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칭호 | 에드워드(Edward) 웨일스 공작, 콘웰의 공작, 아키텐 공작인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Edward of Woodstock, Prince of Wales, Duke of Cornwall, Prince of Aquitaine) | |
별칭 | 흑태자(The Black Prince)[1] | |
부모 | 에드워드 3세, 필리파 | |
생몰년도 | 1330년 6월 15일 ~ 1376년 6월 8일 | |
출생지 | 영국 옥스퍼드셔 우드스톡 궁전 | |
사망지 |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 |
문양 |
1 소개
백년전쟁 초기의 인물. 잉글랜드의 왕족으로,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자, 리처드 2세의 아버지다.
최초의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다. 백년전쟁 초창기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프랑스 군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왕이었던 장 2세를 사로잡기까지 하였다. 그 공으로 남 프랑스 지방을 할양받아 8년 동안 통치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 왕국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단 용감한 정신과 뛰어난 무술을 뒷받침할 건강한 몸을 가지지 못했는지 자주 와병 중이었으며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영국으로 귀국, 그 뒤 세상을 떠났다. 에드워드 왕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왕좌는 에드워드의 어린 아들 리처드에게 돌아갔다. 당연히 어린 왕을 둘러싸고 에드워드 왕세자의 동생들이자 왕의 숙부들이 왕좌를 넘보고 권력다툼을 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플랜태저넷 왕조의 몰락을 불러왔다.
또한 그의 별명이 2차 대전기의 처칠 전차의 개량 시험모델에 붙혀졌다.
2 백년전쟁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부왕 에드워드 3세가 전장에 참여하며 에드워드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기도 했다. 그리고 1346년, 16살에 불과하던 에드워드는 프랑스와의 크레시 전투에서 자신의 부대를 잘 통솔해 승리에 기여를 했고, 칼레 포위전등에 참가해 승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1355년 프랑스 보르도로 진군, 아키텐에 머물면서 프랑스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프랑스가 그에게 공포심을 가지기도 했다.
2.1 푸아티에 전투
1356년 9월 19일, 장 2세와 직접 격돌한 푸아티에 전투는 애초에 영국군이 절대 열세에 몰려있는 전투였다. 무모한 전투를 하지 않는 흑태자가 협상을 제의했을 때 장 2세가 응하였다면, 아마 백년전쟁 초반의 판세는 프랑스에게 기울었을지도 모르나 영국의 세 배 이상의 병력을 지니고 있었던 장 2세는 그의 호의를 거절하였다.
이 당시 영국군은 장기간의 약탈로 인해 식량이 고갈되어 있었고 약탈물을 잔뜩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두 국가의 전쟁을 휴전시키기 위해 추기경 탈레랑이 개입했고 강화조약 대신 흑태자군에게 하루 간의 휴식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후 벌어진 결과는 크레시 전투의 교훈을 살리지 못한 채 무모한 돌격을 감행한 프랑스 군의 대패. 마지막 공격 라인에 있던 장 2세는 이미 전쟁이 결판난 상황에서 후퇴를 거부하다 막내아들 필리프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전투 상황도. 붉은 색이 흑태자가 이끄는 영국군, 파란색이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 |
제안을 거절한 프랑스는 쓴 대가를 치뤄야 했다. 흑태자는 지형지물을 적절히 살린 V자 진형 안으로 프랑스군을 유인했고, 자신들의 갑주와 숫적 우세를 과신하여 돌격을 감행한 프랑스군 선봉대를 섬멸했다. 선봉의 주축인 기사들의 갑옷은 화살을 막아낼 만큼 튼튼했으나 타고 있던 말은 그렇지 못했던 탓에 기사들은 쏟아지는 장궁병의 화살에 말을 포기하고 땅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돌격력을 상실한 기사들은 언덕 위까지 걸어서 올라와야 했고[2], 잔뜩 지친 상황에다 V자 진형이 양 옆에서 쏘아붙이는 화살비에 지나치게 밀집된 상태에서 영국 하마기사(下馬騎士, 말을 매어두고 싸운 기사)들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당연히 영국군은 어렵지 않게 프랑스 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물론 말을 탄 프랑스 기사들이 언덕 위까지 올라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장궁병이 재빨리 근처 습지로 피난하고 잉글랜드의 하마기사들이 지원에 나서자 격퇴되었다. 선봉이 괴멸하고 프랑스의 왕세자(후에 샤를 5세)가 이끄는 2진의 구원 역시 실패, 3진은 2진이 무너지는걸 보자 사기를 잃고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사실 영국군은 이쯤에서 끝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 2세의 4진이 도착하여 순식간에 패닉에 빠지고, 이 시점에서 탈주병이 발생했지만 흑태자는 남은 부대를 추스른 후 오히려 예비대로 남겨두었던 승마기사들로 역습을 감행,[3] 프랑스군이 혼란에 빠진 사이 영국군 후속부대가 협공을 가해 결국 3배가 넘는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왕인 장 2세가 되려 포로가 되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하지만 결코 흑태자는 오만하지 않았고 자신을 장 2세보다 아랫반열에 두고 그를 지극히 모셨다. 비록 적국의 왕이지만 그는 왕이요, 자신은 왕세자였기 때문에 왕에겐 왕다운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장 2세는 비참한 포로의 처지었을지언정 결코 모욕받지 않았고, 영국으로 그를 압송하면서 본토에 건너가서까지 흑태자의 포지션은 늘 장 2세의 아래였다.
