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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년의 상황. 왼쪽부터 에피로스 공국, 라틴 제국,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1 개요

1204~1261

가라는 성지는 안가고 희대의 막장 드라마를 쓴 4차 십자군동로마 제국을 공략하여 세운 라틴계 십자군 국가.

정식 명칭은 로마니아 제국으로 (라틴어:Imperium Romaniae)[1]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다고 자칭하였다.

2 역사

1204년 제4차 십자군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사주[2][3]를 받고 하라는 이슬람 정복은 안하고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제국을 세웠다. 십자군은 1204년 5월 16일 플랑드르 백작인 보두앵 1세를 초대 황제로 세우니 그게 라틴 제국이며 이후 57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배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약탈 이후 제국을 분할하여 나누어 가졌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국의 3/8[4]을 차지했으며 새로운 황제가 된 보두앵 1세는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의 북서부 지역을 가졌다. 그러나 자신이 황제가 되지 못해 화가 난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 1세는 테살로니카를 차지하고 테살로니카와 마케도니아를 아우르는 새로운 왕국을 세우고 프랑크 기사들의 종주권을 받으며 반독립의 자세를 보여 주었다.[5]

동로마 황족들은 이에 맞서 각자 망명 정권을 세웠는데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령된 후 도망친 앙겔로스 황조의 황제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였던 테오도루스 1세가 니케아에서 건국한 니케아 제국, 콤네노스 황조의 마지막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였던 알렉시오스 1세가 1204년 트라페주스에서 건국한 트라페주스 제국, 1204년 두카스 황조의 방계 후손이었던 미카일 1세가 에페이로스에서 건국한 에페이로스 공국이 있었다. 라틴 제국의 보두앵 1세는 즉위하고 나서 이 망명 정권들을 없애고 구 동로마 제국령 전역의 정복을 목표로 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정복이 진행하는 걸로 보였지만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 귀족 계층을 외면하고 동방 정교회의 성직자들에게는 로마 가톨릭 전례를 강제했기 때문에 로마인의 불만은 높아져 갔다.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의 황족들이 각지에 세운 망명 정권에 참여하거나 불가리아 제국과 협력하는 등 라틴 제국에 저항하고 성직자들은 협력을 거부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처음에는 단순히 교회 수위권 분쟁에서 점차 서로를 이질적인 '다른 문명'으로 인식하게 되도록 깊어진 동방-서방 기독교 세계의 갈등은 이 4차 십자군과 라틴 제국 시절을 통해 결정적으로 카톨릭 라틴 서방 세계와 정교회 비잔틴-슬라브계 동방으로 뚜렷하고 의식적인 분열로 파국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틴 제국의 영토는 십자군 기사들에게 봉토로 분할되었기 때문에 존립 기반이 약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관심도 에게해의 군도와 항구의 유지 및 제해권만으로 제국의 내륙 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을 ​​본 망명 정권의 하나였던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1세는 제2차 불가리아 제국 차르 칼로얀과 동맹을 맺고 라틴 제국과 대치했다.

3 역대 황제

3.1 보두앵 1세 (1204~1205)

보두앵 1세는 원래 플랑드르와 에노의 백작으로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고 에노 백작 보두앵 5세와 플랑드르 백작의 딸 마르그리트의 아들이었다. 보두앵의 집안은 대대로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과 관련이 깊었는데 1194년 어머니가 죽가 보두앵은 에노와 플랑드르를 상속받았다. 보두앵은 잉글랜드 왕가와 동맹을 맺어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 편에 서서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에 대항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제4차 십자군을 제창하자 그는 이 원정에 참여하여 120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침공에 가담했고 이사키우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 4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이사키우스 2세와 알렉시우스 4세가 실각하고 십자군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했고 동로마를 대신할 라틴 제국을 만들기로 하였다.[6] 이 때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 1세와 보두앵이 새로운 황제 후보로 추대되었는데 당시 십자군의 가장 큰 주동자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보두앵을 지지하여 1204년 5월 16일 보두앵은 하기아 소피아에서 황제의 대관식을 치렀다.

