Θεόδωρος Α' Λάσκαρις
생애 : 1174~1221
재위 : 1206~1221(니케아 제국의 황제)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니케아 제국 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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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제국의 황제이며 라스카리스 왕조(Δυναστεία Λάσκαρης)의 창시자. 그야말로 불굴의 영웅이라 할만한 인물.
1 생애
테오도로스 1세는 동로마 제국의 귀족 가문인 라스카리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199년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딸 안나의 재혼 상대로 선택되어 황가의 일원이 된다.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자 로마 제국은 공중분해 되어버렸다. 트라키아로 도망가 반격을 준비하던 황제 알렉시오스 5세는 선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가 되어 연합하는 듯 하였으나 제대로 뒤통수를 맞아 칭제범으로 몰려 눈이 뽑히고 십자군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수도를 장악한 십자군은 라틴 제국을 세워 그리스 일대를 장악하였고, 이피로스와 트레비존드 일대에서는 도망친 귀족들이 건국한 군주국이 발흥하였다. 아나톨리아 서부는 무정부상태에 돌입해 룸 술탄국에게 야금야금 먹히고 있었다.
1204년 니케아에 터를 마련한 테오도로스는 비티니아와 미시아 일대를 정리하고 아나톨리아 서부일대로 나아갔다. 동년 흑해안을 따라 비티니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트레비존드 제국을 저지하였으나, 그해 말 라틴 제국의 보두앵 1세와 포이마네논에서 격돌하여 대패했다. 행정 체제도 군대도 돈도 없는 껍데기 상태에서 급조한 군대만으로는 당연한 결과였고, 라틴 제국의 군대가 마르마라 해안가를 전부 장악하고 수도 니케아 근방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대위기였다.
구원은 뜻밖의 방향에서 나타났다.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이 라틴 제국을 침공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의 주력을 격파하고 황제 보두앵 1세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적의 예봉이 꺾여 시간을 벌게된 테오도로스 1세는 서둘러 국가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소아시아 서부의 이오니아 지역을 통합했으며, 붕괴한 행정제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웠고, 정치와 조세의 모든 제도를 짧은 시간 내에 재건하였다. 이전 동로마 시절의 관직이 전면 복구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테오도로스의 기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1]
1205년에는 다시 라틴 제국의 위협이 닥쳤다. 2대 황제인 앙리가 아드라미티온을 점령, 다시 공세를 걸어온 것이었다. 아드라미티온 근교에서 양측은 맞붙었으나 또 패배한 니케아 측은 불가리아와 연합, 공동의 적인 라틴 제국을 견제하고자 하였고 그 해 4월 불가리아가 후방을 침공하자 라틴 제국은 물러나게 되었다.
1206년 무렵에는 니케아에 총대주교좌가 설치되었고, 프리지아 지역을 통합하였다. 이 무렵 룸 술탄국은 또 다시 니케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으며, 테오도로스는 라오디키아, 아탈리아 등이 룸 술탄국 측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208년 총대주교에 의해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러 황제가 되었다.
1211년 전 황제이자 테오도로스 1세의 장인인 알렉시오스 3세가 니케아에 왔다. 알렉시오스 3세는 니케아 궁정에 선임황제로써 자신의 입지를 요구했는데 거부당하자 룸 술탄국으로 도주, 니케아를 칠 것을 주문했다. 룸 술탄국의 공격 소식을 접수한 테오도로스 1세는 1200명의 그리스인 병사와 800명의 라틴인 기사대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안티오키아[2]에서 룸 술탄국의 군대를 만난 니케아군은 고군분투 속에 적군을 격파했다. 테오도로스 1세 본인도 전장 한복판에서 분전했다. 이 때 테오도로스 1세가 직접 룸 셀주크 술탄 카이쿠스로 1세와 칼싸움을 벌여 술탄을 전사시켰다고 한다.[3]
1211년 말 안티오키아 전투로 약화 된 니케아를 노리고 라틴 제국이 공격했다. 트레비존드 제국, 룸 술탄국과 협정을 맺어 니케아 제국을 고립시킨 후의 공격이었다. 린다코스 전투에서 니케아군은 라틴 군대에게 패배하였고 결국 협상의 결과로 미시아가 통째로 넘어갔으며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일부가 넘어갔다.
1212년 라틴 제국과 룸 술탄국 전선이 안정되자 테오도로스는 트레비존드 제국을 공격했다. 시노피 이서의 영토가 수복되었으며 트레비존드 측은 약체화 되었다. 이후의 평화를 기회로 테오도로스는 군사력을 재건하였고, 라틴 제국과는 결혼을 빌미로 관심을 계속 돌려두다가 1220년에 라틴 제국을 향해 공세를 취했다.
1221년에는 후계자로 사위 요안니스 3세를 택했다. 지지를 확보하고 형제들의 반발을 막기위해 유력자들을 소집하여 투표과정을 거쳤고, 이를 통과한 요안니스는 충분한 정통성과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테오도로스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선택이 되었다.
1221년 말 테오도로스 1세가 사망했을 때, 니케아 제국은 인구 300만 명의 지역 강국이 되어 있었고 그가 증원한 8천명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의 기틀이 되었다.
2 창작물에서
징기스칸 4 일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