장 2세는 이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후 프랑스가 몸값과 대신할 볼모를 보내는 조건으로 장 2세는 석방되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을 알게 되자 심한 수치심을 느껴 스스로 영국에 다시 가기에 이른다. 흑태자가 베풀었던 아량과 호의를 배신으로 갚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런던에서 생을 마감하였다.[4]
그의 넓은 아량, 강자에 굴하지 않는 용기, 긍지를 소중히 여기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은 기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이후로도 그를 기사의 귀감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보다 일찍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리처드 2세가 즉위하면서 왕위를 놓고 그의 형제들, 조카들 간에 내란이 발생하고 리처드 2세는 폐위되는 비극이 터지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 에드워드 3세의 후손들끼리 내란이 터진 게 바로 장미전쟁이다.
3 흑역사
에드워드 자신은 훌륭하고 강력한 기사였으나, 그가 한 일이 모두 전적으로 선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카스티야에서 뒤를 봐주었던 '잔학왕' 페드로가 왕위에서 쫓겨난 이후 흑태자에게 몸을 의탁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강군을 이끌고 가 스페인 반란군을 괴멸시키고 폐왕 페드로를 다시 왕위에 올려놓았다. 참고로 이때 용병으로 참전해 페드로를 몰아낸 지휘관이 게클랭으로, 흑태자는 그와 회전을 치뤄 패배시키고 게클랭을 사로잡는다.
사실 페드로 그 자신은 '잔학왕'이라는 별명과는 달리 매우 선량하고 유능한 인물이었다. 이 별명 자체가 그를 내쫓고 왕위에 오른 그의 이복동생의 모함으로 인해 붙은 별명이었다. 당대에는 잔학왕 페드로(Pedro el cruel)라고 불렸으나 후에 정의왕 페드로(Pedro el justiciero)라 불리게 되었으며, 그가 죽자 초서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그런 인물과 가까이 지내며 지원해 준 것은 좋았다만, 그를 위해 일으킨 전쟁이 문제였다. 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 자신의 기존 영지였던 남프랑스에서 많은 세금을 거두었고, 이는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와병 중이었음에도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뛰어다니다가 병이 더 깊어졌고, 결국 스스로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을 통해 옳은 일을 하며 소인배를 벌하긴 하였다만, 역설적이게도 그 옳은 일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에게도 자신들의 백성들에게도 해악이 된 셈이다.
여담으로, 이 때 페드로가 흑태자에게 자신을 도와준 사례로 제공했던 보석은, 핏빛과 같이 붉은 보석으로서 길이가 무려 5cm에 육박하는 거대한 것이었다. 이 보석은 흑태자의 루비라 불리며 지금도 영국 왕실의 왕관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흑태자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 게임사인 소프트맥스에서 개발했던 창세기전 시리즈에 등장하는 흑태자의 이름 및 행적의 일부 등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 징기스칸 4에서는 파워업 키트의 시나리오 4에 등장한다. 중앙 아시아의 먼치킨이 티무르라면 유럽의 먼치킨은 당연 흑태자. 이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특수유닛인 가터 기사단을 이끌면 공격력이 증가하는데 이미 전투력이 더럽게 높기 때문에 영국은 흑태자만 믿으면 된다. 다만 가장 큰 문제는 수명. 시나리오 4는 1370년 시작인데 에드워드의 사실 몰년은 1376년이라서 수명이 짧게 설정이 되어 있어서, 재수 없으면 게임 진행 10년 이내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많이 활약시켜 주려면 빠른 확장이 필수다. 부왕 에드워드 3세가 죽을 때쯤 사망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게임 시작 직후 양위 커맨드를 사용하는 것도 한 방법. 덧붙이면 가터기사단 이벤트에서 실제 역사에서의 부인인 조안이 등장하지만, 흑태자가 즉위해도 그녀가 왕비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안습.
