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unt Tambora
1 개요
1815년 인류가 목격하여 기록에 남겨진 가장 강력한 분출을 일으킨 화산[1]
인도네시아 동부 숨바와 섬에 위치한 거대한 성층화산. 최고 높이 2722 m에 커다란 칼데라(위 사진)를 가졌다. 1815년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어마어마한 화산 폭발을 일으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실제로 당시 분출의 결과가 전 세계에 미친 여파가 대단하다. 특히 이 분출은 전설적인 분출 규모 뿐만 아니라, 그것의 기록이 상세히[2] 남겨져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명성이 높다. 참고로 이 화산 분출에 비견하는 유사시대의 분출로는 AD 180년경의 뉴질랜드 타우포(Taupo) 호수의 하테페 분출(Hatepe eruption)[3], 백두산의 이른바 천년 분출(the Millenium Eruption)[4][5]이 있다. 덧붙여 산토리니의 대폭발(이른바 Thera 혹은 Minoan Eruption)[6]이 이들에 버금가는 분출을 했었다.[7]
2 지리 및 지질
1815년 대분화 이전에는 높이 4000 미터가 넘는 커다란 산이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 원시림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을 것이며 그 풍광이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전설적인 대분화를 일으키고 약 1500 m에 해당하는 산체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 때 형성된 엄청난 크기의 칼데라가 특징인데, 직경 7 km에 깊이만 1 km를 넘는다. 칼데라 내부 한켠에는 작은 호수가 있다.
판구조 관점에서는 전형적인 섭입대 성층화산이다. 자바(Java) 해구로부터 북쪽 약 320 km 떨어져 있고 섭입하는 해양판에서 약 190 km 위에 놓여 있다. 즉 대략 2백 킬로미터 아래에서 끊임없이 공급되는 섭입대 마그마가 화산분출의 원동력이다. 가장 위쪽의 마그마방은 대략 3~4 킬로미터 아래에 놓여있으나 구체적인 깊이는 마그마의 역학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같은 방법으로 발달한 인도네시아의 기라성 같은 활화산들 중에서도 크라카토아 화산, 토바 호수과 함께 가장 명성이 드높은 화산 중 하나이다.
3 1815년 이전
숨바와 섬 곳곳에는 여러 영토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주로 6개의 주요 왕국[8]이 중심이었으며 숲과 강 근처에 자리잡은 채로 낙농업과 채집을 통해 살아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1800년도 초반에 나폴레옹 전쟁과 연계되어 서구 열강들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던 곳이었다.
그러나 1812년 처음으로 활동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흔들림이 감지되고 소규모의 분연주를 만들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점점 강해졌다. 이 기록들은 당시 그 지역에 있던 서구권 사람들에 의해 남아있다. 시커먼 분연주가 관측되었으며 그 화산재가 갑판에도 떨어졌다고 1814년에 기록되었다.
4 1815년 분출
첫 분출은 1815년 4월 5일 저녁에 일어났으며 약 2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인근' 군사기지에서 이 소리를 모두 들었는데, 대포 소리로 착각했으며 군대는 긴장상태에 돌입했고 주변에서의 침입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곧 흩날리는 화산재를 보고 이 소리의 정체를 간파했으며 그 소리는 일시적인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가 멀리 떨어진 것[9]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록을 남긴 사람은 토마스 S. 레플스 경(Sir Thoams Stamford Raffles)인데, 그가 주둔하던 기지는 오늘날 자바 섬에 있었다. 즉 대포소리라고 착각하고 화산재가 날린 게 탐보라 화산에서 무려 1000 km나 떨어져 있었다! 심지어 이 분출은 본격적인 폭발도 아니었다. 에피타이저 이 '대포 소리'는 다른 곳에서도 기록이 남아있다. 탐보라 화산에서 북쪽으로 350 킬로미터 떨어진 마카사르 (술라웨시 섬에 있음) 기지에서 항해사 기록에 따르면 오후 내내 남쪽에서 대포소리 같은게 들린다고 했다. 이 몸풀기 분출도 굉장해서, 33 km 높이의 분연주를 만들어냈다.
메인 디쉬는 그로부터 5일 뒤인 1815년 4월 10일 월요일 (지역 시간으로) 오후 7시에 시작됐다. 3시간 쯤 지속된 분출이었고 인류가 기록한 가장 강대한 플리니 분출이었다. 이 분출에 대한 목격 기록은 탐보라 화산 근처 (근처래봤자 수십 킬로미터 거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인물들에 의해 남겨졌다. 그는 탐보라 인근의 족장이었는데, 산 전체가 이글거리는 불꽃이었고 여러 시커먼 연기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고 한다. 1시간을 지속한 폭풍[10]이 마을을 날려버렸다고 전한다. 이후에도 지속된 분출은 수십 세제곱 킬로미터의 화산재를 더 뿜어냈고 수없이 많은 화쇄류를 지속적으로 흘려보냈다. 인근 마을은 지워졌고 화산재는 바다 건너 술라웨시 섬과 자바 섬, 인도네시아 섬까지 날아가 쌓였다. 이 엄청난 크기의 분연주는 그 모양 때분에 불사조 구름(the phoenix cloud)이라고 불렸다.