보두앵은 동로마 제국의 전통[7]을 폐기하고 서유럽의 봉건제도와 비슷한 새로운 제국를 만들고 제국을 나누어 라틴의 기사들과 제후들에게 봉토로 나누어주었다. 1205년 트라키아에서 동로마 재건 세력의 반란이 일어나고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이 라틴 제국의 영토로 쳐들어왔다. 1205년 3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보두앵 1세는 칼로얀의 불가리아군과 싸웠는데 라틴 제국 군대는 대패했고 블루아의 백작 루이는 패사했으며 보두앵 1세는 포로가 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이렇게 황제가 죽음을 당하고 불가리아군은 라틴 제국 전역을 유린하면서 라틴 제국은 성립하자마자 멸망하기 직전의 단계까지 도달했다.그야말로 막장 그러나 불가리아가 너무 약탈이 심하여 그리스인들은 라틴 제국에 의지하게 되었고 차르 칼로얀이 쿠만족의 침입으로 살해당한 틈을 타 간신히 한숨 돌리게 되었다.

3.2 앙리 (1206~1216)

보두앵 1세는 처형 당시 34살이었으나, 후사가 없어서 그의 아우 앙리가 뒤를 이었다. 앙리는 형 보두앵과 함께 제4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고 라틴 제국을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1205년 형인 황제 보두앵 1세가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자 라틴 제국의 섭정이 되었고 형이 처형되자 그해 8월 20일 황제가 되었다. 앙리는 현명한 군주여서 그의 치세에 두 명의 강력한 라이벌인 불가리아의 차르 칼로얀과 동로마 제국의 후계국인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루스 1세와의 세력균형을 교묘히 이용했고 비교적 성공적으로 라틴 제국을 방어했다. 1209년 앙리는 룸 술탄국술탄 카이코루스와 동맹을 맺고 니케아 제국을 압박했다. 1211년 10월 앙리는 소아시아의 린다쿠스 강변에서 테오도루스 1세의 니케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 때 불가르족이 압박하여 더 이상 진격하진 못했다. 1214년 테오도루스와 앙리는 조약을 맺어 라틴 제국은 소아시아 북서 해안을 차지하게 되었다.

앙리는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는데 아그네스는 1207년 자식 없이 죽었다. 그 이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앙리를 불가리아의 칼로얀의 딸 마리아과 강제로 결혼시켰다. 앙리는 1216년 6월 41살의 나이로 테살로니키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는데 황후 마리아는 독살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번의 결혼에서 모두 후사가 없었으므로 라틴 제국의 귀족들은 앙리의 누이동생 욜랑드의 남편인 피에르를 황제로 선출했다. 앙리는 그리스에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고 테살로니키 지역의 몬테라토의 보니파치오 1세 또한 복속시키는데 성공하였다.

3.3 피에르 (1216~1217)

앙리의 매부였던 피에르는 프랑스 루이 6세손자이자 루이 6세의 막내 쿠르트네 대공 피에르 1세의 아들로 쿠르트네 대공 작위를 세습받아 피에르 2세라고 칭했다. 피에르는 첫 번째 부인이었던 프랑스 느베르의 아그네스와의 결혼으로 느베르 지역의 영지를 얻고 두 번째 부인이었던 욜랑드와의 결혼으로 황제가 되었다. 욜랑드의 두 오빠였던 보두앵 1세와 앙리가 모두 후사가 없어서 욜랑드가 여황제가 되어야 했다. 동로마 법에 의하면 여자 후손도 황제가 될 수 있었지만 라틴 제국은 서유럽의 살리카법을 적용했으므로 욜랑드는 황제가 될 수 없었다. 대신 남편 피에르가 황제가 되고 욜랑드는 황후가 되었다. 피에르는 사촌 필리프 2세를 따라 제3차 십자군에 원정했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알비 십자군에 참여했다. 피에르는 1216년 앙리가 후사없이 죽자 황제로 추대되었다. 당시 프랑스에 머물던 피에르는 1217년 그리스로 떠났는데 로마에서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로마 성벽 바깥에서 대관식을 받았다. 교황은 그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뤄주면 그가 서방황제의 지위도 요구할 것이 두려웠다. 그는 1219년 베네치아 공화국으부터 배를 빌려 베네치아 함대와 병력 5500명과 함께 알바니아의 두라초를 점령하기 위해 출발했으나, 두라초 정복에 실패하고 육로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하지만 그는 알바니아 산맥에서 에페이로스 공국군에게 사로잡혀 감옥에 갇혀 사망했다.