- 기사 윌리엄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정체를 숨기고 마상 시험에 참여하며, 정체가 드러났을 때 다른 기사들은 전부 기권하는 와중에 윌리엄이 봐주지 않고 덤비면서 후회없는 대결을 펼친다. 멋진 대결이었다고 자평한뒤 패배를 시인한다. 대회가 끝난 후 당시 마상시합 최강자인 아드해머의 용병단을 긴급소환해 푸아티에 전투에 돌입한다. 이후 등장이 없다가 윌리엄이 위장 신분이 탄로나서 위기에 빠졌을 때 재회한다. 그는 윌리엄에게 "자네와 난 닮았군. 우리 둘 다 신분을 속이려했고, 실패했지. 그리고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는 말을 하며 즉석에서 윌리엄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한다. 덕분에 윌리엄은 기사로써 정식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되고 숙적 아드해머에게 승리를 거둔다. 에드워드를 맡은 배우 제임스 퓨어포이(James Purefoy)는 이후 ROME에서 안토니우스 역을 맡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 늘 검은 갑옷을 입었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영문 위키에 따르면, 이것도 맞지만 다른 이야기도 있다고 쓰여 있다. 동시대 프랑스의 역사가 필리프 드 메지에르(Philippe de Mézières, 1327?~1405)가 에드워드를 '검은 수퇘지' 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는 것인데, 이 말은 '기독교 국가끼리의 관계를 망치는 침략자' 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만 시각적인 효과가 중요시되면서, 검은 갑옷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듯. 정작 그의 생전에는 그렇게 불린 적이 없다. 영문 위키에 의하면 16세기부터 그렇게 불리었다고 하는데 그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사후에 만들어진 표현인 듯.
- ↑ 사실 장궁 자체에 의한 피해는 별로 크지 않았다.
- ↑ 흑태자 에드워드는 상황을 언제든 타개할 수 있게 승마한 중기병을 후방에 예비대로 배치했다. 장 2세가 이끄는 4진이 진격해오자 전방에서 말 없이 싸웠던 기사들을 다시 말에 태워 프랑스 본대의 정면을 향해 중기병 돌격을 감행했고 후방에 배치해뒀던 중기병을 프랑스 본대의 측면에 돌격시켰다. 프랑스의 대규모 본대는 양방에서 돌진해오는 영국 중기병에게 그대로 얻어맞고 진형이 분쇄돼 말그대로 개발살 나버렸다. 이렇게 영국은 중기병을 말에서 내려 싸우다가 다시 태워 충격전술을 가하는 유동적인 전법을 자주 사용했다.
- ↑ 브레티뉴이 조약에서 장 2세의 몸값은 처음엔 400만 크라운이었다가 300만 크라운으로 결정되었고 이 중 40만 크라운이 먼저 지급되었다. 이를 선납금으로 인식한 흑태자는 장 2세를 석방했다. 단, 같이 포로가 된 아들 2명과 많은 대제후들은 잔여금 지불을 위해 남겼다. 당시 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던 도팽(프랑스 왕세자의 칭호)은 자기 여동생을 밀란의 공작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받고 팔 정도로 보석금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귀국한 왕은 마련된 자금을 귀환 파티에 다 써버렸다.
동생까지 팔다시피한 도팽은 그저 지못미.이후 보석금 마련은 장 2세의 국내 입지약화와 자금부족으로 천천히 진행되었고, 마침 영국에 볼모로 남아있던 둘째아들 앙주공 앙리가 억류지인 칼레의 귀족딸과 결혼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 결국 런던에서 사망했다. 당시 장 2세는 전투의 패배로 국내입지가 약화되어 있었고 보석금 문제로도 자신의 기사도에 굉장히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