아를 보헤미아에 합병했고 독일 각지의 많은 사유지들을 샀다. 1363년 상 바이에른의 공작이며 티롤의 백작인 마인하르트 3세가 죽자, 루드비히 4세의 아들들이 상 바이에른을 요구했으며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는 티롤을 요구했다. 카를 4세는 만약에 이 가문이 멸문되면 룩셈부르크 가가 이 영지들을 차지하는 조건으로 요구를 승낙했다. 같은 시간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을 아들 벤체슬라스에게 주었다. 1365년에 카를은 아비뇽의 교황 우르바노 5세를 만나 로마로 가는 것을 호위했으며, 브루고뉴의 왕이 되었다.
1368년에 이탈리아로 가 비테르보에서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접견하고 1369년에 다시 제국으로 복귀했다. 말년에 카를 4세는 벤체슬라스가 1376년 안전하게 로마 왕위를 물려받아 독일의 일에 거의 신경쓰지 않았으며 1378년에 슈바비아 인들과 평화 교섭을 했다. 그리고 3명의 아들들에게 영토를 배분한 이후 카를 4세는 통풍에 걸려 1378년 11월 프라하에서 사망했으며, 역시 프라하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