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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Poitiers
전투 전 기동. 붉은 색이 잉글랜드군의 기동이다.
전투 전개. 붉은 색이 잉글랜드군이다.
크레시 전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프랑스군이 다시금 잉글랜드군에 박살난 전투.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국왕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는다.
후에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장 2세의 몸값이 아쟁쿠르 전투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물론 그 때까지도 프랑스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It was agreed that we should take our way, flanking them, in such a manner that if they wished for battle or to draw towards us, in a place not very much to our disadvantage, we should be the first… the enemy was discomfited, and the king was taken, and his son; and a great number of other great people were both taken and slain. - 흑태자 에드워드, 런던의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
푸아티에 전투 | ||
날짜 | ||
1356년 9월 19일 | ||
장소 | ||
프랑스 푸아티에 남쪽 모펠튜이 언덕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잉글랜드 왕국 가스코뉴 공국 | 프랑스 왕국 |
지휘관 | 흑태자 에드워드 | 장 2세 도팽 샤를 필리프 공작 |
병력 | 장궁병대 1000명, 보병 6000명 | 석궁병대 3000명, 기사 500명, 보병 17000명 |
피해 규모 | 자세한 수치는 불명이나 경미 | 2500명 전사 및 부상 2000명 포로 포로가 된 주요 지휘관 목록 장 2세 17명의 고위 귀족(lords) 백작 13명 자작 5명 기사 100명 이상 |
결과 | ||
잉글랜드 승리. |
1 배경
1356년 흑태자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의 존 챈더스 경 휘하의 병력과 카프탈 드 부슈의 가스코뉴군을 합한 7000의 병력으로 프랑스 남부아키텐 지방의 보르도에서부터 중부 프랑스까지 대규모 약탈을 수행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중부 프랑스까지 진출하면서 곳곳의 프랑스군을 격파하며 다수의 농촌을 철저히 약탈하고 불태워 없앴다. 그러면서 루아르 강 인근의 투르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내린 폭우로 인해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발이 묶여있었다.
흑태자의 잉글랜드군이 발이 묶이자 노르망디에서 랭커스터 공작 그로몽의 헨리와 대치중이던 장 2세는 흑태자의 병력을 일망타진할 기회로 보고 샤르트르에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나 기동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1만5천에서 2만에 달하는 보병을 해산해버렸다. 그 중에는 물론 잘 훈련된 고급 보병들도 다수 속해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병크였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물론 이들이 더 있었다고 하더라도 프랑스군의 뻘짓을 보면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머릿수로 찍어누르는 것은 가능했을 테니까. 예나 지금이나 육지의 전투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수 중 하나는 머릿수다.
2 서전
프랑스군의 진군 소식을 들은 흑태자는 주저없이 군을 돌려 다시 남쪽으로 행군을 시작했으나 보병을 해산하면서까지 기동성을 높인 장 2세에게 푸아티에 남서쪽 수 마일 밖에서 따라잡혔다. 흑태자는 크레시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고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크레시 전투와 동일한 대형을 구축했다. 잉글랜드군은 좌측이 개천으로, 후방이 숲으로 막힌 방어가 용이한 지형에 포진했으며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한 우측면은 그간 약탈했던 막대한 양의 전리품(...)들로 방벽을 구축했다. 이 우측면은 푸아티에에서 보르도로 이어지는 로마 시대의 가도가 위치해 있었다. 흑태자는 크레시 전투와 유사하게 기사들에게 하마를 명령하고 말에서 내린 기사들을 두세 개의 분견대로 나누어 중앙에 포진시키고 장궁병대를 V자 형태의 양 날개에 배치했다. 물론 그 때와 동일하게 장궁병대의 앞에는 끝을 날카롭게 깎은 나무 말뚝 등 기병의 진군을 막기 위한 온갖 장해물들을 설치해 두었다. 그러는 한 편 소수의 기병대를 장 드 그레이 3세의 휘하로 두고 후방의 숲 속에 감추어 두었다.
