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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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폰 뷜로우 | ← |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 → |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
풀네임 | Theobald Theodor Friedrich Alfred von Bethmann-Hollweg (테오발트 테오도르 프리드리히 알프레트 폰 베트만홀베크) |
출신 정당 | 무소속 |
생몰년 | 1856년 11월 29일 ~ 1921년 1월 1일 |
재임기간 | 1909년 7월 14일 ~ 1917년 7월 31일 |
1 개요
독일 제국의 정치인으로 1차 대전 시기 독일의 총리를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1856년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법률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군 출신의 융커였으며, 어머니는 스위스인이었다. 어쨌든 금수저 뼈대있는 가문이었던만큼 가방줄은 길었고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 대학교 공부를 마친 이후 행정 관료로 경력을 시작한다. 행정 관료로의 능력은 출중하여 1899년 브란덴부르크 주지사로 임명된 데 이어 1905년에는 프로이센 왕국 전체의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1909년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의 뒤를 이어 독일 제국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출세는 정점을 찍는다.
2.2 수상 재임기
베트만홀베크가 취임할 당시 독일은 말 그대로 유럽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였다.[1] 이에 빌헬름 2세와 베트만홀베크는 다시 한 번 승부수를 던진다. 1911년 술탄의 대항하여 모로코에서 일어난 폭동을 프랑스가 진압해버리자 1차 모로코 위기 당시 체결한 협정에 어긋남을 지적하면서 모로코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신변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을 파견한 것. 하지만 이번에도 망했어요. 급기야 영국은 1911년 7월 제3국이 프랑스를 침공할 경우 프랑스를 지원할 원정군을 파병할 것을 약속하는 방위조약까지 체결해버린다.[2] 답이 없는 독일의 외교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고자 베트만홀베크는 건함 경쟁을 완화하고 영국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개선하고자 해군력 감축 협상을 시도했지만 티르피츠 제독이 이끄는 독일 군부의 반대에 발목이 잡히고 만다. 게다가 양국의 이견 역시 좀처럼 좁혀지지 못해 결국 해군 협상은 아무런 성과없이 중단되어버린다. 이로 인하여 베트만홀베크 내각은 각계각층으로부터 십자포화를 얻어맞고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3]
그나마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 내각 말기의 경제적 위기를 괜찮게 제어했던 덕분에 베트만-홀베크 내각은 붕괴되지 않고 그냥저냥 존속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1914년 6월 문제의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면서 전 유럽이 혼돈에 휩싸이게 된다. 걸어다니는 폭탄 빌헬름 2세는 아무런 생각 없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사라예보 사건의 해결책에 대한 외교적인 백지수표[4]를 제시해주면서 문제는 더욱 커지게 된다.[5][6] 참모총장 몰트게와 회담을 나눈 끝에 베트만홀베크 역시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7], 결국 일련의 사태 끝에 7월 28일 1차 대전이라는 헬게이트가 열리고 만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거의 모든 독일의 대내외 정책은 군부에 의하여 주도되고 베트만홀베크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된다. 1915년 이후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 분명해지자 베트만홀베크는 미국이 중재하여 평화협상을 진행할 것을 꿈꿨지만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주도하는 군부는 이러한 의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급기야 1917년에는 미국의 마찰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시해버린다. 베트만홀베크는 이에 반발하여 사임할 생각까지 품었지만, 이러한 행동이 불러일으킬 정치적 혼란을 우려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라이히스탁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한 동의안 의결을 요구해야만 했고 결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치머만 전보 사건과 함께 미국의 참전을 야기하고 만다. 미국의 참전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베트만홀베크의 정치적 힘을 앗아가버렸고 결국 1917년 7월 그는 제국 수상 자리에서 사임하고 만다.
2.3 이후
수상직에서 물러난 이후 베트만홀베크는 정계에서도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다가 1921년 폐렴에 걸려 사망한다.
3 여담
- 무척이나 비관주의 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을 정도.
브란덴부르크 일대에 위치한 자신의 영지를 관리인이 보리수로 꾸미려고 하자, 베트만홀베크는 그 관리인을 말렸다.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얼마 있지 않아 이곳은 러시아의 영토가 될 것이니 괜한 헛수고하지 말라."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예지력 흠좀무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패배주의에 물든 인간이 총리였던 점에서부터 독일이 1차대전에서 이길 가능성은 제로였다'라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 비스마르크, 뷜로우를 필두로 대부분의 독일 수상들이 수상직에서 내려온 이후 빌헬름 2세와 극악의 관계였는데, 그래도 베트만홀베크는 빌헬름 2세에게 미운 정이 들었는지 마지막까지도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1차대전 종전 후 연합국이 빌헬름 2세를 전범으로 기소하려고 하자 자기가 대신 기소되겠다고 나설 정도.
- ↑ 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있기는 했다만 나중에 1차대전에서도 보이듯이 그리 도움을 주는 동맹국은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말만 삼국동맹의 일원이지 거의 마이웨이였고.
- ↑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이지만 1차대전 당시 영국이 참전한 근거는 영불협상이 아니라 이 방위조약 때문이었다. 영불협상은 상호간의 군사적 지원의 의무는 없는 친선조약이었다.
- ↑ 아예 1912년 실시된 라이히스탁 선거결과를 보면 사민당과 중앙당이 전체 의석의 2/3 가까이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나마 독일 제국의 수상이 의회가 아니라 황제에게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당장 실각하고도 남는 상황.
- ↑ 전쟁을 하든 협상을 하든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원하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유일하게 붙은 조건은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 오스트리아의 입장이 번복되는 일이 없을 것.'이었다.
- ↑ 심지어 빌헬름 2세는 이 백지수표를 약속하고는 유유자적 북해로 여행을 떠나버린다(...)
- ↑ 근데 막상 백지수표를 제시해주면서도 빌헬름 2세는 사라예보 사건이 거의 모든 유럽국가들이 참전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여행에서 복귀하면서 빌헬름 2세는 베트만홀베크에게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냐'면서 강하게 질책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에 베트만홀베크가 사의를 표하자 '니가 싼 똥은 니가 치우라'면서(...) 사의도 불허.
- ↑ 근데 베트만홀베크도 이 시점에서 프랑스와 러시아가 참전할 것은 예상했어도 영국이 참전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모양이다. 영국의 대독 선전포고 직후 주독 영국 대사에게 '어떻게 그딴 종이 쪼가리 하나(=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1839년 런던 조약) 우리와 전쟁을 하느냐'라면서 노발도발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