3.4 욜량드(섭정) (1217~1219)

피에르의 뒤를 이어 잠시 욜랑드가 섭정을 맡았는데 그는 피에르와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낳고 프랑스에서 살고 있었다. 피에르가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었으나, 1219년 피에르는 육로를 통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다가 에페이로스 공국과의 접전에서 포로가 되어 옥사했다. 반면 욜랑드는 해로를 이용하여 안전하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섭정이 되었다. 그녀는 니케아 제국에 맞서 제2차 불가리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나중에는 니케아 제국과도 협정을 맺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 마리아를 니케아의 황제 테오도루스 1세에게 시집보냈다. 그녀는 그해 45살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피에르가 죽은 후 피에르의 차남 로베르가 황제가 되었다.

3.5 로베르 (1219~1228)

로베르는 피에르와 욜랑드의 차남으로 아버지 피에르가 프랑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오는 도중 죽고 어머니가 라틴 제국의 섭정을 맡았다. 큰형 필리프는 한사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서 황제가 되길 거부하면서 그 덕에 로베르는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라틴제국은 강력한 열강들의 사이에서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로베르는 무능하고 허약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때 강력한 라이벌인 니케아 제국은 1222년 요한네스 3세가 황제로 등장하였는데 이에 반발한 전임 황제의 두 동생이 라틴 제국의 로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로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니케아로 진격했으나, 포이마네논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불과 몇달 뒤에는 테살로니키가 점령당했는데 무능한 로베르는 쾌락만을 쫓았고 여자를 농락하고 수도원과 성당의 보물을 탐하였다. 참다 못한 귀족들이 반발하자 그는 로마로 도망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교황도 그를 무시할 정도였다(...). 로베르는 결국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는 길에 1228년 모레아에서 죽었다. 후사가 없어 동생 보두앵 2세가 즉위했으나, 아직 어려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출신인 브리엔의 장이 섭정을 맡았다.

3.6 브리엔의 장(섭정) (1229-1237)

브리엔의 장은 몬페라토의 코라도의 딸 마리아와 결혼으로 예루살렘 왕이 되었고 보두앵 2세의 사위로서 섭정이 되었다. 브리엔의 장은 브리엔 백작 에라르드의 차남으로 프랑스 필리프 2세에게 발탁되어 1210년 예루살렘 여왕 몬페라토의 마리아와 결혼하여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다. 그는 6년간 끌어오던 이슬람과의 휴전협정을 결론냈으며 1212년 아내 마리아가 죽자 유일한 통치자로 예루살렘을 다스렸는데 얼마 후에 아르메니아 왕국의 공주와 재혼했다. 제5차 십자군 원정기간 동안 장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225년 마리아가 낳은 딸 욜랑드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하자 곧 황제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예루살렘 왕권을 주장하며 장인인 장을 폐위시켜 버렸다. 그는 예루살렘의 왕위에서 쫓겨나 로마로 가서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교황령 토스카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사위인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남부 이탈리아를 공격하는등 사위에 대한 복수를 했다. 1228년 그는 라틴 제국에서 황제의 섭정을 맡으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어린 딸 마리아와 라틴 제국의 어린 황제 보두앵 2세를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기로 했다. 1231년 이미 80에 가까운 나이로 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서 섭정이 되었다. 그는 왕성한 원기를 과시하며 노구를 이끌고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2세와 니케아 제국군을 상대로 싸워 1235년 이들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1237년 3월 장은 죽었고 사위인 보두앵 2세가 즉위했다.

