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 산타나 (Telê Santana) | ||
본명 | 텔레 산타나 다 시우바 (Telê Santana da Silva) | |
생년월일 | 1931년 7월 26일 | |
사망일 | 2006년 4월 21일 | |
국적 | 브라질 | |
출신지 | 미나스제라이스 주 이타비리투 | |
포지션 | 윙어 | |
소속팀 | 플루미넨시 (1951–1960) 구아라니 (1960–1962) 바스쿠 다 가마 (1963) | |
지도자 | 플루미넨시 (1969–1970)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1970–1972) 상파울루 FC (1973)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1973–1975) 보타포구 (1976) 그레미우 (1976-1978) 파우메이라스 (1979-1980)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1980-1982) 알 아흘리 SFC (1983-1985)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1985-1986)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1987-1988) 플라멩구 (1988-1989) 플루미넨시 (1989) 파우메이라스 (1990) 상파울루 FC (1990-1996) |
지저분한 경기나 부당한 골을 얻어 이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패배를 택할 것이다.
목차
1 소개
화려한 셀레상의 역사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한 명장
월드컵 우승을 하지 못했음에도 브라질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
텔레 산타나는 브라질의 前 축구 감독이다. 그는 선수 시절 브라질의 탁월한 윙어였지만 국가대표로는 단 한 차례도 뽑히지 못했다. 하지만 감독 시절에 브라질 리그의 무수한 팀을 맡아 많은 업적을 남겼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2번 맡아 특유의 '아름다운 축구[1]'를 구사해 팬들을 열광시켰다. 비록 그의 재임 시기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우승을 이루지 못했지만 브라질 팬들은 아름다운 축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국가대표팀을 자랑스러워했고 산타나를 위대한 감독으로 추앙했다. 그후 브라질 팬들은 월드컵 우승을 하더라도 산타나가 보여준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하지 못하면 가차없이 비난을 퍼부었고 후임 감독들은 그런 팬들의 기대에 맞춰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사상 최악의 치욕을 야기하고 말았다.
2 선수 경력
산타나는 어린 시절부터 브라질 청년이면 으레 그렇듯이 축구에 관심을 품었고 1949년 18살의 나이에 플루미넨세 유스 팀에 입단햇다. 이후 유스팀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산타나는 1951년 20살의 나이에 1군에 올라오면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플루미넨시에서 1960년까지 9년간 활약하며 557경기 165골을 기록하며 플루미넨시 역대 득점 랭킹 3위를 기록했다. 또한 그는 플루미넨시에서 리우 데 자네이루 주 리그를 3번 우승했고(1951년, 1959년, 1960년) 리오 코파를 1952년에 우승했으며 Torneio Rio-São Paulo를 1957년에 한 번 우승했다. 이후 산타나는 1960년에 소속팀을 떠나 구아라니와 바스쿠 다 가마를 연이어 거쳤지만 경기 출전은 단 한 차례도 없었고 1963년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3 감독 경력
3.1 브라질의 명장
1971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 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환호하고 있는 산타나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 그는 코치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플루미넨세의 유스팀 코치로 부임해 수년간 코치 연수를 수행하고 1969년 1군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감독을 맡자마자 리우 데 자네이루 주 리그와 Taça Guanabara를 우승해 더블을 달성했다. 이후 1970년, 산타나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1970년 미네이루 주 리그를 우승한 데 이어 1971년 브라질 세리에 A우승을 차지하면서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를 브라질 최고의 클럽으로 이끌었다. 이후 1972년까지 아틀레치쿠에서 일한 산타나는 팀을 떠나 1년 간 휴식하다가 1973년 상파울루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상파울루에서 보드진과 클럽 경영을 둘러싸고 갈등을 빛다가 얼마 안가 쫓겨났다.
상파울루에서 쫓겨난 산타나는 1973년 8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로 돌아왔다. 그는 1975년 9월까지 아틀레치쿠에서 감독을 맡았지만 이번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고 말았다. 그후 1976년엔 보타포구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그런 그가 다시 업적을 쌓은 곳은 그레미우였다. 1976년 9월 9일 그레미우의 감독으로 부임한 산타나는 1978년까지 이 팀을 맡으며 지역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후 1979년 플루미넨세의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1년간 감독 직을 수행하다가 1980년 브라질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3.2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1기
1980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산타나는 브라질을 월드컵 본선에 가볍게 진출시켰다. 이후 그는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서 브라질 축구 역사에 길이남을 환상의 4중주를 결성한다. 지쿠, 소크라테스, 토니뉴 세레주, 호베르투 팔캉이 바로 그 멤버였다. 이들의 면면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1. 지쿠는 통칭 하얀 펠레라고 불린 인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엄청난 득점 기록을 쌓아올렸고(클럽 통산 697경기 475골, a매치 72경기 52골) 경기를 읽는 눈이 예리할 뿐더러 '발에 레이더가 달렸다'는 찬사를 들을만큼 정교한 킥으로 수비 허점을 노리고 길고 짧은 패스를 자유자재로 뿌려 역대 최고의 공미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프리킥도 매우 잘 차서 통산 101골(비공식 기록)을 달성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드리블, 패스, 슈팅을 모두 갖춘 브라질의 판타지스타였다.