분출의 잿빛 기둥 때문에 인근 600 km 반경 내의 지역은 하루에서 이틀동안 칠흑같은 어둠 속에 있어야 했다.[11] 이 거대한 폭발은 그 소리가 기록상 수마트라 트루문 까지 들렸는데 거리가 무려 2600 km나 떨어진 것이었다. 말하자면 하노이에서 일어난 폭발 소리가 서울에서 들렸다는 뜻이다. 또한 탐보라 화산에서 800 km 떨어진 지역의 집이 폭발로 휘청거렸다. 화산쇄설류가 일으킨 쓰나미는 인근 해안에 피해를 입혔으나 그 규모가 아주 큰 것은 아니었고, 약 2 m 정도의 것이었다고 한다.[12]
찢겨나간 나무 줄기들과 부석이 뒤섞여, 최대 5 km (...) 직경의 거대한 부유물이 플로레스 해(海)를 떠다녔다. 이 부유물은 3년 동안 인근 바다에서의 탐사를 방해했다. 1815년 8월 1~3일 쯤에 탐보라 화산에서 3600 킬로미터 떨어진 인도양에서 페어리(Fairlie)선(ship)은 부석 부유물을 발견했고 인근 해산의 분출 결과라고 착각했다[13].
5 1816년 여름 없는 해 (A year without Summer)
화산에는 많은 이산화황이 포함되어 있다. 탐보라 화산의 분출 기둥은 무려 43 km나 되었으며, 내뿜은 이산화황의 양만 최대 100메가톤이나 된다. 성층권에 흩뿌려진 이산화황은 대기권에 여러 영향을 미친다.
일단 이산화황은 태양광을 많이 흡수하며 따라서 대류권 온도가 강하하게 된다. 엄청난 양의 이산화황이 전 세계 성층권에 섞이면서 세계 기후가 휘청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휘황찬란한 석양이었다. 주황색, 붉은색의 지평선과 보랏빛과 분홍색의 서녘, 가끔식 섞여드는 검은 부분이 특징이었다. 1816년 봄과 여름 내내 끊임없이 '건조한 안개(dry fog)'가 관찰됐다. 바람이 불어도 사라지지 않은 이 괴이한 안개는 이산화황이 성층권에 있어서 태양광이 희미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심지어 맨눈으로 흑점을 관찰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독특한 화산성 노을은 J.W.M 터너(Turner)의 미술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믿어진다.
결국 대류권은 온도가 떨어졌고, 따뜻해야할 시절에 냉기가 휘몰아쳤다. 연간 세계 평균기온이 섭씨 0.4-0.7 도 정도 떨어졌다. 6월 4일, 즉 여름에 코네티컷에 서리가 내렸고, 6월 6일에는 알바니, 메인, 뉴욕과 데니스빌에 눈이 내렸다! 코네티컷과 페어필드, 트렌톤, 뉴저지까지 살을 에는 강추위가 몰아쳤다.[14] 안그래도 그 시절 (1810~1820)에는 유럽과 북미권이 그리 따뜻하지 않았는데, 나이테에는 비할 데 없는 차가운 여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당시 민중들에겐 그 시절이 "여름 없는 해"로 알려져 있다. 전 유럽에 걸쳐서 대규모 흉작과 기아가 만연해 민심이 흉흉해지고 머지않아 세상이 끝날 거라는 종말론적 분위기가 감돌았다. 20여년전 출간된 멜서스의 인구론이 예언한 기아로 인한 맬서스 트랩이 실현되는 듯이 보였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암울한 분위기도 이런 절망적인 사회분위기에서 탄생하였다. 기원 후에 이보다 심한 이상기후는 535년-536년에 걸친 전세계적 냉해 정도.
조선에서는 순조 16년(1816년) 흉작의 기록이 보인다. 순조 14년의 호구 조사는 790만명이었으나 순조 16년에는 659만명으로 격감했다. 130만명이 줄어든 것이다. 이 모두가 아사했을 리는 없지만 흉년과 기근으로 인해 화전민이나 도적이 되는 등으로 호구 조사에서 이탈한 것으로 추정된다. 걷혀야 할 조세도 쌀은 2만5000석이 모자라고 목면도 300동이 덜 걷혔다. 세입은 부족했지만 경상도에 구호미 8000섬을 긴급 방출하는 등의 이유로 세출은 오히려 늘어나 조선 후기 재정 붕괴를 가속화했다.머니투데이 기사 참조 조선왕조실록 기록 참조
6 인명 피해
많은 기록이 소실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를 산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기후의 일시적 요동으로 인해 미친 피해는 더욱 판가름하기 어려운 법.