3.7 보두앵 2세(1237~1261)

보두앵 2세는 로베르의 아우이자 피에르의 사남으로 로베르가 사망했을 때 나이가 11살이었기 때문에 브리엔의 장이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장이 사망한 후 라틴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권인 니케아 제국 및 불가리아의 침공을 받아 쇠퇴하기 시작했고 보두앵 2세는 제국를 살리기 위해 서구 여러나라에 원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서구 여러나라의 원조를 얻지 못했고 1261년 라틴 제국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운 사이에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카일 8세의 공격을 받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고 보두앵 2세는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이렇게 라틴 제국은 멸망하고 미카일 8세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에서 동로마 제국 팔라이올로고스 황조를 세우게 된다. 그 후 보두앵 2세는 이탈리아에서 라틴 제국의 황제를 계속 자칭하고 있었지만 1273년 54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의 자손들이 라틴 제국 황제를 대를 이어 자칭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1383년 보두앵 2세의 마지막 후손인 보의 자크가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났다. 자크는 앙주 공 루이 1세에게 칭호를 넘겼지만 루이 1세는 명목만 남은 라틴 황제 칭호를 쓰지 않아 계승이 단절되었다.
  1. 조금 더 의미 전달 위주로 번역하자면 로마 땅의 제국. 천 년의 세월 동안 정치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다소 굴곡이 있기는 했어도, 일반적으로 봤을 때 서유럽인들 역시 동로마를 고대 시절부터 이어져 온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명칭이라 하겠다.
  2. 4차십자군은 성지로 가는 교통편으로 3차십자군의 모범을 따라 해로를 채택했으나 사자심왕 리처드와는 다르게 각 제후들인 만큼 개인 소유의 선박들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 베네치아의 선박들을 대여하게된다. 이렇게 베네치아의 선박을 이용하여 성지로 가는 도중에 선박의 주인들은 지속적으로 대여비를 요구했다. 십자군이 제때 대여비를 지출하지 못할때면 그들은 배를 정박시키거나 시위를 하는등 또는 배를 돌려서 다시 아드리아해로 돌아가겟다고 횡포를 늘여놓았다. 이렇게 자금난에 시달리던 4차십자군에게 접근한 것이 알렉시오스 4세였다. 그는 제국내의 내정문제를 해결해주면 비잔티움의 금은보화를 답례로 주겠다고하며 십자군을 설득하였으다. 제국의 보물을 탐닉하던 엔리코 단돌로의 강력한 찬동과 자금난의 시달리던 4차 십자군의 선택으로 인해서...
  3. 다만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사주니 횡포니 하는 표현은 다소 억울한 감이 있는데, 십자군을 수송하기 위한 함선을 대대적으로 건조한 것은 물론이요 모든 상선들에게 1년간 교역 금지령을 내려야만 했다. 그것도 다른 나라도 아니고 무역이 아니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나라가. 즉 운송료를 내놓으라 요구했던 것은 횡포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4. 이러한 이유로 엔리코 단도롤는 자신을 제국의 3/8만큼의 황제라고 우스개소리를 자주했다고...
  5. 부연설명 :몬페라토의 후작이였던 보니파치오 1세는 플랑드르 백작 출신인 보두앵보다 훨씬 더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였으며 십자군의 기여도 측면에서도 훨씬 더 혁혁한 공을 가진 인물이였다. 그는 4차 십자군의 종결 이후 자신이 당연히 라틴 제국의 황제로 선출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선거인들이 보니파치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세력이 미약한 보두앵을 황제로 내새워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유에서인지 어쩃든 보두앵이 보두앵1세로 선출되자 불만를 가지게된다. 이에 사실상 실세와 불화를 가질 위험을 기피하고 싶었던 보두앵 1세는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게 된다면 그 영토의 대부분을 보니파치오에게 양도할 것을 약속하지만 보니파치오는 이를 거부하고 테살로니카를 기점으로 그리스 연안과 펠로폰네소스의 프랑크 기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반독립적인 봉건정권을 유지하게 된다.
  6. 부연설명 : 찬탈자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실각하고 십자군의 의해서 알렉시오스 4세가 추대된다. 그러나 새로운 황제가 보답으로 건넨 보물들에 만족을 못한 십자군들로 인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약탈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알렉시오스5세 무루추폴로스가 황제위를 찬탈한다. 그는 자경대를 조직하여 약탈을 자행하던 십자군에 대항하지만 그러한 공방 와중에 도시내의 약탈이 더욱 더 심각해지자 화가난 주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그의 정권은 진압된다.
  7. 둔관군제를 중심으로하는 동로마 전통적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