2. 소크라테스는 1980년대 세계를 풍미한 수퍼스타로,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특유의 곱슬머리와 헤어밴드, 턱수염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탁월한 시야를 보유해 경기장 곳곳에 위협적인 패스를 뿌려주는 역할을 했으며, 경기를 읽는 능력도 뛰어났다. 게다가 양발잡이에 몸싸움 능력까지 갖추었으며 테크닉도 탁월해 가히 플레이메이커의 정석으로 불릴 만 한 선수였다. 또한 의대 출신으로 의학 박사 학위 및 전문의 자격증까지 보유하였으며 철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할 정도로 팔방미인이기도 했다.
3. 토니뉴 세레주는 1980년대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는 강력한 체력, 견고한 수비력, 안정적인 볼 키핑력, 날카로운 패스 능력 등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는 AS 로마와 UC 삼프도리아 소속으로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두번 출장했으나 아쉽게 우승을 하지 못했다. 또한 자국 리그의 상파울루 소속으로는 코파 리베르타 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달성했다.
4. 호베르투 팔캉은 1970~1980년대 브라질과 세리에A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서 명성을 떨쳤다.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1973년부터 1979년까지 활동하며 브라질 세리에 A 3회 우승(1975년, 1976년, 1979년)과 198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우승에 기여했으며 1980년 세리에 A의 AS 로마로 이적한 후 5년간 활동하면서 세리에 A 역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하나로 거론될 정도로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다. 엄청난 테크닉, 왕성한 활동량, 훌륭한 축구 지능을 기반으로 한 그의 탁월한 경기력은 AS 로마 팬들을 경탄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AS 로마에서 세리에 A 1회 우승(1983년)과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1981년, 1984년)에 기여했다. 잘 알려져 있듯 현시대의 콜롬비아 스트라이커 라다멜 팔카오의 이름은 이 인물에게서 따온 것이다.
산타나는 이 4명의 미드필더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이른바 4-2-2-2 전술을 도입했다. 전방에 투톱을 세우고 공미 자리에 지쿠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중원에 세레주와 파우캉을 배치했다. 그 결과 4명의 선수들은 중앙에서 탁월한 볼 컨트롤과 환상적인 패스워크를 보여주며 상대팀이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고 쉴새없이 몰아붙였다. 브라질은 이들의 활약을 앞세워 조별 예선에서 같은 조에 속한 소련, 스코틀랜드, 뉴질랜드를 모조리 격하하며 3전 전승으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런데 2라운드에서, 브라질은 사상 최악의 조에 속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와 한 조에 속한 것이다. 이들 모두가 월드컵 우승을 경험하였고 아르헨티나는 디펜딩 챔피언에 브라질은 우승 3회, 이탈리아는 우승 2회를 기록, 세 나라 모두 월드컵 우승 후보로 손꼽혔다. 이 세팀의 혈투 끝에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가 이탈리아에게 2-1로 패한 후 브라질에게 3-1로 패해 2패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탈리아와 브라질의 진검승부.
결과는 (브라질의 입장에선 하필 이날 일생일대의 맹활약을 펼친) 파올로 로시의 해트트릭을 앞세운 이탈리아가 3-2로 승리하였다. 이 경기를 지켜본 브라질 팬 2명이 자살하고 5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등, 브라질 사람들은 석패에 깊이 슬퍼했다. 이를 라 데시마 참사라고 한다. 하지만 32년전에 있었던 마라카낭의 비극과 32년 후에 있을 미네이랑의 비극과는 달리, 이 패배의 주인공인 선수들과 산타나 감독은 브라질 팬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그들은 비록 지긴 했지만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하며 브라질의 정신을 지켰다는 호평을 받았고 마침 이 월드컵에서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히혼의 수치라고 명명될 정도로 비겁한 경기를 치룬 것과 비교되어 "저렇게 더럽게 이기느니 정정당당하고 아름답게 승부하다가 패하는 게 낫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브라질이 2라운드 진출에 그친 것은 사실이었기에, 산타나는 책임을 지고 사임을 선언했다.
3.3 알 아흘리 시절
브라질 대표팀을 떠난 후, 산타나는 1983년 사우디 아라비아의 축구 구단 알 아흘리 SFC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983년 킹스컵 우승을 차지했고 1984년에는 사우디 리그 우승, 1985년에는 걸프 컵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던 1985년, 산타나는 브라질 축구 대표팀의 감독으로 재선임되었다.