탐보라 화산 인근 지역의 피해는 말 그대로 참혹했다. 인근 마을과 부족국가가 모두 폐허가 됐다. 당시 일종의 구호팀(mercy-finding mission) 기록에 따르면 "이 참상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생존자들은 먹을 걸 찾아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위생이 악화되고 물이 오염됨[15]과 동시에 영양부족에 시달리자 사람들은 병에 걸렸다. 설사는 다반사,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화산 가스 중에는 불소도 섞여있었으며 약 18 메가톤이 쏟아졌었다. 이 불소는 땅에 섞여들어가 가축을 죽였고 인간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미세한 화산재 먼지는 기관지염을 일으켰음에 틀림없었다.[16] 추산에 따르면 질병에 대하여, 홍역으로 31%, 설사(탈수)로 29%, 호흡기 질환으로 22% 정도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근거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탐보라 인근 지역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작게는 6만명, 많게는 12만명 정도로 보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기록에서는 1816년 농사가 여름의 서리 때문에 망했다고 전한다. 뉴잉글랜드의 많은 가축은 먹을 게 부족해서 1816~1817 사이의 겨울을 버티지 못했다. 영국에서의 피해가 사실 컸는데, 작물이 비실비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음식이 없어 구걸을 해야했고, 북쪽과 남서쪽 아일랜드는 밀, 오트, 감자 수확에 실패하여 기근에 시달렸다. 독일에서도 이는 심각했는데, 특히 시골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여파로 여러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들 폭동의 문구는 "빵이 아니면 피를! (Bread or Blood)"이었다.
또한 이 기근으로 인해 1816년에서 1819년에 걸친 심각한 전염병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티푸스와 페스트였다. 벵갈의 콜레라 유행도 1816년에 일어났다.[17] 당시에 아일랜드의 8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전염병에 시달렸으며, 4만 4천 3백명이 기근과 이질(Dysentery), 열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7 그리고
1883년 인도네시아는 크라카타우 화산이 폭발하여 또 엄청난 피해를 당해야 했다. 당시 3만 6천여명이 죽었으며 똑같이 유럽에 한파가 벌어져 200만여명이 죽었다.- ↑ 유사 이래 탐보라 그 이상의 분출물을 내뿜은 나머지 경우는 기록이 미비하여 모두 간접적으로 연대와 규모를 추산한 것이다.
- ↑ 특히 서양 문명 기준에서
- ↑ 아마 남반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화산 구조 중 하나일 것이다. 약 2.65만년 전과 1.8만년 전에도 매우 강력한 분출이 있었다. 이 두 분출은 탐보라의 것을 넘어서는 VEI8로 기록되며, 타우포 화산지대(Taupo Volcanic Zone, TVZ)에 많은 과학자들이 관심을 갖게 만든 매력 포인트가 되었다.
- ↑ 약 1000년 전에 분출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최근의 정밀 Ar-Ar 연대측정 결과로는 대략 946년 언저리에 일어난 분출이라 생각하고 있다.
- ↑ 백두산의 경우, 주변에 국가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강력한 분출 기록이 거의 남지 않아있어 풀리지 않은 점들이 꽤나 있으며, 정확한 분출 규모나 양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 BC 1600 년 경에 일어난 강력한 폭발로서, 최근 분출량 산출에 따르면 VEI7급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다만 이 분출 역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게 없다.
- ↑ 이런 분출이 흔한 건 절대 아니지만, 지질학적 규모로 볼 때 이들을 뛰어넘는 강력한 화산 활동도 있어왔다. 토바(Toba)호수, 라가리타, 옐로스톤 등의 화산 분출과 대규모 화산암 지대(Large Igneous Provinces, LIPs)를 만든 분출들의 규모는 상상하기가 어려운 규모이다.
- ↑ princedom or sultanates.
- ↑ 끽해봐야 자바 섬에 있던 메라피 화산이라고 생각했다.
- ↑ 화산쇄설류였을 것이다.
- ↑ 비유적인 게 아니라 어찌나 어두운지, 눈 바로 앞에 손을 갖다대도 손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하루 종일. 그 와중에 그 어둠 속에서 화산재는 계속 내리고 있었으니 지옥이 따로 없다. 햇빛은 4월 12일 정오쯤 되어서야 처음으로 이 지역을 다시 비추기 시작했다.
- ↑ 진짜 끔찍했던 화산기원의 쓰나미는 크라카토아의 것. 탐보라 화산이 가장 큰 분출이었다면, 크라카토아는 가장 "격렬한" 분출이었다.
- ↑ 너무나 당연한 착각...이다
- ↑ 참고로 뉴저지는 스페인과 같은 위도다.
- ↑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살기 위해 화산재가 섞인 물을 마시고 있었다.
- ↑ 실제로 탐보라 화산과 물리적 양상이 비슷했던 피나투보 화산 분출 당시에 피난캠프에서 수백명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 ↑ 벵갈의 경우 탐보라 때문인지 확실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