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비존드 제국

그리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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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erio-de-Nicea-Imperio-de-Trebisonda-Despotado-de-Epiro.jpg 1204년의 상황. 왼쪽부터 에피로스 공국, 라틴 제국,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현재의 터키의 작은 도시인 트라브존(Trabzon)[1] 일대에 있었던 나라.

현재 터키의 축구 명문클럽인 트라브존스포르의 어원도 연고지인 트라브존(Trabzon)이다.

1 건국

동로마 제국이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제위가 뒤흔들리자, 멸망하기 전에 앙겔로스 가문에게 제위를 잃었던 콤니노스 가문이 흑해연안 트라브존(옛 트라페주스) 지방에 독립하여 건국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성을 대(大) 콤니노스라는 뜻의 메가스 콤니노스로 바꿨다.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전제 군주국'과 같은 동로마의 후계국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세력을 키워나갔으나, 황제의 사위 가문이었던 라스카리스 가문이 비옥한 서 아나톨리아에 세운 니케아 제국콘스탄티노플과도 더 가깝고 훨씬 강성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소아시아 북동부 뿐 아니라 옛 동로마령 크림 반도의 남부를 점유하여 강국 지위를 유지했지만 튀르크인에게 중요 도시인 시놉을 상실한 후 파플라고니아, 폰토스 지방 인근의 소국으로 전락했다. 라스카리스 가문을 무너뜨리고 니케아 제국의 제위를 찬탈한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고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자 트레비존드 제국은 제국을 재건한다는 명분마저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미니 국가로 전락한 이후에도 옛 동로마 시대부터 내려져온 유구한 전통, 즉 내전(...)이 트레비존드 제국의 역사 내내 계속되어 정치적으로는 파탄 상태에 가까웠다.

이렇게 계속 막장 일보직전인 상태였으나 그래도 황제의 칭호는 계속 유지하였으며(다만 "로마인"들의 황제가 아닌 "트레비존드"만의 황제로 한정) 그럭저럭 나라는 유지했다. 수도 트레비존드는 실크로드와 흑해 연안 일대의 무역 중심지가 되어 번영을 누렸다. 문제는 경제력에 비해 영토와 인구가 형편없어서, 국방력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나중에 오스만 제국이 흥성하게 되자 이쪽도 동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쪼들리면서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도 상업으로 얻은 부를 기반으로 문화와 경제 면에서는 계속 번영할 수 있었다.

15세기 초기에는 잠깐 사정이 나아졌는데, 바로 그 유명한 티무르와 동맹을 맺은 덕에 오스만 제국에게서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트레비존드는 이렇게 얻은 이득을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군대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437년 트레비존드를 방문한 카스티야인 저술가 페드로 타푸르(1410~1484)는 트레비존드의 전체 군인 수가 채 4,000명이 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2 멸망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1456년 아테네가 함락, 1460년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세 명칭)가 함락됨에 따라 함께 남아있는 유일한 그리스계 국가가 되었다. 이미 1456년에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받아 함락 위기에 놓인 바 있던 트레비존드 제국의 요안네스 4세는 백양 왕조와 같은 인접 튀르크 국가들의 공주들을 정략 혼인으로 맞아들여가며 국가를 보존하려 애썼으나, 그 동생이었던 다비드 2세는 인접 튀르크 국가들과의 동맹에 의존하기 보다는 서구 가톨릭 국가들을 선동하여 십자군을 일으키려고 들었는데 이것이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려 메흐메트 2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트레비존드를 침공하여 1461년 근 400년을 이어온 메가스 콤니노스 가문은 멸족당하게 되었다. 마지막 황제 다비드 메가스 콤니노스와 아들들은 참수당했고[2], 여자들은 술탄의 하렘에 들어가거나 튀르크 장군들의 노예로 끌려갔다.

3 트라브존의 그리스인들

3.1 터키 치하

이후 트레비존드의 그리스인들은 터키인들의 치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별 문제없이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애초에 오스만 제국의 지방통치제는 기본적으로 중요거점만 중앙에서 임명하는 총독이 파견되어 통치하고, 지방도시 및 향촌은 현지 유력자들이 자치하는 형태를 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시기 트라브존의 그리스인들은 자치를 누렸으며, 대표적인 예로 트라브존의 구시가지에 위치한 아야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의 그것과 이름이 같다.) 오스만 제국 시기에도 교회로 남아있었다. 이전 문서에서는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인들은 언제나 노예상태였고, 튀르크인들의 변덕에 따라 살해당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고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전제국가에서 노예상태가 아닌 신민이 누가 있단 말인가? 마키아벨리 말마따라, 메흐메트 2세 이후의 오스만 제국은 철저한 전제군주제로 전환되었고, 그리스인이 아니라 그 누가 되었던, 심지어 황족들조차도 술탄의 심기에 거스르면 죽는건 똑같았다(...)