3.4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2기
산타나는 브라질 대표팀을 맡은 후 1986 멕시코 월드컵에 참여했다. 당시 브라질은 D조에 속해 스페인, 북아일랜드, 알제리와 한 조를 이루었다. 브라질은 스페인을 1:0으로 이기고 뒤이어 알제리를 1:0으로 격파하고 3차전 북아일랜드를 3:0으로 제압, 또다시 조별 예선에서 3전 전승을 달성하며 16강에 진출했다. 이후 16강에서 폴란드를 4:0으로 완벽하게 격파하고 프랑스와 8강에서 맞붙었다. 경기 결과는 1:1 무승부. 결국 승부는 승부차기까지 갔고 프랑스가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승리했다. 대회가 끝난 후 산타나는 대표팀 감독 직에서 물러났다.
3.5 방랑기
1987년 8월 7일, 산타나는 아틀리치쿠 미네이루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성적 부진으로 인해 1988년 10월에 떠나야 했고 며칠 후 플라멩구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1989년 9월 19일까지 팀을 맡았다. 그후 플루미넨시에서 1989년의 잔여 기간을 보낸 산타나는 1990년 파우메이라스의 감독으로 부임해 몇달간 머무르다가 얼마 후 상파울루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가 얻어낸 수확은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 1988년 미네이루 지역 리그 우승을 기록한 것과 1989년 플라멩구에서 Taça Guanabara를 우승한 것 뿐이었다.
3.6 상파울루 시절
1990년 상파울루의 감독으로 부임한 산타나는 이후 그의 감독 인생 최고의 시기를 맞이한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석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자신만의 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후 승승장구하며 상파울루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그는 상파울루에서 안토니우 카를로스 자구, 카푸, 레오나르두, 호제리우 세니, 그리고 엘베튼 같은 슈퍼 스타들을 발굴했다. 이후 산타나는 1996년까지 상파울루에서 6년간 집권하며 다음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
브라질 세리에 A 우승 : 1991년
상파울루 주 리그 우승 : 1991년, 199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 1992년, 1993년
인터콘티넨탈 컵 우승 : 1992년, 1993년
Supercopa Sudamericana 우승 : 1993년
Recopa Sudamericana 우승 : 1993년, 1994년
남미축구연맹컵 우승 : 1994년
상파울루에서 이렇듯 엄청난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팬들은 그를 '마스터'라고 불렀고 그를 숭배하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1996년 1월, 뇌경색에 걸려 건강이 안좋아진 산타나는 결국 상파울루를 떠나야 했다.
4 은퇴 후의 삶
1997년 초순, 산타나는 파우메이라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는 듯 했으나 건강 문제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감독 인생을 완전히 접어야 했다. 건강 악화로 고생하던 산타나는 2003년 혈행장애로 왼발을 절단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며, 2006년 4월 21일 장염이 악화되며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 감독 스타일 : 아름다운 축구
O Jogo Bonito, Brasil 1982
산타나는 브라질 팬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운 축구를 실제에 구현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경기 내내 공격을 퍼부울 것을 강조했고 탁월한 키핑력, 개인기, 그리고 환상적인 패스워크로 상대를 절묘하게 요리하는 것을 추구했다. 브라질 팬들은 이 축구야말로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며 자랑스러워했고 비록 우승엔 실패했지만 산타나는 위대한 감독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1982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은 이탈리아와 상대했을 때 일전에 아르헨티나를 3:1로 격파했기에 아르헨티나를 2:1로 격파한 이탈리아보다 골득실에서 앞섰다. 따라서 브라질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무승부를 따내기만 햇어도, 이들은 2라운드를 돌파하고 더 높은 순위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타나는 비겁하게 무승부나 따내려고 수비적으로 나서느니 아름다운 축구를 추구하겠다며 시종일관 공격 전술로 일관했고 결국 이탈리아의 역습 축구에 말려 3:2로 패하고 말았다.
어쨌든 브라질 팬 및 축구 관계자들은 산타나식 아름다운 축구를 브라질이 추구해야 할 이상향으로 정했고 이후 대표팀이 월드컵을 우승해도 자신들이 원하는 축구를 하지 않으면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이에 대해 둥가는 실리적인 축구의 정당성을 역설했지만 브라질 축구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브라질이 2014 월드컵에서 참담한 비극을 맞이한 후, 브라질은 그제야 실리 축구로 방향을 선회하고 둥가를 선임했다. 그러나 정작 둥가는 자신이 원하는 실리 축구를 추구할 만한 실력이 없었고, 현재 브라질 축구는 심각한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다.- ↑ 포 o jogo bonito. 브라질 특유의 아름다운 경기 스타일을 일컫는 말로 고유명사화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는 단어다. 이 단어에서 착안해 나이키에서 Joga Bonito('아름답게 경기하라'라는 뜻)라는 이름의 축구 광고 시리즈물을 만들기도 했다. 국내 한정으로는 아름다운 축구 했잖아와 혼동될 수 있지만 극단적으로 점유율에만 집착하는 티키타카를 비웃는 '아름다운 축구 했잖아'와는 엄연히 연원이 다른 개념이다.