한 편 프랑스군은 4개의 제대로 편성되었는데 최전방에는 클레르몽 휘하의 300명 가량의 기사들과 독일 용병 장창병대가 포진했다. 이 최전방의 임무는 장궁병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의 배후에는 말에서 내린 기사들로 구성된 세 개의 부대가 배치되었다. 그 지휘관은 각각 후일 샤를 5세가 되는 샤를 도팽, 오를레앙 공작, 국왕 장 2세였다.
3 크레시 전투를 망각한 프랑스군
잉글랜드군 좌익이 거짓으로 퇴각하자 프랑스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미끼를 물고 돌격을 개시했다. 미리 그럴 줄 알았던 잉글랜드군은 돌진하는 기사들의 측면을 노리고 위치를 옮겨 사격하였다. 정면의 마갑은 상당히 견고하였으나 측면의 마갑은 상대적으로 취약했으므로[1] 말들이 무더기로 쓰러지면서 기사들이 사실상 무력화 되었다. 역시 프랑스군은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제 1파가 황당하게 무너지자 그 이후에는 샤를 도팽의 중보병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말에서 내리기만 했을 뿐 여전히 두꺼운 갑옷을 입은 하마 기사들은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지쳤을 뿐더러 온갖 화살세례를 감당해야 했고 잉글랜드의 하마 기사들처럼 다른 병과와 상호 협동 체제를 제대로 구축한 것도 아니어서 화살비에 큰 손실을 입고 잉글랜드군과 변변한 교전도 못한 채 재편성을 위해 퇴각했다. 그러니까, 잉글랜드군의 전열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퇴각했다는 말이다. 그 이전부터 중보병의 약점을 공략할 수 있는 것에는 의외로 궁수 등의 원거리 경보병이 포함되었다. 스파르타의 팔랑크스가 아테네의 투석병으로 구성된 경보병대의 히트 앤 런 전략에 일방적으로 농락당한 사례가 있었다. 중보병대의 기동력으로는 원거리 경보병을 상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더 가관인 것은 오를레앙 공작의 제 3파가 접근조차 못하고 퇴각하는 샤를 도팽의 부대를 보고 공황에 빠져 통제 불능 상태로 퇴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워낙 개판을 치며 퇴각한 탓에 뒤에서 공격 대기중이던 장 2세의 중보병대까지 움직임이 묶여버렸다. 이 때 즈음 해서 장궁병대는 모든 화살을 소진한 상태였고 만약 보병대가 통제 하에 들어왔다면 역전을 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밍을 잡을 것도 없이 전열이 엉망이 되어 기회는 날아갔다.
이후로 화살을 모두 소진한 장궁병대는 신속하게 보병들에게 합류하여 진형을 형성하였고 일부는 즉흥적으로 기병으로 전환했다. 당시 장궁병대는 말로 이동하고 싸우기만 보병으로 싸우기도 했던 점을 감안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간신히 전열을 정비한 장 2세는 바로 공격을 개시했고 화살이 다 떨어진 장궁병대의 견제 없이 잉글랜드의 전열에 도달하여 격전이 벌어졌다. 그 때 흑태자는 말에서 내려 싸우던 기사들을 다시 말에 태워 프랑스군의 정면을 향해 중기병 돌격을 감행하고 숲에 숨겨둔 200명의 기병대를 프랑스군 제 4파의 측면과 후방을 향해 돌격시켰다. 사방에서 잉글랜드의 중기병들이 덮쳐 도륙을 해대자 포위의 두려움에 프랑스군은 그대로 도주를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장 2세는 끝까지 싸우다 측근들과 포로로 잡혔다.
4 결과
프랑스는 군사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무너질 뻔했다. 프랑스는 왕의 몸값으로 국가 전체의 1년치 수익의 두 배인 300만 크라운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장 2세는 런던에서 꽤나 좋은 대접을 받았고 몸값 마련을 위해 잠시 귀국했으나 마련할 수 없자 다시 잉글랜드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런던에서 수 개월 후 병사했다.