이 시기 흑해지방에는 동쪽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서쪽으로 점차 교역 및 이주를 통해 영역을 확장하던 판이었고, 트라브존에도 20세기 초까지 상당한 규모의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에 따라 정교도인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소속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서로 다른 법과 제도를 적용하고 있었고, 아르메니아인과 더불어 제국의 거상들로 유명했던 그리스인들은 이들과 비즈니스 차원에서나 종교적인 차원에서나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해지방의 그리스인들, 즉 폰토스인들은 그리스의 독립 이후에도 모국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서 존재하고자 했다. 애초에 비잔틴 시절부터 분리되어 살아오고 있었던데다가, 민족주의 사상 이후에도 이들은 본토 그리스인들에 대해 동일한 민족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

3.2 현재

1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에게 승전국인 유럽 열강들은 여러 영토를 서로들 가져가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런 처사에 반발하던 인물, 아타튀르크가 주도한 전쟁에서 패하면서 죄다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사실 여기 살던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본토의 그리스 왕국에 합병되는 것은 별로 관심없어했고, 파리 평화회담에서 "폰투스 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물론 그리스조차 반대했다. 베니젤로스 총리가 보기에 신생 폰투스 공화국은 그리스 본토에서 너무 멀고, 터키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지키기엔 너무 약하리라 판단했기 때문.

하지만 그리스의 아나톨리아 공격에 따라 벌어진 터키 독립전쟁의 와중에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독립국을 세우고자 민병대를 일으켰고 인근의 터키인, 아르메니아 촌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터키 공화국 성립 이후 더 강경해진 반그리스 정책으로 인해 수 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살해당하고 폰토스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전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약 150만명[3]이 강제 이민당하여 오늘날 이 지역에서는 그리스인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4]

사실 이걸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볼 수 없는 게 폰토스 민병대가 트라브존 지역에서 벌인 학살과 약탈은 유럽 승전국들 언론까지도 엄청 욕할 정도로 악랄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경쟁 및 원한관계가 있었던 아르메니아인들까지 덩달아 약탈과 학살도 당했고 심지어 그리스계 혼혈이라든지 비 이슬람 소수계까지 학살 및 약탈당했다. 덕분에 이들은 철저히 아타튀르크군들을 지지해 이 와중에 그리스인들이 보복으로 학살당해왔는데, 워낙에 그리스가 저지른 일도 악랄했고 증거들이 남아서 현재 그리스는 아르메니아처럼 학살이라고 터키를 비난하지 못한다. 물론 그리스 극우들이야 터키 측 학살이라고 주장하지만 국제적으로 씨알도 안 먹힌다. 아타튀르크와 이스메트 이뇌뉘는 그리스군이 벌인 학살현장을 사진 및 여러 증거로 국제적으로 알렸고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 신문에서도 불바다가 된 트라브존에서 폰토스 그리스 민병대에게 학살된 시체들을 보도했다. 지금도 트라브존 지역 역사 박물관에선 당시 그리스군이 불바다로 만들어버린 트라브존 사진과 당시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퇴거했지만, 그리스인들이 남겨놓은 트레비존드 제국 시절 문화유산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
  1. 중세, 현대 그리스어로는 트라페준다(Τραπεζούντα)
  2. 다비드의 막내아들인 요르요스는 조지아로 탈출했으나, 이후 행적에 대해 기록이 없다.
  3. 그러나 구분 기준이 종교여서 정교인이면 "너는 그리스인이니까 추방" 식이라 모국어는 터키어인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사람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콘야남부에 위치한 카라만 지방의 주민들인데, 이들은 모국어인 터키어를 그리스문자로 표기하는 등 그리스 문화와 터키 문화 사이에 걸쳐있었다.
  4. 하지만 사용 언어가 아닌, 종교로 추방했기 때문에, 현재에도 폰투스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어르신들이 있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