여러 면에서 크레시 전투의 재판이었는데 이번에도 프랑스 기사들은 장궁병대에게 호되게 당했고 침착하게 대응한 잉글랜드군과는 달리 패퇴하는 아군을 보며 덩달아 도망치는 추태를 보이는 등 체면도 완전히 구겨버렸다. 그러나 크레시 전투에서도 그렇게 당하고 이 전투에서도 완전히 박살났는데도 프랑스군은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프랑스군의 졸전은 아쟁쿠르 전투까지 이어지게 된다.[2]
크레시 전투 항목에서도 그렇고 이 항목에서도 그렇고 프랑스군이 기병 위주의 구성에서 보병 위주로 편성을 약간 바꾸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신을 차렸다고 하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병 위주의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한들,(사실 활용을 잘 못했던 것 뿐이지만)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의 진정한 강점, 즉 병과 간 협동을 전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기병,보병,궁병의 협동 플레이는 매우 매끄러웠다. 잉글랜드군은 기사가 보병으로 전환한 뒤에도 장궁병대의 엄호를 받아가며 싸울 수 있었고, 장궁병대 또한 말에서 내린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말에서 내려 싸우던 기사들이 다시 기병으로 전환하여 중기병 차지를 통해 가장 치명적인 결정타를 먹이며 전투를 마무리했다.[3] 프랑스군이 만약 단순히 기병이 먹히지 않았으니 보병이 답이다, 하고 여겼다면 그만한 바보도 없다. 크레시 전투도 그렇고 이번 푸아티에 전투도 그렇고 프랑스군의 일정 지점에 그저 병력을 들이붓는 식의 전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기왕 들이부으려면 들이부으려는 지점을 미리 궁병대 등으로 사전에 약화시키기라도 해야 하는데 아쟁쿠르 전투까지도 뒤죽박죽 섞여서 돌격한 바람에 피아가 식별되지 않아 프랑스 측의 궁병대는 엄호사격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정신을 차린 군대인가? 사실 이 때까지도 프랑스군의 명령체계는 개판이라 기사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돌격하기 일쑤였다. 반면 평민 향사 출신 장궁병이 다수였던 잉글랜드는 프랑스보다는 명령체계가 확고했고, 지휘에 더 잘 따랐다.
즉 이 전투는 잘짜여진 전략, 전술, 시스템은 우수한 질이 압도적인 적을 찍어누를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투이다.
- ↑ 프랑스 역사가 장 프루아사르의 기록으로는 장궁병대의 송곳 화살촉, 그러니까 Bodkin이 플레이트 아머를 뚫지 못하고 깨졌다고 기록했으나 최근의 실험에서는 정지간 표적에는 잉글랜드의 기록대로 화살촉이 플레이트 아머를 관통했다. 그러나 플레이트 아머는 곡면 처리가 되어있고, 기사들은 정지 표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동중이므로 의미있는 피해는 주기 어려웠을 것이고, 아마 프루아사르의 기록이 맞았을 것이다. 만일 최근 실험한 영국 측의 실험이나 당대 잉글랜드의 주장이 옳다면 장궁병대들이 굳이 위치를 옮겨 말을 노릴 이유가 없다.
-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서도 먼지나게 털렸는데도 갑옷을 덜 껴입었나하고 고민하는 프랑스 기사의 모습을 넣으면서 당시 프랑스군의 병크를 비웃었다.
- ↑ 잉글랜드군하면 주로 장궁병과 하마기사들이 부각이 많이 되는 편이지만 푸아티에 전투에서 가장 강력한 한방을 먹인건 바로 중기병이었다. 사실 잉글랜드군은 장궁을 활용하기위해 빽빽히 밀집한 방어적인 진형을 짜야하다보니 기병들을 말에서 내리게했을뿐 기병대가 결코 약한건 아니었다. 애초에 장궁병과 함께 가장 많이 부각되는 하마기사들도 원레 오리지날 역할은 중기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